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왕과 사는 풍경> 은 1600만 관객을 모은 영화 '왕과 사는 남자'를 떠올리며 출발했다. 조선 왕릉은 우리 일상생활권에 있지만, 막상 선뜻 발걸음이 닿지 않는 곳이기도 하다. 왕릉을 낯선 유적으로만 두지 않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찾을 수 있는 장소로 다시 살펴보려 한다. [편집자주] 왕과>
[뉴스컬처 이상완 기자] 영화 '왕과 사는 남자'는 단종을 다시 불러낸 작품이다. 스크린은 왕위에서 밀려난 어린 임금 이홍위와 영월의 인물 엄흥도를 앞세운다. 기록의 빈틈에는 영화적 상상이 자리한다. 영월 장릉에 남은 단종의 시간은 영화보다 깊고, 기록보다 오래 아프다.
장릉(莊陵)은 조선 제6대 국왕 단종(端宗·1441년 8월 9일~1457년 11월 16일)의 능이다. 강원특별자치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에 있다. 조선왕릉 가운데 수도권 밖에 자리한 유일한 능이다. 단종이 영월에서 숨을 거둔 뒤 시신을 거두기 어려웠던 사정, 영월 호장 엄흥도의 암장, 숙종 대 복권 과정이 능의 위치와 성격을 결정했다. 처음부터 왕릉은 아니었다. 단종은 세조가 통치하던 대에 노산군으로 강등돼 죽음을 맞았다. 무덤도 능이 아닌 노산군묘로 불렸다. 1681년 숙종 7년에 노산대군으로 추봉됐고, 1698년 숙종 24년에 왕으로 신분이 회복됐다. 그때 묘호는 단종, 능호는 장릉으로 정해졌다. 폐위된 왕의 무덤은 긴 세월을 건너 조선왕릉의 이름을 되찾았다.
◇태어난 다음 날 어머니를 잃은 왕세손
단종의 휘는 홍위(弘暐)다. 1441년 세종 23년, 문종(文宗·1046년 6월 30일~1083년 9월 8일)과 현덕왕후 권씨(顯德王后 權氏·1418년 4월 26일~1441년 8월 19일)의 외아들로 경복궁 자선당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태어난 다음 날 어머니 현덕왕후가 세상을 떠났다. 어린 홍위는 세종의 후궁 혜빈 양씨 손에서 자랐다. 1448년 세종 30년에는 왕세손으로 책봉됐다. 조부 세종, 부친 문종으로 이어지는 왕위 계승 구도 안에서 홍위는 일찍부터 다음 세대를 대표하는 인물로 자리했다. 문종이 1450년 왕위에 오르자 홍위는 왕세자가 됐다. 그러나 문종의 재위는 길지 않았다. 1452년 문종이 세상을 떠나자 홍위는 열두 살 나이로 경복궁 근정문에서 왕위에 올랐다.
어린 왕에게는 정치를 대신 맡아줄 대비가 없었다. 왕실 안에서 수렴청정을 맡을 인물이 부재한 상황이었다. 김종서 등 고명대신들이 국정을 보좌했지만, 권력의 중심은 불안정했다. 세종과 문종이 다진 조선의 제도는 남아 있었으나, 열두 살 왕이 감당해야 할 궁궐의 정치는 냉혹했다. 단종의 즉위는 조선 왕위 계승의 정통성을 지닌 사건이었다. 하지만 나이는 어렸고, 왕권을 지켜줄 기반은 약했다. 숙부 수양대군은 이 빈틈을 파고들었다. 어린 임금의 시대는 즉위 직후부터 권력 투쟁의 그늘에 들어갔다.
◇계유정난과 상왕의 자리
1453년 단종 1년, 수양대군은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켰다. 명분은 흔들리는 왕권을 바로 세운다는 것이었다. 실제로는 조정의 핵심 권력을 장악하는 정변이었다. 김종서 등이 제거되면서 단종을 보좌하던 정치 기반은 무너졌다. 계유정난 뒤 수양대군의 힘은 급속히 커졌다. 어린 왕은 왕좌에 있었지만, 국정의 주도권은 이미 수양대군에게 이동했다. 조정은 새 권력 질서에 따라 재편됐다. 단종에게 남은 왕위는 형식에 가까워졌다.
