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나오시마=연합뉴스) 김재현 선임기자 = '예술의 섬'으로 불리는 일본 나오시마(直島)는 원래 산업 폐기물로 오염된 땅이었다. 1987년, 이곳에 출판기업 베네세의 후쿠타게 소이치로 회장이 섬 토지의 절반을 사들여 일본 건축의 거장 안도 다다오(安藤忠雄)와 함께 재생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공간 중에 땅속에 세워진 지중(地中) 미술관과 2010년 문을 연 이우환미술관이 있다.
이우환(90) 화백이 안도에게 제안한 미술관 컨셉은 동굴처럼 생기고, 하늘이 반쯤 열려 있으며, 태반과 죽음을 동시에 마주하는 듯한 공간이었다. 안도가 제안을 받아들인 건 비움과 관계의 미학이라는 철학적 기반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울수록 채워지고 덜어낼수록 더 많은 것이 들어온다는 생각이 두 사람을 이어줬다. 안도의 건축을 상징하는 노출 콘크리트와 자연 그대로의 빛은 이우환을 상징하는 점과 선을 담는 그릇이 됐다.
이우환은 처음부터 화가의 길을 걷던 인물이 아니었다. 원래 문학을 전공하려 했으나 서울대 문리대에 갈 성적이 안 돼 "미대에 가도 문학을 할 수 있다"는 담임교사의 권유로 서울대 동양화과에 들어갔다. 그러나 입학한 그해 여름, 당시 미수교국이던 일본으로 밀항해 숙부 병문안을 갔다가 그대로 눌러앉아 니혼대(日本大) 철학과에 진학했고, 이후 평론가를 거치며 작가의 길로 이어졌다.
출발점이 화가보다 철학자에 가까웠던 만큼 그의 작품은 일반적인 회화와 결이 다르다. 대상을 정교하게 묘사하거나 화면을 가득 채우지 않는다. 점 몇 개, 선 몇 번으로 끝난 듯 보인다. 그래서 그림 보는 눈이 없는 사람에겐 "이게 그림이야! 나도 그리겠다"는 소리를 듣는다. 그러나 그의 관심이 사물, 존재, 공간의 관계에 있음을 알게 되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에겐 화면을 채우는 것보다 비워둔 여백이 더 중요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작품일수록 위작 논란이 따라붙는다. 겉으로 봐서 형식이 단순해 모방이 쉬운 탓이다. 2016년엔 경찰이 압수한 13점이 국과수 감정에서 모두 위작 판정을 받고 판매상과 위조범에게 중형이 선고됐다. 그러나 정작 이우환은 "모두 진품"이라고 맞섰다. 위조범이 혐의를 자백한 상황에서도 작가와 수사기관의 판단은 끝내 평행선을 달렸다. 현대미술 시장에서 '진짜'의 기준이 얼마나 복잡한지를 보여준 사례였다
김건희 국정농단 특검 수사 과정에서 이우환의 이름이 다시 등장했다. 김상민 전 검사가 1억4천만원 상당의 이우환의 작품 '점으로부터'를 매입해 김건희 여사에게 전달하고 국민의힘 공천을 청탁한 혐의를 받는 사건이다. 이 작품을 두고 미술품감정센터는 진품, 화랑협회는 위작이라는 상반된 감정 결과를 내놨으나, 최근 2심 재판부는 진품으로 판단했다.
비움과 절제의 철학을 말해온 작가의 이름이 권력의 음습한 거래 속에서 소비되고 있다. 예술의 섬 바다를 향한 '무한의 문'(2019.이우환 조각) 너머의 공백을 권력자들은 세속의 탐욕으로 채우려 드는 듯하다. 이우환의 침묵을 보며 10년 전과 세상이 과연 얼마나 달라졌는지 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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