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4일, 서울 동대문 메가박스에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화위) 직원들을 대상으로 한 다큐멘터리 영화 '1980 사북' 시사회가 열렸다. 송상교 위원장을 포함해 50여명의 진화위 관계자들이 함께 한 이번 상영회는 단순히 영화관람을 넘어, 과거사 정리라는 막중한 국가적 임무를 수행하는 이들이 1980년 사북항쟁의 참혹한 실상을 정면으로 대면하고 그 속에 내재된 국가폭력의 본질을 성찰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였다.
산업 전사라는 찬사 뒤에 가려진 '죽음의 채굴'
영화는 눈 덮인 사북의 고요한 풍경으로 시작된다. 한때 동양 최대의 민영 탄광이던 동원탄좌가 위치했던 사북은, 지금은 국내 최대 카지노 시설인 강원랜드가 들어서있다. 1970년대 석탄은 국가 경제를 지탱하는 유일한 자국 에너지원이자 서민들의 난방을 책임지는 필수재였다. 정부는 '증산 보국'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광부들을 '산업 전사'라고 치켜세우며 채탄 현장으로 몰아넣었다. 그러나 그 화려한 경제 성장의 수치는 사실 광부들의 참혹한 희생으로 쌓아 올린 비극의 기록이었다.
당시 사북의 광부들은 마치 '전쟁을 치르듯' 열악한 갱도 안에서 석탄을 캐냈다. 영화가 제시한 통계에 따르면, 1970년 189명을 시작으로 1971년 174명, 1972년 166명, 1973년 229명, 1974년 223명, 1975년 222명, 1976년 217명, 1977년 183명, 1978년 153명, 1979년 221명 등 매년 200명 내외의 광부들이 크고 작은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국가 경제의 혈맥을 잇기 위해 매일같이 누군가의 생명이 담보되었던 셈이다.
오해와 분노가 불러온 사북사건
대한민국 노동운동사의 중대한 분수령인 '사북사건(사북항쟁)'은 1980년 4월 21일부터 24일까지 강원도 정선군 사북읍 동원탄좌에서 발생한 대규모 노동 항쟁이다. 당시 광부들은 살인적인 노동 강도와 저임금, 붕괴 사고의 위험이 도사린 위험한 노동 환경, 그리고 무엇보다 회사 측의 앞잡이 노릇을 하며 조합원의 권익을 외면하던 어용노조에 분노했다. 하지만 당시 광산업은 단순한 기업의 영역을 넘어 국가 기간산업이었기에, 작은 균열조차 국가 체제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되어 즉각적인 공권력 투입의 명분이 되었다.
사북항쟁의 도화선이 된 것은 어용노조에 항의하는 광부들을 감시하던 경찰이, 사찰행위가 발각되자 차를 몰고 달아나는 과정에서 앞을 가로막은 광부들에게 돌진해 치명상을 입힌 사건이었다. '경찰이 사람을 죽였다'는 소문이 일파만파 퍼져나갔고, 그간 억눌려왔던 광부들의 울분은 걷잡을 수 없는 폭발로 이어졌다. 약 6,000여 명의 광부와 가족들이 사북 시내를 점거하고 인간다운 삶과 민주적인 노조를 요구한 이 항쟁은 노동자의 생존권을 외친 정당한 투쟁이었지만 그 과정과 결과는 처참했다.
끌려간 광부와 가족들, 야만적인 국가폭력으로 한평생 상처 속에 살아
영화 '1980 사북'은 가해와 피해의 경계가 무너진 아비규환의 현장을 가감 없이 비춘다. 폭발한 분노는 때로 광기 어린 폭력으로 번졌다. 광부들 중 일부는 회사 측과 결탁했던 노조지부장의 부인을 끌어내 옷을 벗겨 전봇대에 매는 등 반인륜적인 가혹 행위를 저질렀다. 또한 흥분한 군중이 경찰에게 돌을 던져 광부의 아들들이기도 한 경찰관들이 크게 다치고 목숨을 잃는 비극도 발생했다. 평범한 이웃이었던 사람들이 거대한 갈등의 소용돌이 속에서 서로에게 짐승 같은 폭력을 가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더 큰 비극은 항쟁이 진정된 이후에 찾아왔다. 사태를 수습하겠다던 신군부는 약속을 어기고 관련자들을 대거 연행하며 무차별적인 보복을 시작했다. 계엄사령부 취조실로 끌려간 광부들은 '사람이 사람에게 할 수 없는' 체계적인 국가폭력을 마주해야 했다. 다리 사이에 각목을 끼운 채 꿇어앉힌 허벅지를 짓밟고, 코에 고춧가루 물을 들이붓고, 잠을 재우지 않고 구타하는 등 있지도 않은 배후세력(북과의 연결고리)을 불 때까지 잔혹한 가혹 행위가 반복되었다. 광부들은 이로 인한 후유증으로 변변한 곳에 취업도 못하고, 불구로, 환자로 평생을 상처속에 살았다.
