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컬처 이상완 기자] 충남 공주의 전통주 계룡백일주는 이름 안에 시간과 지역, 가문의 역사를 품은 술이다. ‘계룡’은 계룡산권의 지역성을 담고, ‘백일주’는 술이 익어가는 시간을 뜻한다. 밑술을 세우고 본술을 빚어 100일 가까이 저온에서 익히는 동안 찹쌀의 감칠맛, 국화와 진달래의 꽃향, 오미자의 산미, 솔잎의 청량한 향이 술 안에 스며든다.
계룡백일주는 조선 인조 때 궁중에서 빚던 백일주 제조법이 연안이씨 가문에 전해진 술로 알려진다. 인조반정의 공신인 연평부원군 이귀에게 왕실 양조법이 하사됐고, 이귀의 부인 인동장씨가 비법을 익혀 가문 술로 전승했다는 이야기다. 이후 연안이씨 가문 며느리들을 거쳐 400여 년간 술맥이 이어졌다. 충청남도 무형유산과 대한민국 식품명인 제4호로 가치를 인정받았다.
◇궁중에서 가문으로 내려온 술
계룡백일주는 궁중술 전승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조선 인조는 반정 이후 공신 이귀의 공을 치하하며 궁중에서 빚던 백일주와 양조법을 하사한 것으로 전해진다. 왕실에서만 빚던 술이 공신 가문으로 내려가고, 연안이씨 집안의 가양주가 된 셈이다. 가문 전승의 중심에는 이귀의 부인 인동장씨가 있다. 인동장씨는 왕실 양조 비법을 전수받아 술을 빚었다. 솜씨가 뛰어나 궁중에서 하사한 술보다 맛이 좋았다는 이야기도 남아있다. 이후 계룡백일주는 연안이씨 가문 며느리들의 손을 거쳐 제사와 손님맞이 술상에 올랐다.
궁중술이 민가로 내려왔다는 사실은 계룡백일주의 격을 만든다. 술은 가문의 예법과 손님을 대하는 태도, 제례 문화와도 관련됐다. 백일 동안 정성을 들여 빚은 술은 제사상에 올랐다. 귀한 손님을 맞을 때 꺼내는 술이 됐다. 계룡백일주가 오랫동안 대중적인 술보다 가문의 귀한 술로 남았던 배경이다. 1989년 충청남도 무형문화재 제7호 지정은 가문 안에 머물던 술이 지역 전통주로 이름을 알리는 전환점이었다. 기능보유자로 지복남 선생이 인정됐고, 이후 아들 이성우가 전승을 이어 식품명인으로 지정됐다. 현재 계룡백일주는 공주시 봉정동에서 빚어지며, 연안이씨 가문의 15대 술맥을 잇는 이름으로 남았다.
◇백일이라는 이름에 담긴 기다림
백일주는 말 그대로 100일에 가까운 시간이 들어가는 술이다. 계룡백일주는 밑술을 약 한 달 익히고, 본술을 다시 70일가량 발효·숙성해 완성하는 방식으로 설명된다. 밑술 30일과 본술 70일이 더해져 백일주라는 이름이 붙었다. 시간은 계룡백일주의 맛을 만드는 핵심이다. 찹쌀과 누룩으로 밑술을 세우는 동안 발효의 힘이 만들어진다. 본술 단계에서 꽃과 열매, 솔잎이 들어가 향이 차곡차곡 스며든다. 저온 장기 발효는 거친 맛을 줄인다. 찹쌀의 감칠맛과 부드러운 질감을 살린다.
백일주류는 전국 여러 지역에서 가양주로 빚어졌다. 서울, 충남, 전남 고흥, 경북 상주 등지에도 백일주 전승이 남았다. 다만 계룡백일주는 연안이씨 가문의 궁중술 전승과 공주 지역 재료, 창호지 여과 방식이 더해져 고유한 개성을 갖게 됐다. 같은 백일주라는 이름을 쓰더라도 계룡백일주는 재료와 전승 배경에서 공주 지역의 색을 드러낸다. 오래 익히는 술은 겨울철과 잘 맞는다. 낮은 온도는 발효가 급격히 치솟는 것을 막고, 향이 천천히 자리 잡도록 돕는다. 계룡백일주가 저온 장기 발효주로 설명되는 이유다.
