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어코리아=유지훈 기자] 한일 정상외교의 무대가 수도를 벗어나 지역으로 넓어지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과 다카이치 일본 총리는 지난 19일 경북 안동에서 정상회담을 열고 한일 관계 발전과 경제·안보 협력, 민간 교류 확대 방안을 논의했다. 지난 1월 일본 나라현 회담 이후 약 4개월 만에 다시 마주 앉은 자리다.
이번 회담이 주목받은 이유는 의제만이 아니다. 나라현은 다카이치 총리의 고향이고, 안동은 이 대통령이 나고 자란 지역이다. 양국 정상이 서로의 고향을 오가며 회담을 이어간 셈이다. 기존의 수도 중심 정상외교를 넘어, 지역의 역사와 문화가 외교의 언어로 활용됐다는 점에서 ‘새로운 한일 셔틀외교’의 상징적 장면으로 평가된다.
이 대통령은 SNS에 공개한 회담 인사말에서 “다카이치 총리의 고향인 나라에서 만난 지 불과 네 달 만에 제가 나고 자란 안동에서 다시 총리님을 맞이하게 됐다”고 밝혔다. 이어 “양국 정상이 서로의 고향을 오가며 신뢰와 우정을 쌓아가는 것은 오늘날 한일 관계의 새로운 변화를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회담에서는 지난 정상회담에서 논의된 협력 과제의 이행 상황을 점검하고, 경제·안보·문화 분야의 협력 확대 방안이 폭넓게 다뤄졌다. 특히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문제와 관련해 일본 조세이 탄광에서 발굴된 유해의 DNA 감정 절차가 곧 시작된다는 점이 언급됐다.
이 대통령은 이에 대해 “오랜 시간 아픔으로 남아 있던 문제를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함께 풀어가고 있다는 점이 매우 고무적”이라고 평가했다.
국민 안전을 위한 실질 협력도 주요 의제에 올랐다. 양국은 경찰청 간 ‘초국가 스캠범죄 공동 대응을 위한 협력각서(MOU)’를 체결하고, 국제화·지능화되는 범죄에 공동 대응하기로 했다. 보이스피싱과 온라인 금융사기 등 국경을 넘나드는 범죄가 늘어나는 상황에서, 두 나라는 수사 공조와 정보 공유를 강화해 국민 피해를 줄여나간다는 방침이다.
국제 정세와 에너지 안보 역시 회담의 핵심 축이었다. 양국 정상은 중동 지역의 평화와 안정 회복이 중요하다는 데 공감하고, 호르무즈 해협 통항 문제를 포함한 국제 공급망 위기에 함께 대응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한국과 일본 모두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높은 만큼 원유 및 석유제품 스왑, LNG 수급 협력 등 보다 구체적인 협력 방안도 추진하기로 했다.
한반도와 동북아 정세에 대한 논의도 이어졌다. 양 정상은 한일 협력과 한미일 협력을 지속적으로 강화하는 한편, 한중일 3국 협력 역시 민간 교류를 중심으로 활성화할 필요가 있다는 데 공감했다. 안보 현안을 넘어 경제, 문화, 인적 교류까지 협력의 외연을 넓혀가겠다는 구상이다.
정상회담 이후 이어진 만찬은 안동의 전통과 한일 우호의 메시지를 함께 담아낸 무대였다. 만찬 메뉴에는 안동 지역 종가의 고조리서인 ‘수운잡방’에 기록된 음식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퓨전 한식이 올랐다.
안동찜닭의 원형으로 알려진 닭요리 ‘전계아’와 안동 한우 갈비구이에는 “군자는 벗을 맞이하는 데 정성을 다한다”는 안동 선비정신이 담겼다는 설명이 더해졌다.
만찬주도 상징성을 살렸다. 안동 전통주인 태사주와 안동소주는 다카이치 총리의 고향인 일본 나라현의 사케와 함께 제공됐다. 서로의 지역 술이 한 테이블에 오른 장면은 이번 회담의 주제인 ‘고향을 오가는 셔틀외교’를 압축적으로 보여줬다. 이 대통령은 다카이치 총리에게 안동 하회탈 목조각 액자 등을 선물하며 양국 우호 관계 발전의 뜻을 전했다.
만찬 뒤 두 정상은 안동 하회마을 나루터로 이동해 전통문화 행사인 ‘선유줄불놀이’를 함께 관람했다.
낙동강 밤하늘을 수놓은 불꽃과 함께 창작 판소리 공연 ‘흩어지는 불꽃처럼’이 이어지며 양국의 우정과 미래 협력을 기원하는 시간이 마련됐다. 정치·외교의 언어가 회담장에서 논의됐다면, 밤하늘의 불꽃과 전통 공연은 문화로 전하는 외교 메시지였다.이
이 대통령은 “셔틀외교는 이제 양국 수도를 넘어 지방 도시로까지 지평을 넓히고 있다”며 “한일 협력의 온기가 전국 곳곳으로 확산되고 국민이 체감할 수 있는 미래지향적 협력으로 이어지길 기대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셔틀외교가 거듭될수록 양국 관계는 더욱 굳건한 신뢰 위에서 발전해 나갈 것”이라며 “새로운 한일 관계 60년의 첫해에 안동을 찾아준 다카이치 총리에게 깊이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이번 안동 회담은 단순한 정상 간 만남을 넘어, 한일 관계가 어떤 방식으로 국민에게 다가갈 수 있는지를 보여준 장면이었다.
과거사의 상처를 인도주의 협력으로 다루고, 초국가 범죄와 에너지 위기에는 실질 공조로 대응하며, 지역의 문화와 전통을 외교의 무대로 끌어올린 것이다. 나라에서 안동으로 이어진 셔틀외교는 이제 한일 관계의 다음 무대가 수도가 아니라 지역, 그리고 국민의 일상 속으로 확장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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