고문은 광부에게만 국한되지 않았다. 부인들에게는 고문을 빙자해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운 가혹행위들이 가해졌다. 광부들의 폭력이 우발적이고 감정적이었다면, 국가의 폭력은 집요하고 구조적이었다. 영화 속 생존자들은 40여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취조실의 차가운 공기와 고문의 통증을 기억하며 몸서리친다. 국가라는 거대 기구가 개인의 인격을 말살하기 위해 얼마나 야만적으로 움직였는지를 목도하며, 관객들은 인간 존엄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국가와 기업이 외면한 빈자리…피해자들끼리 눈물겨운 화해
세월이 흘러 항쟁의 무대였던 동원탄좌는 2004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기업의 이름만 바뀌었을 뿐, 여전히 사업을 이어가며 부를 누리고 있다. 정작 사건의 발단을 제공하고 폭력을 방조했던 기업과 국가는 현재까지도 그 어떤 공식적인 사과나 책임 있는 자세를 보이지 않고 있다.
국가와 기업이 외면한 빈자리는 피해자들끼리의 눈물겨운 화해로 채워지고 있다. 항쟁의 주동자로 처벌받았던 이원갑 씨는 당시 광부들에게 수모를 당했던 노조지부장 이재기 씨의 부인에게 진심 어린 사과 편지를 보냈다. 또한, 영화를 관람한 당시의 경찰관은 "우리가 가장 큰 피해자라고 생각했는데, 광부들이 그토록 참혹한 고문을 당한 줄은 미처 몰랐다"며 오히려 광부들을 용서하고 손을 내밀었다. 거대한 폭력의 소용돌이 속에서 서로에게 상처를 입혔던 이들이, 정작 폭력의 설계자들은 숨어버린 세상에서 서로의 고통을 보듬으며 화해를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송상교 진화위 위원장 "국가 사과와 피해 회복, 명예 회복으로 나아가는 길 만들어야 "
영화 상영 후 이어진 Q&A 시간에서 송상교 진화위 3기 위원장은 무거운 소회를 밝혔다. 그는 "우리 진화위에서도 1기, 2기에서 이미 사북 사건을 다루었기 때문에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영화를 보니 많이 다르다. 제가 몰랐던 것들이 많이 있었구나 싶다"며 운을 뗐다. 이어 "진실을 알게 되는 것은 참 고통스럽고, 한편으로는 부끄러워지는 일"이라며 "여기 나오신 많은 분들이 저 얘기를 하시는 과정, 그 숨어 있는 세월을 온몸으로 느끼게 되어서 많이 고통스럽기도 하고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다"고 덧붙였다.
특히 송 위원장은 진화위의 역할을 강조하며 "기록을 남긴다는 것, 그리고 그 고통을 함께한다는 것. 이게 앞으로 우리 진화위 분들이 몇 년 동안 함께 해야 하는 일"이라고 직원들을 독려했다. 그는 "우리는 사안을 바라보는 객관적인 시각을 잃지 않으면서도, 이분들이 정말로 하기 어려웠던 얘기들을 통해 국가의 사과와 피해 회복, 명예 회복으로 나아가게 하는 그 길을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황인욱 정선지역사회연구소장 "국가 사과가 이 역사를 바로 세우는 출발점…멋진 사과보다 빠른 사과 원한다"
영화의 내레이션을 맡은 황인욱 정선지역사회연구소장 겸 제작자는 국가기관으로서 진화위가 수행해 온 기록과 규명의 중요성을 밝혔다. 황 소장은 "진화위의 2008년과 2024년 보고서가 사북 광부들에게 실질적으로 큰 힘이 되었다"면서도, 국가폭력이 개인의 삶을 넘어 공동체 전체에 남긴 깊은 상흔을 언급했다. 그는 "참혹한 고문을 당하고 억울한 옥살이를 한 분들 중에는 내 친구의 부모님도 있고, 그 고통은 여전히 대물림되고 있다"고 전했다.
특히 그는 사북의 광부들과 그 가족들이 '폭도'와 '빨갱이'라는 권위주의 시대의 올가미에 갇혀 평생을 사회적으로 매장당한 채 살아왔음을 상기시켰다. 황 소장은 "이들은 영웅적인 투쟁 서사를 가진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적 편견 속에 고립되어 왔다"고 지적했다. 이어 "제일 잘못한 국가가 먼저 나서서 사과해야 피해자들도 자책에서 벗어나고 서로를 용서할 수 있을 것"이라며, "국가의 사과가 이 역사를 바로 세우는 출발점"이라고 말했다. 그는 "피해자들은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다"며 "그들이 원하는 것은 멋진 사과보다 빠른 사과"라고 강조했다.
[폴리뉴스 김자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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