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하이닉스가 올해 그야말로 대박을 터뜨렸다. 인공지능(AI) 열풍이 전 세계를 휩쓸면서 AI 가속기의 핵심 부품인 고대역폭메모리(HBM)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었고, 이 시장에서 독보적인 기술 우위를 확보한 SK하이닉스가 그 수혜를 고스란히 가져갔다. 글로벌 AI 반도체 시장의 절대 강자인 엔비디아(NVIDIA)의 핵심 HBM 공급사로 자리를 굳히며, 과거 삼성전자를 쫓던 2인자 이미지를 완전히 지워버렸다.
최태원 SK그룹 회장. / 뉴스1
이 흐름의 중심에는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있다. 2011년 당시 시장의 우려와 회의론을 뚫고 하이닉스반도체 인수를 직접 진두지휘한 인물이다. 그 결단이 10여 년이 지난 지금, AI 시대의 핵심 자산으로 돌아오면서 최 회장의 경영 철학과 판단력이 다시 한번 주목받고 있다.
그런 그가 2021년 말 정기 임원인사를 앞두고 자신의 SNS에 조용히 올렸던 글 하나가 최근 다시 회자되고 있다. 제목은 '다섯 가지 마라'. 최 회장은 이 글 아래에 "20년 전 썼던 글"이라는 해시태그와 함께 "나와 제 아이들에게 늘 하는 이야기들"이라는 한 줄을 덧붙였다. 화려한 경영 성과의 이면에서 그가 수십 년간 스스로에게 되새겨온 다섯 가지 원칙이었다.
명언 하나―사람이 마음에 안 든다고 헐뜯지 마라
최 회장은 이 첫 번째 격언에 대해 직접 이렇게 풀었다. "특히 고향이나 직업, 출신을 가지고 너보다 미천한 영혼의 소유자처럼 여기는 것은 크나큰 착각이다."
상대를 출신이나 배경으로 재단하는 것은 단순한 편견이 아니라, 스스로의 판단력을 흐리는 행위라는 의미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귀인 오류'라고 부른다. 사람의 행동을 볼 때 상황보다 그 사람의 성격이나 속성 탓으로 돌리는 인지적 편향이다. 헐뜯는 행위는 상대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판단 오류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훨씬 많다. 조직 안에서 타인을 깎아내리는 것은 단기적으로는 자신을 돋보이게 하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실제로는 신뢰를 잃는 가장 빠른 방법 중 하나다.
최태원 회장. / 뉴스1
명언 둘 ― 감정의 기복을 보이지 마라
최 회장의 설명은 이렇다. "너의 감정을 신주단지처럼 귀하게 모시지 말라. 조금 기다리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들 때문에 사람의 기분을 망치지 말고, 그 시간에 조용히 운동을 해라."
감정 조절 능력은 리더십 연구에서 핵심 변수로 꼽힌다. 하버드 경영대학원 연구에 따르면, 감정 지능(EQ)이 높은 리더 아래서 일하는 팀원들의 업무 몰입도와 성과가 통계적으로 유의미하게 높았다. 감정 기복이 심한 리더는 팀 내 심리적 안전감을 낮추고, 구성원들이 의견을 내기보다 눈치를 보게 만든다. 최 회장이 "운동을 해라"고 구체적으로 명시한 것도 흥미롭다. 격렬한 감정 반응을 신체 활동으로 전환하는 방식은 인지행동치료에서도 권장하는 실천 전략이다.
명언 셋 ―일하시는 분들 함부로 대하지 마라
최 회장은 이 격언을 이렇게 설명했다. "네가 해야 할 일들을 대신해주시고, 너의 시간을 아껴주시는 분들"이라며 "일이 완벽하게 돼 있지 않다고 하늘 무너지지 않는다. 소리 지르거나 인격 모독적인 말은 절대 삼가라."
이른바 '갑질'이 사회 문제로 부상한 이후 많은 기업이 내부 규정을 강화했지만, 총수가 직접 SNS에 "소리 지르거나 인격 모독적인 말은 절대 삼가라"고 명시한 사례는 흔치 않다. 행동경제학자 댄 애리얼리의 연구는 직장 내 무례함이 단 한 차례만 발생해도 피해자의 인지 능력이 최대 61% 감소하는 것으로 측정됐다는 결과를 제시한 바 있다. 무례한 지시 한 마디가 팀 전체의 생산성을 끌어내린다는 의미다. 서비스직, 현장직 종사자를 함부로 대하는 태도는 그 자리의 결과물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SK그룹 최태원 회장. / 뉴스1
명언 넷―가면 쓰지 마라
최 회장은 이에 대해 "인생은 연극무대가 아니다"라며 이렇게 말했다. "가짜로 연기하면 멀리 있는 관객들이 팬이 될지 몰라도 옆에 있는 가까운 이들은 떠나갈 뿐이다. 네 모습 있는 그대로 행동하되, 진짜로 더 나은 사람이 돼보려고 노력하는 게 낫다."
진정성의 문제는 현대 심리학과 조직학에서 가장 활발하게 연구되는 주제 중 하나다. 사람은 타인의 진정성 여부를 본능적으로 감지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장기적인 관계에서 가면은 반드시 벗겨진다. 최 회장의 표현처럼 "멀리 있는 관객"은 이미지로 관리할 수 있지만, "옆에 있는 가까운 이들"은 그 사람의 실제 모습을 매일 목격한다. 조직 안에서 위로 갈수록 진정성이 중요해지는 이유는, 리더의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으면 그 조직 전체의 신뢰 구조가 흔들리기 때문이다.
