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마지막 질문을 던져보자. 패션은 트렌드 없이 지속할 수 있을까? 패션은 오랫동안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문화로 이해되어 왔다. 새로운 스타일이 등장하고 그것이 확산되며 다시 다른 것으로 교체되는 순환이 반복된다. 이러한 변화의 리듬은 패션을 특징짓는 핵심적인 요소였다. 최근 몇 년 사이 패션 문화에서는 이전과는 다른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 한 시대 전체를 대표하는 단일한 트렌드가 등장하고 그것이 빠르게 확산되는 방식이 이전만큼 강하게 작동하지 않는 것이다. 대신 서로 다른 취향과 스타일이 동시에 존재하는 보다 분산된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 누군가는 최신 컬렉션을 따르지만 다른 누군가는 빈티지 의류를 찾고, 또 다른 누군가는 리셀 플랫폼을 통해 과거 시즌의 제품을 구매한다. 패션은 더 이상 하나의 동일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만 움직이지 않는다.
이러한 변화에는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디지털 미디어 환경의 변화가 중요한 배경으로 작용했다. 과거 패션 트렌드는 비교적 제한된 매체와 산업 구조 속에서 형성되었다. 패션 잡지와 런웨이, 백화점과 브랜드가 유행을 제시하고 소비자는 이를 따라가는 방식이었다. 오프라인 패션쇼와 리테일 환경이 위축되면서 패션 이미지의 생산과 소비는 더욱 빠르게 디지털 공간으로 이동했다. 수많은 이미지와 스타일이 동시에 유통되면서 하나의 트렌드가 전체 소비자를 지배하기 어려워졌다. 틱톡, 인스타그램, 핀터레스트와 같은 플랫폼에서는 서로 다른 스타일이 동시에 확산되고 알고리즘은 사용자의 취향에 맞는 이미지를 끊임없이 재배치한다. 이러한 환경에서는 하나의 유행이 사회 전체를 조직하기보다 다양한 스타일이 공존하는 취향의 다원화가 나타나기 쉽다. 그 결과 패션은 하나의 트렌드가 위에서 아래로 확산되는 구조라기보다 다양한 취향과 스타일이 동시에 등장하는 문화적 장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리셀 시장의 성장과 빈티지 의류에 대한 관심, 아카이브 패션의 확산 역시 이러한 흐름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중고 의류 거래 플랫폼이 확대되면서 패션 상품은 이전보다 훨씬 오래 유통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게 되었다. 과거에는 시즌이 지나면 상품의 가치가 빠르게 떨어지고 소비의 흐름에서 밀려나는 일이 많았다. 패션 산업이 본질적으로 ‘새로운 것’을 중심으로 작동해 왔기 때문에 이전 시즌의 제품은 자연스럽게 유행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소비의 시간 역시 짧게 유지되었다. 오늘날에는 과거 컬렉션이나 아카이브 제품이 다시 시장에서 거래되며 새로운 가치를 얻기도 한다. 패션은 더 이상 단일한 시즌의 흐름 속에서만 소비되는 문화라기보다 서로 다른 시기의 스타일이 동시에 작동하는 구조로 변화하고 있다.
실제로 도쿄와 오사카의 일부 빈티지 매장은 예약 없이는 입장이 어려울 정도로 방문객이 몰리고 있다. 아모레(Amore)나 빈티지 쿠(Vintage Qoo) 같은 빈티지 편집샵은 수십만 명의 SNS 팔로워를 보유하며 글로벌 패션 소비자들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패션이 더 이상 ‘지금 생산된 것’만을 중심으로 소비되는 문화가 아님을 보여준다. 과거의 디자인이 현재의 소비 속으로 다시 편입되면서 빈티지 의류는 하나의 새로운 패션 자원처럼 활용되기 시작했다. 동시에 할리우드 배우나 K-pop 스타들의 스타일링을 통해 이러한 아이템들이 다시 등장하면서 과거의 디자인은 현재의 패션 이미지 속에서 새로운 맥락으로 재해석된다.