◇진달래·오미자·국화·솔잎의 사계절 향
계룡백일주는 사계절 재료를 품은 술이다. 주재료는 찹쌀과 백미, 누룩이다. 재래종 국화꽃, 오미자, 진달래, 재래종 솔잎이 들어간다. 꽃과 열매, 잎이 한 술독 안에서 만난다. 진달래는 봄의 재료다. 활짝 핀 꽃을 따 말려 술에 넣는다. 진달래꽃은 술에 연한 꽃향과 색의 기운을 더한다. 국화는 가을의 재료다. 재래종 황국화는 서리가 내린 뒤 핀 꽃을 사용해야 한다고 전한다. 늦가을 국화 향은 백일주 안에서 은은하게 퍼진다.
오미자는 열매의 산미를 더한다. 다섯 가지 맛을 품었다는 이름처럼 오미자는 술에 산뜻한 기운을 보탠다. 솔잎은 5~6월에 채취한 것을 사용한다. 솔잎의 청량한 향은 계룡백일주의 후미를 맑게 잡아준다. 찹쌀의 부드러운 단맛에 꽃향, 열매 향, 솔향이 겹치며 계룡백일주 특유의 향미가 만들어진다. 재료마다 채취 시기가 다르다는 점도 중요하다. 진달래는 봄, 솔잎은 초여름, 국화는 가을, 오미자는 열매가 익는 때를 기다려야 한다. 해마다 재료를 준비하고 말려 보관하는 수고가 필요하다.
◇누룩에서 창호지 여과까지
계룡백일주의 제조는 누룩 만들기에서 시작한다. 공주 지역에서 나는 통밀과 물에 불려 빻은 찹쌀가루를 같은 비율로 섞는다. 이를 끓여 식힌 양조수를 사용해 반죽한다. 누룩은 보릿짚과 약쑥으로 감싸 석 달 이상 띄운다. 전통주에서 누룩은 발효의 시작이자 술맛의 뿌리다. 누룩이 제대로 뜨지 않으면 술의 향도 깊어지기 어렵다. 밑술을 담그기 전에는 술독을 짚불로 그을려 소독한다. 술독을 정화하는 전통 방식이다. 밑술은 찹쌀가루와 물로 죽을 쑤어 식힌 뒤 누룩을 섞어 만든다. 죽은 고두밥보다 부드럽게 발효 기반을 마련한다. 누룩은 발효를 이끈다. 밑술은 약 한 달 동안 익어 술의 기초가 된다.
본술 단계에서는 찹쌀 고두밥이 들어간다. 찹쌀을 쪄서 말린 고두밥에 밑술을 넣어 국화꽃과 진달래꽃, 오미자, 솔잎을 배합한다. 꽃과 열매, 솔잎은 건조해 두었다가 얇은 천에 싸서 술독에 넣는 방식이다. 재료가 직접 술 안에 풀어져 탁해지는 것을 막고, 향만 차분히 우러나도록 하기 위한 방식이다. 숙성 중 온도 관리도 중요하다. 본술은 섭씨 40도를 넘지 않게 관리하며 긴 시간 익힌다. 온도가 지나치게 오르면 발효가 거칠어지고 향이 흐려질 수 있다. 천천히 익히는 과정이 계룡백일주의 맑고 부드러운 맛을 만든다. 술이 익으면 용수를 박아 맑은 술을 떠낸다. 용수는 술독 안에 넣어 맑은 술만 고이게 하는 전통 도구다. 이렇게 얻은 술은 다시 창호지로 걸러낸다. 창호지 여과는 계룡백일주의 특징으로 꼽힌다. 창호지를 거치며 술은 맑은 빛을 얻고, 입안에서는 끈기와 부드러운 질감을 남긴다.
◇16도 약주, 40도 증류주로 나뉜 맛
계룡백일주는 16도 약주로 대표된다. 저온에서 장기간 발효·숙성해 만든 16도 백일주는 감미롭고 은은한 향, 부드러운 목 넘김이 특징이다. 찹쌀에서 오는 진한 감칠맛과 국화·진달래·오미자·솔잎 향이 겹쳐 색과 향, 맛이 모두 독특한 약주로 평가된다. 술빛은 맑고 은은한 황금빛을 띤다. 입에 머금으면 찹쌀의 둥근 맛이 먼저 느껴진다. 뒤이어 꽃향과 솔향이 올라온다. 오미자는 산뜻한 끝맛을 보태고, 국화와 진달래는 향의 폭을 넓힌다. 솔잎은 뒤끝을 가볍게 정리한다. 계룡백일주가 신선주라고 불린 배경도 이런 향미에서 찾을 수 있다.
