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희 더봄] 마테라의 캠핑장에서 만난 거인의 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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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희 더봄] 마테라의 캠핑장에서 만난 거인의 벤치

여성경제신문 2026-05-21 10:00:00 신고

5월의 끝이다. 메시나에서 열심히 달려와 마테라 근처에서 꿈같은 캠핑장을 만났다. 언덕은 토스카나를 연상시키는 황금빛 밀밭으로 물들었고, 바람은 여름 직전 특유의 마른 냄새를 품고 지나간다.

마테라 캠핑장 입구의 토스카나 사이프러스 가로수 /사진=박재희
마테라 캠핑장 입구의 토스카나 사이프러스 가로수 /사진=박재희

풍경에 취해 바람을 맞으며 올라간 언덕 위에는 이상할 정도로 큰 벤치 하나가 놓여 있었다. 캠핑장에 도착했을 때부터 더듬더듬 영어로 ‘빅 벤치’를 외쳐대던 주인장이 자랑하던 바로 그것이다. 젊은 부부 관광객은 아이를 목마 태워 벤치 위에 올려주고 사진을 찍는다. 거인이 잠깐 앉았다 자리를 비운 것 같은, 터무니없이 과장된 크기의 의자다.

언덕을 올라오던 다른 관광객 부부와 눈이 마주쳤다.

“올라가 볼래요? 사진 찍어줄게요.”

사양하는 내게 뭔가를 보여주고 싶어 안달이 난 표정을 짓더니 작은 수첩 하나를 꺼내 내민다. 펼쳐보니 도장이 빼곡하다. 이탈리아 각지의 거대한 벤치를 찾아다니며 모은 스탬프들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저 벤치는 캠핑장 주인의 독특한 취향이 아니었다. 농담처럼 들리는 이야기였지만 찾아보니 꽤 진지한 프로젝트다. 이른바 ‘빅 벤치 커뮤니티 프로젝트(Big Bench Community Project)’. 공식 패스포트까지 갖춘 엄연한 문화 운동이라고 한다. 현재 이탈리아 전역에 460개가 넘는 벤치가 설치되어 있고, 유럽 여러 나라로도 번지고 있다.

관광객 유인효과로 지역경제에 도움을 주는 빅벤치 프로젝트 /사진=박재희
관광객 유인효과로 지역경제에 도움을 주는 빅벤치 프로젝트 /사진=박재희
빅벤치 프로젝트 /사진=박재희
빅벤치 프로젝트 /사진=박재희

시작은 2010년. BMW 수석 디자이너 출신의 미국인 크리스 뱅글(Chris Bangle)이 은퇴 후 피에몬테의 작은 마을에 정착하면서 첫 번째 벤치를 만들었다.

아이디어는 단순했다. 벤치를 터무니없이 크게 만들면 앉는 순간 다리가 허공에 뜬다. 몸은 갑자기 작아지고, 세상은 갑자기 커 보인다. 어린 시절 이후 잊고 살았던 감각을 되찾고 싶어 시작한 일이라고 했다.

그 느낌 하나를 위해 전국 언덕에 거대한 벤치를 세우는 나라. 참 이탈리아다운 발상이다. 뭐든 특별하게, 크게, 아름답게, 그리고 약간 황당하게 만든다.

흥미로운 건 이 벤치들이 하나같이 시골에 놓인다는 점이다. 포도밭 언덕, 산등성이, 호수 전망대, 인구가 줄어드는 작은 마을들. 빅 벤치는 현대미술 설치물이면서 동시에 지방 소멸에 맞서는 관광 프로젝트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벤치를 찾아 작은 마을까지 들어가고, 가는 길에 카페에 들르고, 와인을 마시고, 작은 상점에서 기념품을 산다. 별 쓸모없어 보이는 물건 하나가 지역 경제를 돌리고 있는 셈이다.

어떤 사람들은 성당을 순례하고, 어떤 사람들은 와이너리를 순례하고, 어떤 사람들은 거대한 벤치를 순례한다. 너무나 이탈리아답지 않은가.

이탈리아 사람들은 사소한 것 하나도 그냥 두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조금 더 낭만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지를 늘 궁리하는 것 같다. 독특한 와인잔을 만들고, 특이한 전망대를 짓고, 거대한 벤치를 세운다. 벤치 하나에도 놀이를 집어넣는 나라에 살면 사람이 늙는 속도도 조금은 느려질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직접 올라가 보니 왜 사람들이 열광하는지 조금 이해가 갔다. 앉는 순간 다리가 허공에 뜬다. 그러자 갑자기 세상이 커 보인다. 밀밭은 더 넓어지고, 하늘은 더 높아진다. 아마 어린 시절 이후 처음 느껴보는 세상의 비율일 것이다. 벤치를 만드는 일이 아니라, 사람을 잠깐 어린 시절로 돌려보내는 일. 그게 이 프로젝트의 본질처럼 느껴졌다.

마테라 인근 캠핑장 /사진=박재희
마테라 인근 캠핑장 /사진=박재희

언덕을 내려오는 나에게 캠핑장 주인이 천진한 얼굴로 묻는다. “봤어요?” 최신모델 아우디 SUV를 몰고 다니고, 시가를 피우고, 흐린 날에도 선글라스를 쓰고 있는 모습은 영락없이 은퇴한 마피아 간부 같다. 그런데 사람 자체는 순박한 시골 영감님이다.

텐트 칠 곳을 묻는 우리에게 그는 “아무 데나, 네가 좋은 곳에 어디든” 하는 식으로 손을 휘휘 흔든다. 규칙보다 기분이 먼저인 사람. 심지어 가격도 이번 여행에서 가장 싸다. 30유로. 풍경은 최고였고, 주인은 친절했고, 공짜 에스프레소까지 얻어마셨다.

빅벤치프로젝트 여권 /사진=박재희
빅벤치프로젝트 여권 /사진=박재희

우여곡절이 많았던 5월이 끝나가고 있다. 이탈리아에서 남은 시간은 이제 일주일 남짓. 이상하게도 여행 막바지에는 마음이 조금 조급해진다. 끝이 보이기 시작하면 풍경조차 약간 슬퍼지는 것이다.

해가 지고 나서도 밀밭 언덕 위의 벤치는 어둠 속에서 여전히 크다. 거인이 쓰다 버린 가구처럼, 혹은 언덕 한가운데 누군가 두고 간 장난감처럼. 벤치 위로 바람이 바쁘게 지나간다. 거대한 벤치 위에서 발이 허공에 떴던 그 순간을 밀어내듯, 5월이 그렇게 지나가고 있다.

여성경제신문 박재희 작가
jaeheecall@gmail.com

박재희 작가

이화여대 정치외교학 전공 후 국제경영 MBA를 취득했다. 현대그룹과 DELL, EMC 등 글로벌 IT 기업 마케터로 일하고 미국 벤처 Actifio 아시아태평양 지역 마케팅 총괄대표를 지냈다. 커리어의 정점에서 '인생 리셋'을 선언하고 두 차례 산티아고 순례 후 현재는 여행작가이자 자기계발 리더십 코치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 <산티아고 40일간의 위로> , <산티아고 어게인> , <숲에서 다시 시작하다> , <그 여자, 정치적이다> 등이 있으며 현재 모모인 컴퍼니 대표를 맡고 있다. 

*여성경제신문 기사는 기자 혹은 외부 필자가 작성 후 AI를 이용해 교정교열하고 문장을 다듬었음을 밝힙니다. 기사에 포함된 이미지 중 AI로 생성한 이미지는 사진 캡션에 밝혀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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