이러한 흐름이 항상 긍정적인 결과만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다. 북반구에서 소비된 의류가 글로벌 남반구로 이동하면서 새로운 형태의 섬유 폐기물 문제가 나타나기도 한다. 가나의 칸타만토(Kantamanto) 시장은 세계에서 가장 큰 중고 의류 시장 가운데 하나로 알려져 있지만 동시에 판매되지 못한 의류가 폐기물로 남는 장소이기도 하다. 이 사례는 순환경제가 단순히 물건을 다시 판매하는 것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의류의 이동과 처리, 재활용 과정 전체가 함께 조직되지 않는다면 중고 의류 시장 역시 또 다른 형태의 폐기물 문제를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순환경제는 단순한 소비 방식의 변화가 아니라 글로벌 물류와 폐기물 관리 체계를 포함하는 복합적인 산업 구조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최근 패션 산업에서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순환경제(circular economy)를 구축하려는 다양한 시도가 나타나고 있다. 여러 기업들이 섬유를 다시 섬유로 재생하는 재활용 기술을 개발하고 있으며 의류 수거와 분류, 재활용 인프라를 구축하려는 움직임도 이어지고 있다. 예를 들어 이베이(eBay)는 ‘서큘러 패션 펀드(Circular Fashion Fund)’를 통해 섬유 재활용, 리셀, 수선 기술을 개발하는 스타트업을 지원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의류를 리폼하거나 명품을 수선해주는 모바일 서비스가 등장하면서 패션 산업은 생산 이후의 단계까지 포함하는 새로운 순환 체계를 모색하고 있음을 체감한다.
그럼에도 이러한 기술적 변화만으로 패션 산업의 문제가 해결되기는 어렵다. 순환경제가 실제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의류를 수거하고 분류하며 재활용하는 물류와 인프라가 함께 구축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어떤 의류가 재활용 가능한지 분류하는 기술, 이를 처리할 수 있는 시설, 그리고 국가 간 폐기물 이동 규정까지 다양한 제도적 조건이 동시에 작동해야 한다. 지속가능한 패션은 단순한 소재 혁신의 문제가 아니라 산업 체계 전체를 다시 조직하는 문제에 가깝다. 이는 패션 산업이 단순한 소비재 산업이 아니라 거대한 생산과 유통, 폐기 시스템 위에서 작동하는 산업임을 다시 한 번 보여준다.
패션이 완전히 트렌드 없이 존재하기는 어렵다. 첫 연재에서 살펴보았듯 사회학자 게오르크 짐멜은 「Die Mode」(1904)에서 패션을 모방과 차별의 반복 속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형태가 등장하는 사회적 현상으로 설명했다. 사람들은 서로를 모방하면서도 동시에 차이를 만들려 하기 때문에 새로운 스타일은 계속 등장하고 그 과정에서 패션은 일정한 속도로 변화한다. 유행이 끊임없이 등장하고 사라지는 이유 역시 이러한 사회적 긴장 속에서 설명된다. 특정 스타일이 널리 확산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차별의 수단으로 기능하지 못하고 다시 새로운 차이가 요구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나타나는 변화는 이러한 원리가 사라지고 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트렌드가 작동하는 방식이 달라지고 있는 것이다. 과거에는 하나의 거대한 유행이 등장하고 그것이 사회 전체로 확산되는 흐름이 비교적 뚜렷했다. 반면 오늘날의 패션 환경에서는 서로 다른 스타일과 서로 다른 시기의 패션이 동시에 공존한다. 최근 패션 산업에서 나타나는 Y2K 아카이브의 재부상 역시 이러한 흐름을 보여주는 사례다. 샤넬의 ‘서프백(Surf Bag)’ 같은 아이템 역시 빈티지 시장과 아카이브 패션의 확산 속에서 재등장했다. 과거 시즌의 디자인이 새로운 소비 맥락 속에서 다시 의미를 얻는 것이다. 패션은 여전히 변화하지만 그 변화의 방식은 이전보다 훨씬 복합적이다.
이러한 변화는 지속가능성이라는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지금까지 패션의 지속가능성은 친환경 소재나 재활용 기술, 생산 공정의 개선과 같은 영역에서 주로 논의되어 왔다. 실제로 패션 산업에서 지속가능성은 종종 복잡한 윤리적 선택의 문제로 나타난다. 예를 들어 동물 보호를 이유로 모피 대신 에코퍼를 선택하는 경우가 많지만, 대부분의 에코퍼는 합성섬유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미세 플라스틱과 폐기 문제를 남긴다. 이 사례는 지속가능성이 단순히 하나의 더 나은 소재를 선택하는 문제만으로 해결되기 어렵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앞에서 논했듯 지속가능성은 이미 완성된 해답이라기보다 앞으로 지켜가야 할 하나의 약속에 가깝다. 패션 산업이 스스로의 생산 구조와 소비 방식을 다시 생각하고 변화의 방향을 모색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결국 이 문제는 무엇으로 옷을 만드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패션이 변화의 속도와 소비의 시간을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다. 이 연재에서는 바로 이 질문을 중심으로 몇 가지 문제를 살펴보았다. 이제 마지막 질문을 던져볼 차례는 독자에게 넘어간다. 앞으로 당신은 패션의 시간과 소비의 방식을 어떤 방향으로 조직하고자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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