계룡백일주는 약주만 있는 술이 아니다. 16도 백일주를 증류해 30도와 40도 제품도 만든다. 백일주 증류주는 목젖을 스치는 칼칼함과 진한 감칠맛이 특징이다. 약주의 은은한 향이 증류를 거쳐 농축되며, 더 힘 있는 술로 변한다. 40도 증류주를 12년 숙성한 제품도 있다. 12년 숙성 계룡백일주는 도수가 높지만 부드러운 목 넘김과 복합적인 향이 돋보인다. 잘 만든 진을 떠올리게 한다는 평가도 있다.
◇무형유산과 식품명인이 지켜낸 이름
계룡백일주는 1989년 충청남도 무형문화재 제7호로 지정됐다. 가문 안에서 전해지던 술이 지역 무형유산으로 인정받았다. 1994년에는 전통식품 명인 제4호로 지정됐다. 이후 계룡백일주는 한국 전통주를 대표하는 이름 중 하나로 알려졌다. 기능보유자 지복남 선생은 연안이씨 가문의 며느리로서 백일주 제조법을 전승했다. 지복남 선생 이후에는 아들 이성우 명인이 전수자로 나서 술을 빚었다. 50년 가까이 백일주 제조와 품질 개선에 매달리며 약주와 증류주의 안정적 생산에 힘썼다.
계룡백일주는 여러 차례 품질 평가와 공적을 남겼다. 1999년 전국 민속주 품평회에서 대상을 받았다. 2001년 민속주 가운데 처음으로 한국관광명품에도 지정됐다. 2005년에는 청와대 설 선물용과 남북정상회담 만찬주로 선정됐다. 2024년 대통령 선물에도 이름을 올리며 전통주의 품격을 다시 확인했다. 핵심은 전승의 지속성이다. 계룡백일주는 궁중술에서 종가술로, 다시 지역 무형유산과 식품명인의 술로 범위를 넓혔다. 전통은 시대마다 새로운 방식으로 자기 자리를 찾는다. 계룡백일주의 수상과 지정은 그런 변화를 보여준다.
◇차게 마실수록 살아나는 향
계룡백일주는 차게 마실 때 풍미가 살아나는 술이다. 낮은 온도는 단맛과 산미를 정리하고, 꽃향과 솔잎 향을 차분하게 드러낸다. 16도 약주는 식전주나 잔칫상 술로 어울리고, 30도와 40도 증류주는 천천히 음미하기 좋다. 전통 안주로는 참죽나무 순이 잘 맞는다. 참죽나무 순을 찹쌀 고추장 양념에 버무려 말리고 다시 찹쌀 풀을 입혀 말린 안주는 봄철 백일주와 어울리는 음식으로 전한다. 진달래와 황국 꽃잎을 찹쌀가루와 계피에 더해 지진 화전도 계룡백일주와 좋은 궁합을 이룬다.
가을에는 호두 곶감말이가 어울린다. 곶감의 단맛과 호두의 고소함이 계룡백일주의 은은한 향과 조화를 이룬다. 12년 숙성 증류주는 잔칫상 음식과도 두루 어울린다. 높은 도수와 숙성 향이 기름진 음식의 맛을 받쳐준다. 솔잎에서 오는 잔향이 입안을 정돈한다. 계룡백일주는 마시는 방식에서도 천천히 음미하는 술에 가깝다. 약주는 향을 맡고 조금씩 마시면 꽃향과 솔향이 잘 살아난다. 증류주는 작은 잔에 따라 온도 변화를 느끼며 마시면 숙성 향이 차례로 드러난다.
계룡백일주는 한 잔 안에 사계절 재료의 향과 공주 지역의 시간이 담긴 술이다. 백일 동안 익은 술은 향을 서두르지 않는다. 꽃과 열매, 솔잎과 찹쌀의 감칠맛이 잔 안에서 천천히 풀린다. 계룡백일주는 기다림으로 완성되는 술이다.
뉴스컬처 이상완 prizewan2@nc.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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