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궐은 본래 머무는 곳이다. 그러나 시흥행궁은 머무름보다 지나감으로 기억되는 궁궐이었다. 1795년 윤2월, 정조는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현륭원으로 향하며 첫날 밤을 이곳에서 보냈고 화성의 큰 행사를 마친 뒤 환궁하는 길에도 다시 이곳에 들렀다. 시흥행궁의 본질은 화려한 전각에 있지 않았다.
그것은 길 위에서 잠시 멈춘 권력, 그리고 그 멈춤을 통해 백성과 만난 정치의 형식이었다. 행궁은 단순한 숙소가 아니었다.
움직이는 나라가 잠시 모습을 드러내는 현장이었다. 어쩌면 정조에게 중요한 것은 궁궐 자체보다 길 위에서 백성을 직접 만나는 일이었는지 모른다. 궁궐이 고정된 권력이라면 행궁은 움직이는 권력이었다. 그러나 지금 시흥행궁의 흔적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시흥이라는 이름은 남았지만 터는 저층 주거지와 상가 사이에 묻혀 있다. 정확한 규모와 배치조차 여전히 더 따져봐야 한다.
어떤 기록은 114칸을 말하고 후대의 자료는 214칸을 이야기한다. 이 차이는 단순한 혼란이 아니다. 오히려 시흥행궁이 하나의 고정된 건축물이 아니라 시대와 필요에 따라 운영되던 공간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복원은 더욱 신중해야 한다. 충분한 사료와 발굴, 직접적인 증거, 최소 개입과 진정성이라는 원칙 위에서 접근해야 한다.화성행궁의 복원은 오랜 고증과 단계적 연구 끝에 가능했다. 반대로 상징과 관광이 증거를 앞지른 복원은 쉽게 ‘가짜 기억’이라는 의심을 받기도 한다. 그래서 시흥행궁 복원의 출발점은 ‘몇 칸을 다시 지을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다시 살릴 것인가’여야 한다. 중요한 것은 건물만이 아니다. 능행의 길을 다시 읽고, 오래된 지명의 의미를 되살리고, 사라진 공간의 기억을 오늘의 도시 속에 다시 연결하는 일이다. 골목의 흔적들, 오래된 은행나무, 주민들의 기억과 이야기가 때로는 거대한 전각보다 더 오래 남는다.
최근 금천에서는 시흥행궁의 기억을 오늘의 방식으로 다시 꺼내 보려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금천시흥행궁문화제역시 단순한 재현 행사라기보다 사라진 행궁의 시간을 다시 도시 위에 펼쳐보는 과정에 가깝다. 행궁은 건물만이 아니라 사람들이 모이고 지나가고 기억하던 하나의 흐름이었다.
새 기와를 얹는다고 해서 기억까지 복원되는 것은 아니다. 시흥행궁의 복원은 옛 건물을 흉내 내는 일이 아니라 사라진 시간을 오늘의 도시 위에 다시 흐르게 하는 일에 더 가깝다. 사람들이 다시 그 길을 걷기 시작할 때 어쩌면 시흥행궁의 복원도 그때 비로소 시작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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