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여름으로 넘어가는 5월, 서해 바닷바람은 숲의 공기를 먼저 바꾼다. 충남 태안군 소원면 해안가에는 국내 첫 등록 사립수목원인 천리포수목원이 있다. 약 18만 평 부지에 조성된 이곳은 바다와 숲이 맞닿은 수목원이다. 솔숲 사이로 바람이 지나가고, 계절마다 다른 식물이 해안 풍경을 채운다.
천리포수목원에는 현재 1만 6000여 분류군의 식물이 자란다. 숫자만 봐도 규모가 크지만, 이곳을 더 특별하게 만드는 건 오랜 시간이다. 미국 출신 귀화 한국인 민병갈 원장은 태안 바닷가 땅에 나무를 심고 세계 여러 지역의 식물을 들여왔다. 한 사람의 집념으로 시작된 수목원은 60년 넘는 세월을 지나 국내 식물 보전의 중요한 공간이 됐다.
2026년 5월에는 천리포수목원과 관련한 반가운 소식도 전해졌다. 영국 우스터셔에서 열린 RHS 말번 스프링 페스티벌 2026에서 천리포수목원을 모티프로 한 한국 쇼가든이 은메달과 최고 시공상을 함께 받았다. 작품명은 ‘Blessings from the Sea’다. 우리말로 옮기면 ‘바다가 우리에게 주는 것들’이다.
서해 모래땅 위에서 시작된 60년의 기록
천리포수목원은 1921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에서 태어난 칼 페리스 밀러, 한국 이름 민병갈의 선택에서 출발했다. 1945년 처음 한국에 온 민병갈은 태안 천리포 해안 풍경에 깊이 이끌렸고, 1962년 이 일대 땅을 직접 사들여 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1979년에는 한국 국적을 얻었으며, 세상을 떠날 때까지 식물을 모으고 지키는 일에 삶을 쏟았다.
천리포 해안가는 식물을 키우기에 쉬운 땅이 아니었다. 바닷바람이 거세고 염분이 높았으며, 모래가 많은 흙은 물과 양분을 오래 붙잡기 어려웠다. 다만 이런 조건은 해안 식물이 어떤 방식으로 뿌리내리고 살아가는지 살피는 데 알맞았다. 천리포수목원은 국내외 식물원과 꾸준히 교류하며 희귀 식물을 들여왔고, 오랜 관리 끝에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
토지매입증서와 식물 채집 기록, 번식·관리 일지, 해외 교류 서신도 남아 있다. 남겨진 자료들은 천리포수목원이 여행지에 그치지 않고, 한 사람의 삶과 식물 보전의 시간이 함께 쌓인 장소라는 점을 보여준다.
목련 800종, 호랑가시나무, 동백까지 모아둔 식물의 보고
천리포수목원이 세계 식물 연구 네트워크에서 이름을 얻은 데는 식물 수집의 깊이가 크다. 그 중심에는 목련이 있다. 천리포수목원이 보유한 목련 분류군은 800여 종이 넘는다. 세계적으로도 드문 수준이다. 목련은 품종마다 꽃 색과 모양이 크게 다르고, 꽃이 지기 전부터 다음 해 꽃눈을 준비한다. 이른 봄 꽃망울을 터뜨린 뒤 만개와 낙화까지 이어지는 시간이 짧아, 제대로 보려면 방문 시기를 잘 맞춰야 한다.
목련 외에도 호랑가시나무, 동백, 단풍, 무궁화가 천리포수목원의 주요 식물군을 이룬다. 호랑가시나무는 끝이 뾰족한 잎과 겨울 빨간 열매가 선명해 상록 수목원 분위기를 살린다. 동백은 꽃송이가 통째로 떨어져 낙화철 풍경이 짙고, 단풍은 가을 수목원을 찾게 만드는 식물이다. 천리포수목원 전체에는 1만 6000여 분류군의 식물이 자라며, 관람객에게 열리는 구역은 약 2만 평의 밀러가든이다.
계절마다 다른 풍경이 펼쳐지는 밀러가든 산책로
천리포수목원 개방 구역인 밀러가든은 수십 년 동안 나무가 자라며 깊은 숲길을 이뤘다. 봄에는 목련과 동백이 차례로 피어 방문객이 가장 많이 몰리고, 5~6월에는 짙어진 잎이 해안 산책로를 덮으며 초여름 풍경을 만든다. 수국이 피는 때에는 물기를 머금은 꽃송이가 정원 곳곳을 채우고, 가을에는 단풍이 물들어 계절이 바뀌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
겨울에는 상록수가 남아 바다와 어우러진 차분한 풍경을 보여준다.
서해 해안과 맞닿아 있다는 점도 천리포수목원만의 특징이다. 산책로를 따라 걷다 보면 바다 쪽으로 시야가 트이는 지점이 나오고, 숲길을 걷는 감상과 바다를 보는 즐거움이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밀러가든은 천천히 걸어야 놓치는 곳이 줄어든다. 전체를 둘러보려면 1시간 30분에서 2시간 정도 잡는 편이 좋다.
영국 대회 수상이 태안 전체에 퍼진 파급
RHS 말번 스프링 페스티벌은 영국왕립원예협회가 주관하는 정원 경연 행사다. 해마다 영국과 유럽 각지의 정원 디자이너들이 쇼가든을 만들고 심사를 받는다. 한국 팀이 이 행사에서 두 개의 상을 받은 것은 설계 아이디어와 시공 기술을 함께 인정받았다는 뜻이다.
이번 출품작은 태안 반도의 해안 풍경과 독살이라는 옛 어로 방식에서 소재를 가져왔다. 그래서 수상 소식은 천리포수목원뿐 아니라 태안이라는 지역 이름을 함께 알리는 계기가 됐다. 바다, 해안 식물, 정원 문화가 하나로 묶이면서 태안이 가진 관광 자원도 다시 눈에 들어온다.
태안은 세계튤립꽃박람회처럼 꽃과 정원을 주제로 한 행사가 꾸준히 열리는 지역이다. 여기에 천리포수목원을 모티프로 한 쇼가든의 국제 수상까지 더해지면서, 태안은 바다 여행지이자 정원 여행지로 더 넓게 알려질 가능성이 커졌다.
방문 전 챙겨야 할 정보
천리포수목원은 입장료와 운영 시간이 계절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방문 전에는 공식 홈페이지에서 운영 시간과 휴무일, 입장 마감 시간을 확인하는 편이 안전하다. 야외 수목원이라 비나 강풍 같은 날씨에 따라 관람 여건도 달라진다.
교통은 자가용 이용이 가장 편하다. 수도권에서 출발하면 서해안고속도로를 타고 서산 나들목으로 나온 뒤 태안 방면으로 이동하는 길이 많이 쓰인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경우 태안공용버스터미널에서 소원면 방향 버스를 타거나 택시로 들어가면 된다. 다만 배차 간격이 길 수 있어 시간표를 미리 확인해야 이동이 수월하다.
방문 시기는 계절마다 다르다. 목련과 동백을 보려면 3~4월이 잘 맞고, 5~6월에는 짙어진 잎과 해안 산책로가 어우러진 초여름 풍경을 만날 수 있다. 가을에는 단풍이 더해져 봄과는 다른 분위기가 난다. 천리포수목원 주변에는 태안해변길과 안면도 해수욕장 등 바다 여행지도 이어져 있어 당일치기보다 1박 2일 일정으로 묶으면 더 여유롭게 둘러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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