- 전작의 필모를 지렛대 삼아, <모자무싸> 안에서 기막힌 평행이론과 데자뷔를 선사하는 네 배우의 영리한 변주를 조명 모자무싸>
- 어릴 적 트라우마(고윤정), 한량 남편 페이소스(오정세), 해탈 뒤 찾아온 현실의 무게(박해준) 등 전작의 잔상을 입체적으로 비틀며 극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는 이들의 스텝
시청자가 마주하는 기분 좋은 기시감은 때로 작품을 읽는 또 하나의 프레임이 된다. JTBC 토일드라마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이하 〈모자무싸〉)를 채우는 인물들을 따라가다 보면, 배우들의 전작 필모그래피가 묘하게 겹쳐 흐르는 순간과 마주하게 된다. 물론 공식적인 세계관의 연결은 아니다. 하지만 배우들이 과거에 남긴 강렬한 잔상이 이번 작품 속 역학 관계나 직업적 배경과 맞물리며 기막힌 평행이론을 만들어낸다. 전작의 궤적을 지렛대 삼아, 익숙함 속에서 전혀 새로운 변주를 빚어내고 있는 네 배우의 흥미로운 링크를 살폈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 강말금
강말금은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에서 영화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프로듀서 '찬실'을 연기하며 평단과 대중 양쪽의 뜨거운 지지를 받았다. 그런 그녀가 〈모자무싸〉에서 영화 제작사 대표로 돌아온 것은 전작을 기억하는 이들에게 묘한 쾌감을 선사한다. 영화계 바닥에서 온갖 풍파를 겪던 찬실이가 마침내 자신의 회사를 차려 대표로 '승진'한 것 같은 기분 좋은 착시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강말금은 특유의 현실감 넘치는 연기로 척박한 영화계를 버텨내는 인물의 단단함을 고스란히 이어받으면서도, 대표라는 직책에 걸맞은 책임감과 유연함을 자연스럽게 얹어낸다. 전작의 서사를 영리하게 연장하되 그 위에 새로운 결을 덧댄 변주다.
〈이사랑 통역 되나요?〉 고윤정
고윤정은 전작 〈이 사랑 통역 되나요?〉에서 화려한 톱배우로 거듭나는 인물을 맡아, 카메라 앞에서 가장 찬란하게 빛나는 직업의 단면을 그려냈다. 반면 이번 〈모자무싸〉에서 그녀의 무대는 카메라 뒤편이다. 작품과 배우들이 빛날 수 있도록 현장에서 가장 애쓰는 영화 프로듀서로 변신한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외적인 직업 대비 뒤로 묘한 내면적 공통점이 흐른다는 사실이다. 전작에서 어릴 적 트라우마로 인해 해리성 정체감 장애를 겪는 인물을 밀도 있게 표현했던 그녀는, 이번 신작에서도 유년기에 겪은 충격과 상처를 간직한 채 살아가는 인물을 연기한다. 고윤정은 전작의 아픔과 결을 같이 하는 깊은 내면 연기 위에 180도 다른 직업적 변신을 얹으며 캐릭터에 단단한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동백꽃 필무렵〉 오정세
오정세는 〈동백꽃 필 무렵〉에서 변호사 아내 홍자영(염혜란)의 철부지 남편 '노규태'로, 이어 〈폭싹 속았수다〉에서도 아내의 속을 썩이는 한량 남편으로 등장해 독보적인 '짠내' 영역을 구축했다. 이번 〈모자무싸〉에서 그가 마주한 역학 관계 역시 이 유쾌한 잔상의 연장선에 있다. 그는 영화 제작사 대표인 고혜진(강말금)의 남편이자 영화감독인 '박경세'로 분한다. 다만 이번엔 단순한 철부지를 넘어 생업과 예술의 기로에 선 페이소스가 더해졌다. 데뷔작 이후 줄줄이 흥행 참패를 맛보며 아내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처지인 것. 기 센 아내에게 잡혀 살던 특유의 유전자를 그대로 이어받으면서도, 업계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예술가의 서글픈 현실을 얹어낸 오정세의 연기는 시청자들을 다시 한번 그의 사랑스러운 매력 속으로 빠져들게 만든다.
〈나의 아저씨〉 박해준
박해준의 출연은 두 작품이 모두 휴머니즘의 깊이를 짚어내는 '박해영 작가'의 대본이라는 점에서 가장 거대한 평행이론을 완성한다. 전작 〈나의 아저씨〉에서 엘리트 코스를 밟던 중 돌연 속세를 떠나 해탈한 스님 '겸덕'을 연기하며 번뇌를 잊은 삶을 보여주었던 그는, 이번 〈모자무싸〉에서 정반대의 궤적을 그린다. 촉망받던 시인이었으나 펜을 내려놓고 용접과 일용직을 전전하며 삶의 의지를 잃어버린 인물로 돌아온 것이다. 번뇌를 초탈했던 전작의 얼굴은 간데없고, 생계를 위해 현실의 무게를 견디며 생기를 잃어버린 그의 모습은 안쓰러움을 자아낸다. 비록 직업과 상황은 바뀌었지만, 인간의 본질적 쓸쓸함과 무가치함을 위로하는 박해영 작가의 세계관 안에서 박해준이 빚어내는 삶의 페이소스는 여전히 짙은 공감대를 형성한다.
Copyright ⓒ 바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본 콘텐츠는 뉴스픽 파트너스에서 공유된 콘텐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