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뉴스투데이 한민하 기자] 국내 패션 플랫폼들의 AI 기술 고도화가 패션업계의 권력 지형을 뒤흔들고 있다.
막대한 광고비를 앞세운 대형 브랜드들이 메인 배너와 랭킹 노출 경쟁이 소비자의 체형과 취향, 구매 이력 등을 기반으로 한 ‘초개인화’에 밀려 데이터 기반의 마케팅 전쟁이 본격화되는 양상이다.
18일 패션업계에 따르면 무신사와 지그재그, 에이블리 등 주요 패션 플랫폼들은 AI 기반 개인화 추천과 사이즈 예측, 리뷰 분석, 검색 고도화 기능을 전방위로 확대하고 있다. 소비자의 신체 데이터와 취향은 물론, 과거 구매 이력과 앱 내 체류 시간까지 종합적으로 학습해 상품을 제안하는 방식이 시장의 주류로 자리 잡는 모습이다.
특히 이 과정에서 자금력 한계로 메인 화면 노출이나 대규모 마케팅을 집행하기 어려웠던 중소·인디 브랜드들이 새로운 성장 발판을 마련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플랫폼 AI가 브랜드의 규모나 자본력 대신 실제 구매 전환 가능성과 소비자 반응 데이터를 우선적으로 알고리즘에 반영하기 시작하면서다. 기성 패션 시장을 지배하던 ‘광고→인지도→구매’ 중심 구조가 약화되고, AI가 소비자의 니즈를 정밀 겨냥하는 ‘데이터→추천→구매’ 흐름으로 유통 패러다임이 이동하고 있는 셈이다.
초개인화 기술은 소비자에게는 실패 가능성을 줄인 쇼핑 경험을 제공하고, 중소 브랜드에는 자본 장벽을 넘어 소비자에게 닿을 수 있는 접점을 넓혀주고 있다. 사용자마다 첫 화면과 추천 상품 자체가 달라지는 구조가 자리 잡으면서 과거처럼 소수 브랜드가 메인 노출을 독점하던 흐름도 점차 약해지는 분위기다.
쇼핑 방식 역시 빠르게 변화고 있다.
이전까지는 브랜드의 이름값이나 실시간 랭킹 중심으로 상품을 탐색했다면, 최근에는 AI가 체형과 취향, 가격대, 스타일 데이터를 종합 분석해 상품을 먼저 제안하는 ‘발견형 쇼핑’ 구조가 대세로 굳어졌다는 것이다. 온라인 쇼핑의 최대 약점으로 꼽혀온 ‘직접 입어볼 수 없다’는 한계 역시 고도화된 사이즈 추천과 입체적인 리뷰 분석 기능을 통해 빠르게 보완되는 추세다.
지그재그 관계자는 “AI 기반 개인화 추천 고도화가 소비자 구매 만족도를 높이는 동시에 입점 스토어들의 거래액 성장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며 “고객 취향과 행동 데이터를 기반으로 상품 탐색 효율이 높아지면서 중소 브랜드들의 소비자 접점 확대에도 도움이 되는 구조”라고 설명했다.
업계에서는 이를 ‘롱테일 소비 구조의 강화’로 해석한다. AI가 소비자의 세분화된 취향에 맞춰 기존 대형 브랜드뿐 아니라 숨겨진 로컬 브랜드들까지 찾아내 추천하기 시작하면서다. 전국 단위 플랫폼에서 발견되기 어려웠던 지역 기반 브랜드나 특정 취향 중심 브랜드들도 AI 추천 안에서 노출 기회를 확보할 수 있는 구조가 형성되고 있다는 설명이다.
