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엄마의 부재와 결핍을 스스로 제 발로 땅을 딛는 성장 동력으로 삼은 안방극장의 입체적인 딸들의 이야기
- 고윤정, 박보영, 채원빈이 연기하는 캐릭터들을 통해 결핍을 결함으로 남겨두지 않고 자신만의 독립적인 생존 문법과 단단한 세계를 구축해 나가는 동시대적 서사의 변화
오랫동안 '모성애'는 서사의 안전한 구원 투수이자 거룩한 성역이었다. 스크린 안의 어머니는 언제나 무한한 희생으로 자녀를 감싸 안았고, 그 온기를 받지 못하고 자란 딸들은 대개 비련의 피해자가 되어 수동적 위로의 대상으로 남곤 했다. 그러나 최근 안방극장을 채우고 있는 여성 캐릭터들을 보고 있으면 미디어 속 서사가 한층 입체적이고 현실적인 궤도에 진입했음을 실감하게 된다. 완벽하고 무결한 모성의 보호막 대신, 성장기의 한복판에 깊숙이 새겨진 '엄마의 부재와 결핍'을 동력 삼아 스스로 제 발을 땅에 딛는 딸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고윤정
JTBC 토일드라마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에서 고윤정이 연기하는 영화 프로듀서 '변은아'는 결핍이 빚어낸 가장 입체적인 얼굴이다. 업계에서 '도끼'라 불릴 만큼 냉철한 실력파지만, 관계의 균열을 마주할 때마다 아홉 살 때 방치됐던 유기의 공포로 돌아가 코피를 흘린다. 지독한 트라우마의 발현인 셈이다. 극의 아이러니는 은아를 버린 생모(배종옥)가 정작 대중의 사랑을 받는 '국민 엄마' 배우라는 점에 있다. 세상이 칭송하는 모성의 신화가 자신에게는 가장 시린 결핍이 되는 환경 속에서, 은아는 비련의 피해자로 주저앉는 대신 자신의 자리를 개척했다. 여전히 생모를 향한 감정은 날카롭지만, 결핍마저 동력 삼아 성장한 은아의 존재감은 모성의 구원 없이도 홀로 설 수 있는 인간의 단단한 가치를 증명한다.
〈골드랜드〉 박보영
이러한 서사의 지각변동은 장르물의 최전선인 OTT에서도 고스란히 이어진다. 디즈니+ 오리지널 시리즈 〈골드랜드〉 속 희주(박보영)의 삶 역시 서늘한 결핍에서 출발한다. 의붓아버지의 학대와 자신을 딸이 아닌 ‘이모’라 부르게 했던 친모(문정희)의 외면 속에서, 희주는 끝내 스스로 집을 나와 거친 세상에 홀로 정착했다. 세관원이 된 그녀가 우연히 1500억 원이라는 천문학적인 금괴 밀수 사건에 휘말리며 맹렬한 욕망에 사로잡히는 것은, 어쩌면 지독했던 성장기의 결핍을 통째로 보상받으려는 생존 본능에 가깝다. 성인이 되어 마주한 생모가 불치병으로 시한부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뒤늦게 알게 된 엄마의 서사는 희주의 마음을 애잔함과 답답함으로 흔들어놓는다. 하지만 희주는 비련의 서사에 갇히지 않고, 결핍의 아픔과 금괴를 향한 열망 사이에서 팽팽한 서스펜스를 유지하며 스스로의 선택으로 삶을 구원해 나간다.
〈오늘도 매진했습니다〉 채원빈
모성의 온기 없이 홀로 서야 했던 성장기의 아픔은 SBS 수목드라마 〈오늘도 매진했습니다〉의 쇼호스트 담예진(채원빈)에게도 고스란히 이어진다. 그녀 역시 자신을 가장 화려하게 포장해야 하는 홈쇼핑의 세계에서 자기만의 궤도를 포개어 간다. 톱배우인 생모 송명화(우희진)의 커리어를 위해 존재를 부정당하고, 기자들 앞에서 외면당했던 기억은 예진에게 낙인으로 남았다. 성인이 되어 우연히 생모와 함께 나선 홈쇼핑 방송에서 겪은 '굿모닝 크림' 사태는, 그녀에게 뷰티 방송 기피증과 지독한 불면증이라는 트라우마까지 안겼다. 그러나 예진의 서사가 빛나는 지점은 이 시린 결핍의 그늘 속에서도 결코 무너지지 않았다는 데 있다. 슬픔을 딛고 당당히 자신만의 커리어를 쌓아 올리며 업계 최고의 쇼호스트로 거듭난 것. 모성의 온기 대신 스스로를 치유하고 증명해 나가는 이들의 고군분투는 수동적인 위로를 넘어 캐릭터를 향한 설득력을 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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