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은 생각 안 한다"는 말 뒤에 도사린 불안감…현실 걱정은 애써 외면
"미국 쳐들어오면 조국 지킬 것"…"미국이든 러시아든 원조 왔으면"
전력난에 계층 갈등도…부자는 개인용 발전기, 서민들은 달빛에 의지
(아바나=연합뉴스) 송광호 특파원 = "내일은 생각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오늘 하루에 충실하면 그걸로 그만인 것 같아요."
13일(현지시간) 쿠바 아바나의 구시가지에서 만난 대학생 알레한드로 마르티네스의 말이다.
쿠바 정부에 대한 미국 도널드 트럼프 정부의 압박 수위가 높아질수록, 쿠바 젊은이들의 불안감은 커지는 듯했다. 그래도 표면적으로 이들의 일상은 평온했다.
공부하고, 춤을 추러 다니고, 친구들도 만난다. 그러나 평범한 일상 뒤에는 긴장과 불안감이 도사리고 있었다.
직장인 라우라 로페스도 "미국이 쳐들어올 거라고는 생각하진 않는다. 그럴지도 모르지만 거기까지 생각하진 않는다. 그저 하루하루를 충실하게 살면 된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불안한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여기 쿠바에서 살려면 뭐랄까, 미래를 너무 많이 생각하면 안 돼요. 걱정거리가 많아서 못삽니다. 현재를 살아야 해요."
솔 벨로의 유명한 소설 제목처럼 '오늘을 잡아라'(Seize the day)가 쿠바 청춘의 모토다. 벨로는 현재를 즐기라는 뜻의 라틴어 격언 '카르페 디엠'(Carpe Diem)의 영어 표현을 소설 제목으로 썼다.
공대생이어서 사회 대체 복무 요원으로 1년간 군 복무를 했다고 밝힌 알레한드로는 "깊이 생각하려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언젠가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좀 더 강경하게 발언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만약 미국이 침공한다면 설령 죽는 한이 있어도 끝까지 싸우겠다는 것이다. 다니엘 곤살레스는 "조국이 부른다면 전선에 나가 싸우겠다. 어떤 어려운 일이 있어도 조국을 반드시 지킬 것이다. 외면하지도, 회피하지도 않겠다"고 강조했다.
대부분의 쿠바인은 인터뷰에서 익명을 요구했다. 혹시나 기사에 이름이 나간다면,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 그런 듯했다. 잘못 인터뷰했다가 가문이 풍비박산 났다는 미확인 소문이 나돌기도 한다. 쿠바는 공식적으로 '정치범'이 없지만, 다른 죄목으로 잡아가는 경우가 비일비재한 것으로 미 당국은 의심하고 있다.
이 때문인지 방중 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쿠바와 대화하겠다'며 유화 메시지를 던지고, 미 국무부가 '현물이든, 현찰이든, 가톨릭교회를 통해 인도적 지원을 하겠다'고 손짓한 데 대한 현지인들의 공식 답변은 "잘 모르겠다"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은근히 기대하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원조의 위력을 지난달 절감했기 때문이다.
러시아산 원유 73만 배럴이 쿠바에 도착하고 나서 쿠바인들은 오랜만에 정전을 거의 경험하지 않았다. 4월 둘째 주부터 마지막 주까지, 냉장고와 전등은 '멀쩡하게' 돌아갔다. 하지만 5월1일 노동절이 끝나고 러시아 원유 재고가 바닥나면서 쿠바인들은 다시 궁핍한 생활로 되돌아가고 있다.
쿠바 정부는 14일 현재 1천991MW의 전력이 부족하다고 밝혔다. 쿠바 전체에서 하루 필요한 전력량이 약 3천200MW 규모인데, 실제 공급되는 전력은 40%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얘기다. 공식적인 통계는 그렇지만, 시민들이 느끼는 '체감 전력량'은 더 안 좋을 수도 있다.
실제 지난 13일 밤 9시 무렵, 아바나시 주요 지역조차 대부분 불이 꺼져 있었다. 가로등에 불이 들어온 곳이 거의 없어, 운전하기에 위험해 보였다. 도로 곳곳이 패었기 때문이다.
"저녁에 1~2시간 정도만 전기가 들어오는 것 같다. 여름을 어떻게 버텨야 할지 벌써 걱정된다. 아이가 방학하면 더위를 피해 한국으로 가야 할 것 같다.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정호현 쿠바 한글학교 교장의 말이다. 설상가상으로 버티기 힘든 무더위가 찾아오고 있었다. 실제 이날 날씨는 5월 중순임에도 8월 서울의 찜통더위를 능가했다. 햇살은 강렬했고, 해풍을 머금은 축축한 바람은 끈적였다.
이런 상황에서 에어컨은커녕 선풍기마저 돌리기 어려운 쿠바인들의 마음을 가늠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아무리 버티는 데 이골이 난 쿠바인이라 해도 이런 생활이 이어진다면 임계점을 넘을 공산이 있었다. 현지 일각에선 '미국보다 시민들이 먼저 들고일어날 것'이란 관측마저 제기되고 있었다.
한 교민은 "우리나라 같으면 혁명이 일어나도 벌써 났을 것"이라며 "쿠바인들이 인내하고, 견디는 힘은 세계 최강인 것 같다"면서 혀를 내둘렀다.
정전은 비단 시민들의 불편함만을 초래하진 않았다. 계층 불만도 조장했다. 이날 밤 아바나는 대체로 깜깜했으나 몇몇 집과 유명한 술집, 아이스크림 가게는 휘영청 밝은 빛을 뿜어냈다. 쿠바에서 전력은 부와 가난을 동시에 상징한다. 부자들은 자체 발전기를 돌리면서 밝은 빛 속에서 저녁에도 거리낌 없이 생활할 수 있다. 밤늦게까지 넷플릭스와 광고 없는 유튜브도 볼 수 있다.
반면, 밤에 넘어지지 않으려면 달빛에 의지해 집안에서조차 조심스레 움직여야 하는 서민들에게 쉼 없이 전기가 들어오는 밤 생활은 꿈같은 얘기다. 옆집에 부자라도 살고 있다면 부러움을 속으로 삭이면서 발전기의 굉음까지 견뎌야 한다. 이중고다. 한 교민은 "더위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웃의 발전기 소리 때문에 시끄러워서 잠들 수가 없다"고 했다.
평등을 지향하는 공산주의 국가인 쿠바는 통제 사회로 평가되지만, 자본의 힘은 그 통제의 고삐를 풀고 어느덧 일반 시민들의 삶 속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모두가 평등해야 한다는 이상론적 공산주의가 미국의 봉쇄에 따른 불균등한 전력 상황 탓에 위협을 받는 듯했다.
buff27@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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