실제 플랫폼들의 AI 전략은 패션을 넘어 뷰티 영역으로까지 확장되며 인디 브랜드의 ‘인큐베이터’ 역할도 강화하는 모습이다. 실제 이 같은 기술 고도화의 낙수효과 역시 가시화되고 있다. 에이블리가 선정한 상위 15개 인디 뷰티 브랜드의 최근 3개월(2025년 11월~2026년 1월) 거래액은 전년 동기 대비 80% 급증한 것으로 집계됐다. 에이블리는 연간 1500억건 이상의 고객 행동 데이터를 기반으로 구매 가능성이 높은 소비자와 브랜드를 연결한 AI 개인화 추천 기술이 주효했다고 보고 있다.
이와 동시에 플랫폼 간 AI 경쟁 역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유통업계 경쟁이 물류와 가격, 브랜드 입점 규모 중심이었다면 최근에는 누가 더 정교한 AI 추천과 초개인화 기술을 확보하느냐가 핵심 경쟁력으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대형 플랫폼들이 AI 추천과 쇼핑 에이전트 기술 고도화에 사활을 거는 배경도 여기에 있다.
다만 기술 고도화의 이면에는 플랫폼 AI가 시장의 새로운 절대 권력으로 부상하고 있다는 우려도 공존한다. 플랫폼 알고리즘이 판매와 소비 흐름 자체를 좌우하는 구조로 이동하면서 플랫폼이 소비자 접점을 사실상 독점하게 됐다는 지적이다.
이에 따라 입점 브랜드들 역시 단순한 디자인·기획 경쟁을 넘어 ‘AI 친화형 상품’ 개발과 데이터 최적화 경쟁이라는 새로운 압박을 마주하게 됐다. 알고리즘이 선호하는 키워드와 핏, 스타일 구조에 맞춰 상품을 기획·생산하는 현상이 심화될 수 있다는 뜻이다.
실제 현장에서는 상품 본연의 경쟁력만큼이나 플랫폼 데이터 노출 전략과 알고리즘 대응 역량이 생사를 가르는 핵심 지표로 떠오르는 분위기도 감지된다.
여기에 생성형 AI의 확산세까지 더해지며 패션업계 AI 경쟁은 이미지·영상 제작부터 공급망 관리, 개인화 추천까지 전방위로 확대되는 양상이다. 외형 성장 둔화가 이어지는 저성장 국면 속에서 데이터 자산화가 선택이 아닌 생존 전략으로 자리잡고 있다는 의견도 나온다.
업계 일각에선 소비 취향이 이처럼 세분화되면서 과거처럼 시장 전체를 장악하는 ‘메가 브랜드’가 등장하기 어려운 구조가 형성되고 있다는 해석도 나온다. 다양한 인디 브랜드들이 주목받는 대신 소비 관심 역시 무수히 분산되며 플랫폼 안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브랜드가 부상하고 사라지는 흐름이 강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현재 국내 패션 산업이 전통적인 감각과 브랜드 이미지 중심의 시장을 넘어 기술 집약적인 데이터 기반 산업으로 빠르게 전환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플랫폼 AI의 진화가 중소 브랜드의 성장을 이끄는 ‘혁신’이 될지, 혹은 플랫폼 예속화를 심화시키는 ‘또 다른 권력’이 될지의 여부는 향후 데이터 주도권과 알고리즘 투명성이 얼마나 확보되는 지에 따라 달라질 것으로 진단한다.
서용구 숙명여대 경영학과 교수는 “AI 알고리즘 시대에는 기존 1위 브랜드는 계속 강세를 유지하더라도, 그 아래 순위 브랜드 지형은 충분히 흔들릴 수 있다”며 “AI가 소비자 취향에 맞는 숨겨진 로컬 브랜드와 숨어 있는 중소브랜드를 찾아내기 시작하면서 롱테일 시장이 더 강하게 구현되는 흐름”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과거에는 대형 유통업체 MD나 메인 배너 노출이 중요했다면, 앞으로는 AI 알고리즘에 얼마나 잘 노출되고 초개인화 추천에 최적화되느냐가 핵심 경쟁력이 될 가능성이 크다”며 “결국 패션 플랫폼 시장도 AI 고도화 경쟁이 새로운 게임으로 시작된 셈”이라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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