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돌의 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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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돌의 조화

맨 노블레스 2026-05-18 14:00:00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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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이 미야케와 요시오카 토쿠진이 협업한 ‘TO’ 시리즈 워치.


이시산 작가.


생 로랑의 스웨이드 첼시 부츠.


나뭇가지로 제작한 옷걸이.


리모와가 전 세계 아티스트와 협업한 프로젝트 ‘As Seen By’에 참여한 이시산 작가의 작품.


이시산의 첫 작업물은 인센스 홀더였다. 울퉁불퉁한 돌을 평평하게 깎아 바닥을 만들고 구멍을 뚫었다. 그런데 다듬고 나니, 그 돌을 발견했을 때의 아름다움이 사라져버렸다. 이후 그는 자연물을 깎거나 다듬지 않는다. 그의 작업은 자연과 시간이 만들어낸 형태를 그대로 살리는 것이 가장 큰 축이자 출발점이다. 대신, 자연물이 일상에 조화롭게 스며들도록 하는 데 골몰한다. 그렇게 완성된 작품은 투박한 동시에 매끈하고, 바랜 듯하지만 현대적이며, 차가우면서도 따뜻하다. 상반된 감각이 하나의 오브제 안에서 팽팽하게 공존한다. 작가 이시산은 2025 메종 앤 오브제 수상, 리모와·구찌와의 협업, 다양한 패션 쇼룸 프로젝트를 통해 감각적 오브제를 선보이며 가구 디자이너로 주목받았다. 지난해 10월에는 프랑스 누아지르그랑에서 열린 필리아 갤러리의 10주년 기념전 〈STRATES〉를 통해 또 한 번 이목을 끌었다. 자크 칼리즈가 설계한 몽 데스트(Mont d’Est) 주차장과 리카르도 보필의 에스파스 아브락사(Espaces Abraxas), 2개의 상징적 브루털리즘 건축물 사이에 놓인 그의 작품은 육중한 콘크리트 공간에도 전혀 주눅 들지 않고 또렷한 존재감을 발했다. 지난 4월 9일에는 상하이 팽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개최하는 등 글로벌 무대에서 종횡무진 중이다. 그를 지금에 이르게 한 것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지만 아무나 보지 못하는 자연에서 특별함을 발견할 줄 아는 안목이다. 자연에 대한 심미안이 남다른 그는 평소 무엇에 매료될까. 책장에 꽂힌 도널드 저드와 구라마타 시로의 서적은 그의 간결한 디자인의 뿌리를 짐작케 했고, 에디 슬리먼의 컬렉션과 블랙 컬러로 채워진 옷장에서는 절제된 미감과 일관된 취향이 자연스레 배어 나왔다. 작업실과 집에서 그의 취향을 들여다봤다.

이시산 작가가 영감받은 구라마타 시로 아트 북.


리모와가 전 세계 아티스트와 협업한 프로젝트 ‘As Seen By’에 참여한 이시산 작가의 작품.


작가가 즐겨 착용하는 USS 2세대 레
트로스펙스 안경.


작가의 대표작 ‘돌의 비율’ 시리즈의 테이블과 작가의 친형이 제작한 스툴, 그리고 이사무 노구치의 조명.


나탈리 뒤 파스키에 작가의 자필 사인이 적힌 아트 북.


구라마타 시로는 나를 꿈꾸게 해준 작가다. 디자인을 전공하면서도 딱히 목표가 없었다. 그러다 어느 날 수업 시간에 교수님이 구라마타 시로의 작품을 화면에 띄웠는데, 단번에 매료됐다. 아크릴과 메시 철망 같은 산업 소재를 활용한 실험적 가구는 무척 신선했고, 이세이 미야케와 협업한 공간 프로젝트는 내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자연이 만들어내는 변화를 좋아한다. 화창한 날 지저귀는 새 소리, 나무 사이로 스며드는 빛과 그림자가 좋다. 비 온 뒤 숲에서 나는 특유의 향도, 시골에서 강아지들과 산책하며 맞는 바람도 좋다. 날마다 다채롭고 신비로운 자연은 내 작업의 중요한 모티브다.