1455년 단종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줬다. 수양대군은 조선 제7대 국왕 세조(世祖·1417년 11월 11일~1468년 10월 2일)가 됐다. 단종은 상왕으로 물러났다. 왕위에서 밀려난 뒤에도 단종의 존재는 정치적 위험으로 남았다. 세조에게 단종은 조카이자 전왕이었다. 반대로 세조 반대 세력에게 단종은 복위 명분의 중심이었다. 상왕의 자리는 안전한 피난처가 되지 못했다. 궁궐 안팎에서는 단종 복위를 꾀하는 움직임이 일었다. 세조 정권은 이를 강하게 다스렸다. 왕이었던 소년은 다시 권력의 한가운데로 소환됐다. 스스로의 의지와 무관하게 복위 운동의 이름으로 불렸다.
◇청령포 유배와 관풍헌의 마지막
1456년 세조 2년, 성삼문과 박팽년 등이 단종 복위 운동을 계획했다. 사전에 발각되면서 사육신 사건으로 번졌다. 이후 단종의 장인 송현수 등도 복위를 모의했으나 실패했다. 세조 정권은 단종을 더 이상 궁궐 안에 둘 수 없는 인물로 판단했다. 1457년 세조 3년,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됐다. 왕도 상왕도 아닌 신분으로 영월 청령포에 유배됐다. 청령포는 물길과 절벽으로 둘러싸인 곳이다. 외부와 단절된 지형은 유배지로는 탁월했다. 단종은 그곳에서 왕위도, 가족도, 정치적 보호막도 잃은 채 지냈다.
홍수로 강물이 불어나자 거처는 관풍헌으로 옮겨졌다. 같은 해 금성대군 등이 단종 복위 운동을 다시 시도했다. 실패의 여파는 곧장 영월의 단종에게 전했다. 단종은 열일곱 살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기록에는 노산군이 자결하자 예로 장례를 치렀다는 내용이 남아 있다. 그러나 전승과 후대 기록은 그 죽음 뒤 시신조차 쉽게 거두지 못한 현실을 전한다. 영월의 죽음은 단종 서사의 가장 깊은 지점이다. 왕으로 태어나 왕세손과 왕세자를 거쳐 왕위에 올랐던 인물은 노산군이라는 이름으로 생을 마쳤다. 장릉은 단절을 품은 능이다. 왕릉의 형식보다 앞서는 것은 폐위와 유배, 죽음, 암장의 시간이다.
◇엄흥도, 아무도 거두지 못한 시신을 묻다
단종이 죽은 뒤 영월 사람들은 시신을 거두는 일을 두려워했다. 정치적 후환을 피하기 어려운 분위기였다. 그때 영월 호장 엄흥도(嚴興道)가 단종의 시신을 몰래 거두었다고 전해진다. 엄흥도는 시신을 염습하고 재궁을 갖춰 동을지산 자락에 암장했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는 이 엄흥도를 전면에 세운다. 영화 속 엄흥도는 유배 온 왕을 가까이에서 살피는 인물로 그려진다. 단종과 엄흥도의 관계에는 창작이 섞인다. 그러나 단종 사후 시신을 수습한 인물로 엄흥도가 기억됐다는 사실은 장릉 서사의 핵심이다. 스크린이 우정과 연민을 그렸다면, 장릉은 충절과 수습의 기억을 품는다.
단종의 무덤은 한동안 왕릉의 대우를 받지 못했다. 노산군묘라는 이름으로 남았다. 1516년 중종 11년, 여러 증언을 거쳐 묘를 찾아 봉분을 갖췄다. 1580년 선조 13년에는 상석, 표석, 장명등, 망주석 등을 세웠다. 폐위된 왕의 무덤은 조금씩 제향과 석물의 형식을 갖추기 시작했다. 1698년 숙종 24년, 단종은 왕으로 복위됐다. 묘호는 단종, 능호는 장릉으로 정해졌다. 노산군묘는 장릉으로 승격됐다. 엄흥도에게는 공조판서가 추증됐다. 죽은 왕을 몰래 묻은 지역 인물의 이름도 뒤늦게 국가의 예우 안으로 들어왔다.
