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 기온이 부쩍 올라 연둣빛 숲이 짙어지는 5월 중순, 소백산 자락을 타고 쉼 없이 내려오는 물소리가 먼저 말을 건넨다. 코끝을 스치는 싱그러운 풀 냄새와 바위 틈을 흐르는 투명한 물줄기는 잠시 일상을 잊게 할 만큼 청량하다. 이곳은 조선 최고의 학자 퇴계 이황이 아홉 굽이 물길마다 이름을 붙여주며 각별히 아꼈던 경북 영주의 '죽계구곡'이다.
'구곡'이란 아홉 굽이로 꺾여 흐르는 아름다운 물길을 뜻한다. 신발 끈을 조여 매고 물길을 따라 걷다 보면, 소박한 암반과 맑은 물웅덩이가 번갈아 나타나며 수백 년 전 선비들이 느꼈던 풍류를 고스란히 전해준다. 걷는 내내 시원한 나무 그늘이 지붕이 되어주고 물소리가 길동무가 되어주는 이 길은, 그저 풍경을 보는 것을 넘어 지친 마음을 깨끗이 씻어내기에도 더할 나위 없다.
퇴계 이황이 이름 붙인 유서 깊은 물길
죽계구곡은 소백산 국망봉과 비로봉 사이에서 시작된 죽계천이 흐르며 만든 계곡이다. 이곳은 고려 시대 문신 안축이 고향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죽계별곡'의 배경이 된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후 조선 시대에 이르러 주세붕 군수가 '취한대'라는 이름을 지었고, 퇴계 이황이 아홉 굽이마다 이름을 붙이며 선비들의 유람지로 자리를 굳혔다.
이 물길은 단지 산속의 계곡을 넘어선 역사의 현장이다. 영주 순흥면 배점리 일대에 자리한 이 구간은 과거 선비들이 학문을 닦다 잠시 쉴 때 찾던 곳이었다. 계곡 양옆으로 우거진 나무들이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주어, 한여름에도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것이 눈에 띄는 부분이다. 선비들의 숨결이 닿은 바위와 물줄기는 오늘날에도 그 소박한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당시 선비들은 이곳을 거닐며 자연의 이치를 깨닫고 마음을 정화했다고 전해진다. 굽이마다 새겨진 글자와 전설은 이곳이 예부터 단순한 놀이터가 아닌, 정신을 수양하던 거룩한 장소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숲과 물이 어우러진 이 길을 걷다 보면 수백 년 전 학자들이 느꼈던 평온함을 오늘날의 우리도 똑같이 마주하게 된다.
아홉 굽이마다 펼쳐지는 바위와 폭포의 조화
약 2km에 걸쳐 이어지는 아홉 개 굽이에는 저마다 고유한 이름이 붙어 있다. 제1곡 취한대를 시작으로 제2곡 금성반석, 제3곡 백자담을 거쳐 제9곡 중봉합류까지 이어진다. 각 구역마다 바위의 모양과 물이 흐르는 소리가 달라져 걷는 내내 지루할 틈이 없다. 한 굽이를 돌 때마다 새로운 풍경이 나타나 탐방객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가장 눈여겨볼 지점은 제7곡 용추비폭과 제8곡 금당반석이다. 용추비폭은 물줄기가 수직으로 시원하게 쏟아지며 하얀 거품을 일으키는 폭포의 모습을 보여준다. 쏟아지는 물소리가 골짜기를 가득 채워 마음속까지 시원해지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이어지는 제8곡 금당반석은 넓고 평평한 바위 위로 맑은 물이 얕게 흘러가, 잠시 신발을 벗고 시원한 물에 발을 담그며 쉬어가기에 알맞다.
아홉 굽이의 끝에서 만나는 중봉합류는 두 갈래 물길이 하나로 합쳐지며 탐방의 마지막을 장식한다. 굽이마다 흐르는 물의 속도와 바위의 생김새가 달라서, 마치 아홉 점의 서로 다른 산수화를 감상하는 듯한 즐거움을 안겨준다. 거창하고 화려하지는 않지만,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한 바위들이 물길과 어우러져 빚어내는 풍경은 그 자체로 한 폭의 예술 작품이다.
초암사로 이어지는 3.3km 힐링 트레킹
죽계구곡을 제대로 즐기는 방법은 배점 주차장에서 출발해 초암사까지 걷는 '구곡길' 코스를 이용하는 것이다. 약 3.3km로 이루어진 이 길은 경사가 완만해 성인 걸음으로 편도 50분, 왕복 2시간 정도면 충분히 다녀올 수 있다. 길이 험하지 않고 정비가 잘 되어 있어 아이를 동반한 가족들이나 가벼운 산책을 원하는 이들에게도 좋다.
이 길은 소백산자락길 제1자락과도 연결되어 있어 숲의 기운을 느끼며 걷기에 알맞다. 발밑에 깔린 흙의 감촉과 머리 위를 덮은 나뭇잎 사이로 내리쬐는 햇살이 트레킹의 즐거움을 더해준다.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어느새 소백산 깊숙한 곳에 자리한 사찰인 초암사에 닿게 된다. 초암사는 죽계구곡 탐방의 종착점이자 소백산 산행의 시작점 역할을 겸하는 곳이다.
사찰의 조용한 분위기 속에 앉아 계곡 물소리를 듣고 있으면 일상의 시름이 씻겨 내려가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초암사 마당에서 바라보는 소백산의 능선은 계곡에서 보던 풍경과는 또 다른 웅장함을 보여준다. 계곡을 따라 오르며 가빠진 숨을 고르고, 산사의 고요함 속에서 명상을 즐기기에 이보다 더 좋은 장소는 찾기 어렵다.
선비촌·소수서원과 함께하는 영주 나들이
죽계구곡은 입장료나 정해진 쉬는 날이 없어 누구나 언제든 방문할 수 있다. 계곡 탐방을 마친 뒤에는 인근에 위치한 소수서원이나 선비촌, 소수박물관을 함께 둘러보는 일정을 추천한다. 이들은 차로 금방 이동할 수 있는 거리에 있어 영주의 선비 문화를 하루 만에 깊이 있게 경험해볼 수 있는 좋은 경로가 된다.
소수서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으로, 죽계구곡의 물길이 서원 앞을 지나 흐르기 때문에 두 장소는 역사적으로도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선비촌에서는 옛 가옥의 형태를 살펴보며 과거 사람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계곡에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즐겼다면, 서원과 선비촌에서는 그 자연 속에서 학문을 닦았던 사람들의 정신을 배워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
방문을 계획하고 있다면 출발 지점인 배점 주차장을 이용하는 것이 편리하다. 주차장 근처 안내소에서 지도를 챙겨 아홉 굽이의 이름을 하나씩 대조하며 걷는 것도 소소한 재미를 준다. 물빛이 가장 투명하고 숲의 연둣빛이 싱그러운 요즈음, 퇴계 이황이 사랑했던 그 비경 속으로 직접 들어가 보길 권한다. 선비들이 이곳에서 시를 멈추지 못했던 이유를 두 발로 직접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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