최근 영감을 얻은 곳은 의성이다. 아버지의 고향이라 종종 방문하는데, 작년에 큰 산불이 났다. 그곳에서 생명이 소멸된 자연 상태를 처음 마주했다. 불에 탄 나무들이 무작위로 쓰러진 풍경은 공허하고 충격적이었다. 이후 생명을 잃은 자연물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을 고민 중이다.

절대 잊지 못할 전시는 구찌와 협업한 <밤부 인카운터스>전이다. 2025년 밀라노 디자인 위크 기간에 열린 전시다. 협업 자체도 의미 있었지만, 그곳에서 만난 인연이 더 진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아티스트 토크를 통해 나탈리와 가까워졌는데, 멤피스 그룹 창립 멤버였던 그녀는 나를 작업실에 초대해 책을 선물하기도 했다. 대학 시절부터 동경했던 디자이너 요시오카 도쿠진이 바로 옆 부스에서 전시를 진행한 것도 내겐 영광스러운 순간이었다.

커리어에서 가장 큰 전환점은 ‘나’다. 특정 전시나 수상보다 ‘나의 변화’가 상황을 많이 바꿔놓았다. 전시를 치르다 보면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과 교류하게 되지만, 영어에 자신이 없던 나는 늘 대화하기를 꺼렸다. 그런데 리모와 협업 당시 담당자였던 마랭은 집에 초대해 고기를 구워 먹을 만큼 가까워졌다. 이후로는 언어 실력이나 서툰 표현에 개의치 않고 서슴없이 대화를 나눴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많은 기회가 찾아왔다.

가장 즐겨 찾는 장소는 한남동이다. 충주에서 갓 상경해 힘든 시기를 보낸 곳이다. 친구들과 모이는 곳도 주로 한남동이다. 어제는 위스키 바 ‘블라인드 피그’에서 한잔 마셨다. ‘한남동 감자탕’, ‘한남오뎅’도 즐겨 찾는 곳이다.

바쉐론 콘스탄틴 패트리모니 워치.


작가가 소장 중인 찰스 레니 매킨토시의 아가일 의자.


작가가 유년 시절부터 즐긴 게임보이와 게임팩.


2026년에 선보인 ‘돌의 비율’ 시리즈의 최근작.


류이치 사카모토가 소속된 YMO의 앨범.


작가가 수집한 카메라.


여가 시간에는 포켓몬 게임을 즐긴다. 초등학생 때 어머니가 게임보이와 게임팩을 사줘 형과 함께 게임을 하면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동안 바빠서 새 게임팩 사는 걸 미루고 있었는데, 최근에 다시 모으고 있다.

언젠가 와디럼을 꼭 여행하고 싶다. 요르단 아카바주에 위치한 사막으로, 영화 〈듄〉 촬영지로 유명하다. 지프를 타고 광활하게 펼쳐진 사막과 붉은 바위들을 직접 보고 싶다.

바쉐론 콘스탄틴 워치를 내게 선물했다. 구찌 협업 전시를 마친 뒤 이를 기념하고 싶어 시계를 구매했다. 평소 드레스 워치를 좋아해 바쉐론 콘스탄틴의 패트리모 모델로 골랐다. 훗날 아이에게 물려주면서 그 전시와 내 작업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나의 취향을 저격한 선물은 오마르 아프리디의 ma-1 재킷과 트라우저다. 오마르 아프리디는 일본인 친구 두 명이 전개하는 브랜드로, 최근 도쿄에 매장을 오픈했다. 쇼룸을 위한 야외 조형물과 가구를 작업해줬고, 그 답례로 받았다. 블랙 레더 소재, 슬림한 핏이 마음에 들어 자주 손이 간다. 최

근 가장 흡족한 쇼핑은 셀린느 2019 A/W 시즌의 M_CT_003 데님이다. 에디 슬리먼의 디자인을 좋아하는데, 스트레이트 핏에 유니언 워시 그리고 셀비지 디테일까지 들어간 바지라 마음에 든다.