명언 다섯 ―일희일비하지 마라
마지막 격언에서 최 회장은 이렇게 썼다. "억울한 일이 있더라도 모든 것을 1대1로 반박해서 이기려 하지 마라. 너 자신과의 싸움만이 진짜 이겨야 하는 유일한 싸움이다. 시간은 자기와 싸우는 사람들의 편이다."
외부의 평가나 결과에 일일이 반응하지 말고, 내부의 기준을 유지하라는 뜻이다. 스토아 철학에서는 이를 '통제의 이분법'으로 설명한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명확히 구분하고, 통제할 수 없는 것에 감정을 소모하지 않는 것이 핵심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남긴 '명상록'에도 같은 맥락의 문장이 반복된다. 사업과 투자의 세계에서 단기 등락에 흔들리지 않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또 얼마나 결정적인지는 워런 버핏의 투자 철학에서도 반복적으로 확인된다.
생각에 잠긴 최태원 회장. / 뉴스1
이 격언들이 탄생한 배경, 최태원과 SK의 승부수
이 다섯 가지 격언은 단순한 처세술이 아니다. 최 회장이 직접 밝혔듯 20년 전부터 자신과 자녀에게 건네온 말이다. 그가 이 글을 처음 쓴 시기는 SK그룹이 굵직한 인수합병(M&A)으로 그룹의 뼈대를 다지던 시절과 겹친다.
SK그룹의 M&A 역사는 선대인 최종현 회장 때부터 시작됐다. 1980년 대한석유공사를 인수해 SK이노베이션의 전신을 만들었고, 1994년에는 한국이동통신을 인수해 SK텔레콤의 기틀을 마련했다. 최종현 회장은 사우디아라비아와의 돈독한 외교적 관계를 바탕으로 1973년 1차 석유파동 당시 한국이 수입하는 원유의 전량 공급을 이끌어냈고, 1978년 2차 파동 때는 직접 사우디를 찾아가 원유 공급 약속을 받아냈다. 이 협상력이 대한석유공사 인수로 이어진 것이다.
최종현 회장이 인수한 한국이동통신은 1996년 세계 최초로 코드분할다중접속(CDMA) 이동전화 상용 서비스에 성공했다. CDMA는 같은 주파수를 다수의 이용자가 동시에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기술로, 이후 휴대전화의 대량 보급을 가능하게 한 핵심 기반 기술이다. 이 결단은 올해 CDMA 상용화 30주년으로 이어졌다.
최태원의 가장 큰 승부수, SK하이닉스 인수
최태원 회장이 직접 진두지휘한 가장 굵직한 M&A는 하이닉스반도체 인수다. 2011년 11월 SK텔레콤이 하이닉스 지분 인수 계약을 체결하고 이듬해 최대주주로 올라섰다. 최 회장이 대표이사로 취임하며 SK하이닉스라는 이름으로 그룹에 공식 편입됐다.
경기 이천 SK하이닉스 본사 모습. / 뉴스1
당시 하이닉스는 부채비율이 높고 수익성도 불안정한 상태였다. 시장에서는 반도체 업황의 사이클성과 대규모 자본 투자 부담을 이유로 인수에 회의적인 시각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최 회장은 인수를 강행했고, 이후 약 3년 만에 현재 반도체 산업의 흐름을 바꿀 고대역폭메모리(HBM) 양산에 착수했다.
HBM은 여러 개의 D램 칩을 수직으로 쌓아 연결한 뒤 데이터 전송 속도를 획기적으로 높인 메모리 반도체다. 인공지능(AI) 학습에 쓰이는 GPU는 방대한 데이터를 빠르게 처리해야 하는데, HBM이 바로 그 속도를 받쳐주는 핵심 부품이다. SK하이닉스는 2016년 HBM2를 개발하고, 2021년에는 세계 최초로 HBM3를 개발했다. 2024년 9월에는 세계 최초로 HBM4 개발에 성공하며 이 시장에서의 선두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글로벌 AI 반도체 시장의 절대 강자인 엔비디아(NVIDIA)가 SK하이닉스를 핵심 HBM 공급사로 채택하면서, 과거 삼성전자를 추격하던 2인자 이미지는 완전히 바뀌었다. AI 메모리 분야만큼은 SK하이닉스가 시장 흐름을 선도하는 구도가 됐다.
리밸런싱 마친 SK, 올해부터 다시 M&A 시동
최근 3년간 SK그룹은 대형 M&A보다 계열사 수를 줄이고 재무 건전성을 높이는 데 집중했다. 2024년에는 SK이노베이션과 SK E&S를 합병해 SK온의 재무구조를 개선하고 지원 능력을 강화했다. 이 합병은 전기차 배터리 자회사인 SK온의 누적 적자 문제를 그룹 차원에서 흡수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다.
올해는 리밸런싱을 마무리하고 다시 투자 확장 모드로 전환한다는 계획이다. 방향은 철저히 AI다. SK하이닉스는 미국 내 AI 솔루션 법인 설립을 추진하고 있으며, SK하이닉스의 모회사인 SK스퀘어도 유망 AI 기업에 대한 선제 투자를 올해 핵심 전략으로 내세웠다.
최 회장이 20년 전 자신에게, 자녀들에게 남긴 다섯 가지 격언은 결국 한 가지 공통된 방향을 가리킨다. 외부보다 내부, 타인보다 자신, 단기 반응보다 장기 일관성이다. 이 원칙이 SK그룹의 수십 년에 걸친 M&A 역사와 맞닿아 있다는 점은 단순한 우연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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