◇왕릉답지 않은 간소함, 장릉만의 구조
장릉의 능침은 일반적인 조선왕릉과 다르게 간소하다. 추존왕릉 제도에 따라 병풍석과 난간석, 무석인 등이 생략됐다. 봉분 주변에는 석양, 석호, 석마, 망주석, 장명등, 문석인 등이 배치됐다. 능침은 숙종 대 노산군묘에서 장릉으로 추봉된 뒤 현재 형식에 가깝게 정비됐다. 장릉의 공간 구성도 다른 왕릉과 다르다. 홍살문, 정자각, 능침이 일직선으로 이어지는 일반적 배치와 달리 지형에 따라 동선이 꺾인다. 향로와 어로도 한 번 꺾인 형태다. 능침은 가파른 언덕 위에 있고, 제향 공간은 서쪽 아래쪽에 조성됐다. 능침 앞 공간이 좁고 경사가 심했기 때문에 정자각과 주변 시설은 지형에 맞춰 배치됐다.
정자각, 비각, 수라간, 수복방, 재실 등 왕릉의 기본 시설도 갖춰졌다. 비각 안에는 ‘조선국 단종대왕 장릉’이라 새겨진 표석이 있다. 장릉은 왕릉의 체계를 갖추면서도 단종의 죽음과 암장, 추봉의 과정을 반영한 공간이다. 왕릉의 격식보다 지형과 역사적 사정이 드러난다. 특별한 시설도 많다. 장릉 입구에는 단종의 생애와 행적을 소개하는 단종역사관이 있다. 노산군묘를 찾아 제사를 올린 영월군수 박충원의 뜻을 기린 낙촌비각도 있다. 단종의 시신을 거둬 묘를 만든 엄흥도를 기리는 정려각도 장릉에서 빠질 수 없는 공간이다.
◇장판옥과 배식단, 충절의 이름을 모신 공간
장릉을 다른 조선왕릉과 구분하는 대표 시설은 장판옥과 배식단이다. 장판옥은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종친, 충신, 환관, 궁녀, 노비 등 268명의 위패를 모신 건물이다. 1791년 정조의 어명으로 조성됐다. 신분과 공적에 따라 이름을 구분해 모셨다는 점에서 장릉의 성격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배식단은 이들에게 제향을 올리는 공간이다. 단종의 죽음은 왕 한 사람의 비극으로 끝나지 않았다. 사육신, 종친, 궁녀, 지역 인물, 이름 없는 충절의 기억까지 장릉 안으로 들어왔다. 장판옥과 배식단은 기억을 제도화한 공간이다.
장릉에 무인석이 없다는 점도 자주 언급된다. 단종이 무력으로 왕위를 빼앗겼기 때문에 무인석을 세우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퍼졌지만, 석물의 수량과 제도적 기준에 따른 조성으로 보는 설명이 타당하다. 장릉의 간소함은 단종이 처음부터 왕릉의 예우를 받은 인물이 아니었다는 점에 있다. 장릉은 엄흥도 정려각, 낙촌비각, 장판옥, 배식단이 하나의 서사를 만든다. 단종이 죽은 뒤 시신을 거둔 사람, 무덤을 찾은 사람, 복위를 위해 죽은 사람, 뒤늦게 왕의 이름을 회복시킨 제도까지 장릉 안에 모였다.
◇노산군에서 단종으로, 장릉이 되찾은 이름
단종의 이름은 숙종 대에 회복됐다. 1681년 노산대군으로 추봉됐고, 1698년 왕으로 복위됐다. 종묘에는 신주가 모셔졌다. 영월의 무덤은 장릉이라는 능호를 받았다. 세상을 떠난 지 241년 만에 왕의 이름과 제향의 자리를 되찾은 것이다. 장릉은 1970년 사적으로 지정됐다. 2009년 조선왕릉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면서 세계유산의 일부가 됐다. 수도권 밖에 있는 유일한 조선왕릉이라는 점도 장릉의 위치를 특별하게 한다. 조선왕릉의 원칙에서 벗어난 자리에 있는 능이지만, 예외성은 단종의 삶과 죽음에서 비롯됐다.
최근에는 단종과 정순왕후의 사연을 잇는 화단도 조성됐다. 남양주 사릉에서 가져온 들꽃을 영월 장릉에 심어 두 사람의 기억을 꽃으로 연결했다. 정순왕후가 생계를 위해 옷감을 물들이며 살았다는 자주동샘 이야기에 따라 보라색 꽃이 중심을 이룬다. 진달래, 벌개미취, 비비추, 층꽃, 쑥부쟁이, 맥문동, 구절초가 계절을 따라 피며 단종과 정순왕후의 긴 이별을 되새기게 한다.
뉴스컬처 이상완 prizewan2@nc.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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