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매거진=정혜원 작가] 올해 내내 밀려드는 일감에 시달리다가 아무런 일감도 없는 5월을 맞았다. 금세 들어올 줄 알았던 일감은 2주 가까이 감감무소식이다. 마음이 지옥이다. 사실 휴식 사흘째부터 일없이 쉬는 불안감에 온통 휩싸여 있었다. 이대로 공백 기간이 길어지면 어쩌지? 프리랜서에게 일의 공백은 곧 무수입을 의미한다. 예전과 달리 독립을 해서 다달이 들어가는 고정비가 훌쩍 높아졌기 때문에 지금 나는 불안을 넘어 거의 공포에 질려 있다.
그나마 항불안제를 복용하던 시기에는 불안이 완만한 속도로 부드럽게 사르르 밀려왔던 것 같은데, 지금은 흰 화선지에 잘못 떨군 검은 먹물처럼 금세 선명하게 확 번지고 만다. 정말 힘들게 끊은 약이기에 아직은 다시 복용할 마음이 없지만, 가끔은 약이 주는 위안이 너무도 간절해진다.
얼마 전 드라마를 보다가 혼자 경악했다. 여주인공이 약이 가득 든 약통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 바닥에 떨어뜨린다. 남주인공은 약을 전부 버리고 별사탕을 가득 담아 약통을 돌려준다. 그리고 약 대신 자기가 옆에 있어 주겠다는 식으로 말한다. 여주는 남주의 말과 행동에 감동한 기색이었지만, 나는 홀로 패닉에 빠졌다. 그 약은 항불안제였다. 힘들 때 먹을 약이 없다고 생각하니 괜히 내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건네준 별사탕으로 정말 그렇게 쉽게 불안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일까? 내겐 지금 그런 사람이 없어서 장담할 순 없지만, 누군가 나 몰래 약을 다 버려 버리면 나는 굉장히 난처할 것 같다.
요 며칠 불안에 시달리면서 내내 그림을 그렸다.
‘이깟 그림은 뭐 하러 그리나. 나를 먹여 살려 주지도 않는데, 봐 주는 사람도 없는데.’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계속 그렸다. 불안한 와중에도 어떤 분위기의 그림으로 완성할지 구상했다. 어디에 어떤 선을 긋고, 어떤 색을 채워야 지난번 그림보다 더 나아질지 궁리했다. 그림 생각에 정신이 팔린 채 하루를 보내는 일은 제법 괜찮은 항불안제다. 꽤 훌륭한 현실 도피처다. 내가 그리는 그림이 정말 이세계로 통하는 문이 되어 나를 다른 세계로 데려다주면 좋을 텐데.
그림을 그리는 도중에도 몇 번씩 발작적으로 불안이 밀려든다. 가슴이 턱 막히고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다. 그럴 땐 잠시 손을 멈추고 심호흡을 한다. 그 틈에 애플 펜슬을 아이패드 본체에 부착해 펜슬의 배터리를 충전한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수십 번 되뇐다.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문득 불안에도 패턴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불안이 찾아오는 시간대가 대체로 일정하다.
첫 번째 불안은 주로 오전 8시에서 11시 사이, 잠에서 깨어 몸을 씻고 아침밥을 챙겨 먹은 직후 찾아온다. 몸은 하루를 시작할 준비를 모두 마쳤는데 돈이 될 만한 일이 하나도 없고 어디에도 갈 곳이 없다는 사실에 본능적으로 몸이 떨려 온다.
두 번째 불안이 찾아오는 때는 오후 2시에서 5시 사이. 아직 하루가 많이 남았는데 딱히 할 일이 없다는 자각과 함께 밀려온다. 불안을 꾹꾹 내리누르며 그림을 그리지만, 유난히 내 그림이 구리게 느껴질 때는 속절없이 불안에 무릎을 꿇고 싶어질 때도 있다. 그럴 때마다 구린 그림을 조금이라도 수습하겠다는 마음으로 버틴다.
저녁때가 가까워질수록 허기와 함께 불안이 더 짙어지는 경향이 있으니 달달한 간식을 챙겨 먹는다. 요새는 제로 슈가 핫초코를 찬 우유에 타서 먹고 있다. 잘 녹지 않아서 열심히 저어야 하지만 마시고 나면 영혼의 허기까지 달래지는 기분이 든다.
하루를 무사히 살아 냈다는 안도감 때문일까? 날이 어두워질수록 불안은 잦아든다. 한낮의 햇볕에 그림자처럼 짙푸르게 넘실대던 불안은 사방에 깔리는 어둠에 자연스럽게 밀려난다. 그러면 나도 늦은 밤까지 한결 편한 마음으로 그림을 이어 그릴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이번 달에는 본의 아니게 유난히 많은 그림을 그렸다. 오늘 남은 시간도 불안과 슬기롭게 공존하며 어제 그리다가 만 그림을 이어 그릴 예정이다. 내일은 오늘보다 덜 불안하고 더 평안하기를, 이왕이면 나를 먹여 살릴 새 일감이 들어오기를 조심스럽게 바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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