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 안팎에서 사회 약자를 위한 '포용 금융'을 명분으로 내 건 정부의 저신용자 금리 인하 압박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금융권의 사회 약자 배려를 촉구하는 정부 시도 자체는 높게 평가하지만 신용점수를 빈부의 척도로 여기는 잘못된 인식과 판단의 오류를 문제 삼는 여론이 적지 않다. 선량한 서민 피해만 유발할 것이라는 반응이 우세하다. 실제로 개개인의 신용점수 산출은 단순히 재산의 많고 적음 보다는 '거래 실적' 등이 더욱 비중 있게 반영되고 있다. 재산이 적어도 대출을 자주 받고 성실하게 이자를 상환하면 신용등급이 높고 재산이 많아 대출 경험이 없을 때는 오히려 낮을 수도 있는 구조다.
"믿는 사람 대접하는 것은 인간사 이치인데"…고신용자·저신용자 대출금리 역전 논란
금융권 등에 따르면 '여신(與信)' 업무는 은행의 고유 업무 중 하나다. 단어 의미 그대로 상호 간에 믿음을 근간으로 돈을 빌려주고 이자 수익을 얻는 행위다. 여신 한도와 금리 역시 믿음을 기준으로 책정된다. 이미 거래 경험이 있고 돈을 잘 갚았던 사람에겐 많은 돈을 저렴한 이자로 빌려주고 거래 경험이 전무 하거나 돈을 잘 갚지 않은 전력을 지닌 사람에겐 떼일 가능성을 염두해 적은 액수만 높은 이자를 받고 빌려주는 식이다. 중요한 일은 관련 경험이 많고 믿을 만한 사람에게, 설령 잘못 되더라도 피해가 없거나 적은 일은 경험이 없는 사람이라도 한 번쯤 기회를 줘보는 인간사(人間事) 기본 원칙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당연히 세계 어느 나라 은행을 가도 여신 업무의 기본 틀은 동일하다.
그런데 최근 한국에선 역사적으로, 또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돈을 빌려주면서 신용이 높은 사람에겐 높은 이자를, 반대인 사람에겐 낮은 이자를 책정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시작은 지난해 9월 이재명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한 발언이었다. 당시 이 대통령은 "금융사가 초우대 고객에게 초저금리로 돈을 많이 빌려주는데 0.1%만이라도 부담을 더 시킨 다음에 그 중 일부를 갖고 금융기관에 접근하기 어려운 사람에게 좀 싸게 빌려주면 안 되냐"는 제안을 내놨다.
이후에도 "당신은 못 갚을 가능성이 높은 집단이니까 이자를 많이 내, (라고 하는 것은) 물론 필요한 시장 원리다. 지금은 너무 지나치다. 금융이 너무 잔인하다. 하위 10%가 10%를 다 부담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 가혹하지 않냐. 최소한 일부라도 분담하면 안될까 생각해봤다"며 같은 입장을 피력했다. 청와대 참모들도 힘을 보탰다. 김용범 청와대 정책실장은 페이스북을 통해 "상위 등급은 낮은 금리로 안온하게 자금을 조달하지만 그 아래는 깎아지른 듯한 고금리의 절벽이 기다린다"며 해당 사안에 대한 비슷한 문제의식을 드러낸 바 있다.
국정 운영의 최고책임자인 대통령과 설계자인 청와대 정책실장이 같은 문제를 지적하고 나서자 금융권도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금리 책정 기준 수정은 물론, 기존 대출에 대해서도 금리 재산정에 나서고 있다. 신용이 높은 사람의 금리를 높이고 낮은 사람은 내리고 있다. 은행연합회에 따르면 지난 3월 기준 5대 시중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의 개인신용전문 업체 코리아크레딧뷰로(KCB) 산정 신용점수 600점 이하 신규 신용 대출 차주의 평균 금리는 1월 대비 0.514%p 하락했다. 반면 신용점수 951~1000점대 차주의 평균금리는 0.124%p 올랐다.
일부 대출 상품에 있어서는 오히려 신용이 높은 사람 보다 낮은 사람이 더 적은 금리가 적용되는 사례도 등장했다. 일례로 지난해 11월 기준 카카오뱅크의 중·저신용자 대상 '중신용대출' 금리는 연 3.451%~9.450%인 반면 일반 신용대출 금리는 연 3.858%~7.170%였다. 중·저신용자 대출 금리의 하단이 일반 신용대출 금리보다 0.407%p 낮은 셈이다. 케이뱅크 역시 중·저신용자 대출(신용대출플러스) 금리(4.50%~12.39%)의 하단이 일반 신용대출 금리(4.51~8.28%) 보다 낮았다.