전시 오프닝 때 생 로랑 첼시 부츠를 신는다. 에디 슬리먼 시절의 디자인이고, 스웨이드 소재와 타바코 컬러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 멋스러워지는 것 같다.

10만 원을 가장 만족스럽게 쓰는 방법은 돌 쇼핑이다. 내게 채석장에서 작업에 쓸 돌을 구매하는 것만큼 값진 소비는 없다. 사라지지 않는 것, 시간이 지나도 쓸모 있는 것에 주로 소비하는 편이다.

작가의 할아버지 집 앞에 놓인 조약돌. 직접 붓글씨를 썼다.


2019 A/W 시즌의 M_CT_003 데님 팬츠.


빈티지 마켓에서 구매한 조명으로, 자동차 전조등을 개조한 것이다.


이시산 작가의 책상. 모니터 옆에 놓인 포스터의 넘버링을 작업이 끝날 때마다 지워나간다.


작가가 수집한 원석.


책상에 꼭 있어야 하는 세 가지는 레트로 스펙트 안경, 수석, 오메가3다. 틴트가 살짝 들어간 스펙트 안경은 외부 미팅 때 주로 착용한다. 자신감이 높아지는 기분이다.

수석은 작업에 쓰일 자연물을 구하면서 자연스레 모으게 됐다. 생각해보면, 외할아버지의 영향도 있는 것 같다. 어린 시절 외할아버지댁 문 앞에 붓글씨로 쓰인 조약돌이 가득했다. 서예와 수석 수집이 외할아버지의 취미였다.

나는 이중적이다. 도시에 살고 싶지만, 자연이 좋다. 오래된 물건에 마음이 가지만, 모던한 디자인도 좋아한다. 충돌하는 두 감각이 조화를 이루는 공간, 그곳이 내가 꿈꾸는 집이다.

즐겨 사용하는 앱은 후르츠패밀리 혹은 번개장터다. 단종되어 구하기 힘든 물건이나 지난 시즌 옷을 디깅해 사는 편이다.

먼 산 보고 큰길 걷자. 우리 집안의 가훈이다. 살면서 이만한 조언을 들어본 적이 없다.

좋아하는 영화는 <가타카>다. 영화가 시사하는 내용도 좋지만, 절제된 모더니즘의 공간과 오래된 가구, 배우들의 옷차림 등 미장센이 내 취향이다. 촬영지 중 한 곳이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설계한 마린 카운티 시빅 센터인 점도 매력적이다. 이처럼 공간과 인물, 패션이 조화롭게 어우러지며 하나의 톤으로 완성되는 영화에 끌리는 편이다. <듄> 또한 비슷한 이유로 좋아한다.

작업할 때는 바이닐로 음악을 듣는다. 주로 가사 없는 음악을 트는데, 류이치 사카모토와 알바 노토의 <Revep>, <Summvs>를 즐겨 듣는다. 휴대폰으로 노래를 거의 듣지 않아 따로 플레이 리스트는 없고, 마음에 드는 음악이 생기면 바이닐을 구한다. 최근엔 김오키 홀리데이 에디션 LP를 샀다.

스트레스 해소법은 부산에서 배낚시를 하는 것이다. 친구들과 함께 배 위에서 파도소리와 바람을 느끼며 환기한다. 물고기가 미끼를 물었을 때의 원시적 감각에 집중하다 보면 잡념이 사라진다. 그리고 직접 잡은 물고기를 회 떠서 소주와 곁들이면 극락이 따로 없다.

작업물을 건축물까지 확장하기, 의성 시골집 고쳐 살기, 사막에서 레지던스 후 전시회 열기. 나의 버킷 리스트다. 특히 도시와 자연을 오가며 작업하는 지금과 달리, 사막이든 아마존이든 압도되는 자연 속에 머물며 작업하고 싶다. 그곳에서 만든 작품으로 전시까지 연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고.

에디터 이도연 사진 장기평 헤어 박은빈 메이크업 이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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