또 지난해 9~10월 사이 신한은행 주택담보대출에서는 고신용자 금리가 4.14%인데 반해 저신용자 금리는 3.67%로 책정됐다. 국민은행 마이너스통장에서도 고신용자 4.10%, 최저신용자 4.09%로 근소한 역전이 발생했다. 하나은행 역시 저신용 구간 금리가 더 낮게 나타난 구간이 있었다. 올해 3월 기준 하나은행의 마이너스대출 금리 역시 최저신용자는 연 3.73%에 불과한 반면 최고신용자는 4.86%로 오히려 높았다. 하나은행과 경기도 간의 협약 상품이 통계에 반영된 결과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1%p 가량의 차이는 상식을 훌쩍 뛰어넘는 수준으로 평가됐다.
"신용점수 평가는 재산·소득 보단 오히려 거래 실적 비중 높아…평범한 서민들 피해 우려"
여론 안팎에선 정부 압박이 빚어낸 대출금리 역전 현상을 두고 신용의 높고 낮음을 나타내는 '신용등급'에 대한 오해와 책정 방식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비롯된 참사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아울러 접근 방식부터 잘못된 문제 해결 방식으로 인해 '보통사람'이라 불리는 절대 다수의 평범한 서민들의 피해만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도 일고 있다. 저신용자는 경제적 약자, 고신용자는 부자라는 전제 자체가 잘못됐으며 오히려 은행 대출이 필요할 정도로 경제적으로 열악하고 또 대출금은 갚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서민들이 고신용자로 분류되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각 시중은행과 금융감독원, 한국소비자원 등에 따르면 신용점수 책정 기준의 핵심은 과거 거래 기록, 즉 '거래 실적'이다. 자산이나 소득 규모 높으면 담보 대출이나 대출 한도 설정 과정에서 유리하긴 하지만 신용점수와 반드시 비례하진 않는다. 동일 인물임에도 은행 별로 대출 한도나 대출 유·무가 다른 것도 같은 이유다. 성실 거래 기록이 많은 A은행에선 대출이 잘 나오고 한도도 높게 나오는 반면 거래 기록이 전혀 없는 B은행에선 대출조차 불가능한 경우고 종종 발생한다.
금감원과 각 시중은행이 정리한 각 신용등급 별 특징은 신용점수 책정에 거래기록이 어느 정도 반영되는지를 나타내는 근거로 지목됐다. 통상 1~2등급은 최우량등급으로 분류되며 특징은 오랜 신용거래 경력과 다양하고 우량한 신용거래 실적을 보유하고 있어 부실화(연체) 가능성이 매우 낮은 차주다. 반면 중·저신용자 이하에서는 과거 단기연체 경험 유무와 빈도, 현재 연체 중인 상태 등에 따라 일반등급(5~6등급), 주의등급(7~8등급), 위험등급(9~10등급) 등으로 구분된다. 자산(재산)·소득 규모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되지 않고 있다.
고신용자의 금리를 높여 저신용자의 금리를 낮추는 것은 부자들의 돈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는 것과는 전혀 다른 개념이며 오히려 돈을 잘 갚은 성실한 사람들에게는 이자를 더 받고 돈을 쓰고도 갚지 않았던 사람에게는 이자를 덜 받는 것에 가깝다는 지적이 나오는 배경이다. 실제로 1분기 기준 5대 시중은행의 연체율은 0.4%를 기록했다. 은행 대출을 받고 갚지 않는 이들은 100명 중 1명도 채 되지 않는 극소수이고 나머지는 전부 성실히 갚고 있다고 봐도 무방한 수준이다.
한 시중은행 지점에 근무하는 은행원 A씨는 "신용점수의 핵심은 재산(자산) 규모보단 과거 및 현재의 거래 기록이나 채무 상환 이력, 대출 규모다"며 "간혹 담보대출 개념과 착각해서 소득이 높거나 부동산 같은 재산이 많으면 신용점수도 높다고 착각하는 고객들이 있는데 오히려 거래 기록이 없어 신용점수가 낮게 나오는 고객들도 여럿 있다"고 말했다. 이어 "실제로 신용점수가 가장 높은 분들은 신용 대출을 받고 성실히 상환한 이력이 있거나 신용카드를 쓰면서 대금을 성실히 납부하는 평범한 직장인들이 가장 많다"며 "그런 분들 입장에선 만약 저신용자 보다 대출 금리가 높게 책정되면 꽤 억울하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덧붙였다.
다수의 전문가들은 향후 국민적 반발 여론이 더욱 거세질 것이라는 관측과 더불어 일부 중신용자들이 고의로 신용 등급을 낮추는 '도덕적 해이' 현상의 발생 가능성을 우려했다.홍기용 인천대 경영학과 교수는 "취약계층을 지원하겠다는 정책적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시장의 기본 원리인 신용 체계를 흔들 경우 장기적으로 금융 시장 전반의 신뢰도를 떨어뜨릴 수 있다"며 "성실하게 부채를 상환해 온 다수의 고신용 서민들이 역차별을 느끼지 않도록 시장 원리를 존중하는 선에서 정교한 보완책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제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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