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사에서 '진보 정권'과 '노동 위기'의 만남은 언제나 거대한 딜레마이자 시험대였다.
그리고 지금, 이재명 정부는 '삼성전자 총파업에 따른 100조 원대 경제 손실 우려'라는 전례 없는 초대형 시험대 위에 서 있다.
반도체가 한국 수출의 약 38%를 차지하는 현실에서 삼성의 생산 차질은 국가 경제의 근간을 흔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정부가 진보 정권의 노동 정체성과 국가 기능 유지라는 양자택일의 늪에서 머뭇거릴 시간은 없다. 위기 속에서 사회적 대타협을 이끌어내거나 공권력과 대화 사이의 정교한 줄타기를 감행했던 과거의 유산 속에서, 현 정부가 가야 할 '지혜로운 개입'의 길을 찾아야 할 때다.
#풍경1; 1998년 IMF를 넘은 대가, 정리해고를 선택한 노사정협의체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 당시 한국 사회는 단순한 경기침체를 겪은 것이 아니었다. 나라 전체가 무너질 수 있다는 공포가 현실이 되었던 시기였다. 외환보유고는 바닥났고, 대기업들은 연쇄적으로 쓰러졌으며, 금융기관은 부실로 붕괴 직전에 몰렸다. 오늘날 세대에게는 다소 추상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당시에는 실제로 "대한민국 부도"라는 말이 거리와 언론을 뒤덮고 있었다.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출범한 정부가 바로 김대중 정부였다. 그리고 그 정부가 선택한 가장 고통스러운 처방 가운데 하나가 정리해고 제도의 도입이었다.
그 시절 한국 경제는 이미 한계에 도달해 있었다. 재벌들은 과잉차입으로 몸집을 불렸고, 금융기관은 부실대출을 반복했으며, 정부와 기업 사이의 비효율적 유착은 경제 전체를 흔들고 있었다. 무엇보다 기업이 위기에 빠져도 인력 구조조정을 거의 하지 못하는 경직된 노동시장 구조는 국제 금융시장에서 한국 경제의 취약점으로 지목되었다.
결국 정부는 국제통화기금 관리체제 속에서 노동시장 유연화를 받아들였다. 1998년 노사정 대타협은 그 상징적 장면이었다. 노동계는 정리해고제와 파견근로 확대를 수용했고, 정부는 대신 실업급여 확대와 사회안전망 강화를 약속했다. 당시로서는 국가 경제를 살리기 위한 일종의 비상협정에 가까웠다.
결과만 놓고 보면 구조조정은 강력했고, 또 효과적이었다. 부실기업과 금융기관은 정리되었고, 기업 재무구조는 개선되었다. 한국은 예상보다 빠르게 외환위기를 벗어났으며 국제사회는 한국의 위기 대응 능력을 높게 평가했다. 이후 IT 산업 성장과 수출 호황까지 겹치며 한국 경제는 재도약의 기반을 마련했다. 많은 경제학자들이 "한국은 IMF 위기를 비교적 성공적으로 극복한 국가"라고 평가하는 이유다.
#풍경2; "대통령 취임 열흘 만의 물류 마비"…노무현 정부를 덮친 첫 시험대는 대우차 사태에서도 이어져
2003년 봄, 새로 출범한 노무현 정부 앞에 가장 먼저 닥친 것은 개혁 입법도, 정치개혁도 아니었다. 전국 물류를 멈춰 세운 화물연대 파업이었다.
부산항 컨테이너 야적장은 순식간에 가득 찼고, 공장 출하는 멈췄다. 수출 물량은 항구에 묶였고, 산업계는 하루 수천억 원의 피해를 주장했다. 언론은 "국가 물류동맥이 막혔다"고 표현했다. 대통령 취임 불과 열흘 남짓 지난 시점이었다.
당시 상황은 단순한 노사분규가 아니었다.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 이후 급격히 재편된 한국 노동시장의 균열이 한꺼번에 터져 나온 사건에 가까웠다.
노무현 대통령은 민주화 운동과 노동 인권 변호사 출신이라는 상징성이 강했다. 노동계는 "우리 편 정부"라는 기대를 가졌고, 재계와 보수언론은 "노동계에 끌려다닐 것"이라고 경계했다. 출범 직후 터진 화물연대 파업은 그 시험무대였다.
초기 정부는 비교적 대화 중심 접근을 시도했다. 강경 진압보다는 협상을 우선했고, 건설교통부와 노동부가 중재에 나섰다. 결국 정부는 운송료 현실화 논의, 과적 문제 개선, 제도개선 협의체 구성 등을 약속하며 사태를 수습했다.
하지만 동시에 정부는 국가 물류 마비를 장기화할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협상과 병행해 경찰력 투입 가능성을 압박했고, 업무복귀 명령과 사법처리 방침도 거론됐다. 즉 "대화 우선"과 "국가 기능 유지" 사이에서 줄타기를 한 셈이다.
이 사건은 이후 노무현 정부 노동정책의 예고편처럼 평가된다. 노동의 구조적 현실에는 공감했지만, 집권 이후 정부는 시장과 국가 운영의 현실 역시 외면할 수 없었다.
그 딜레마는 같은 시기 대우자동차 문제에서도 반복된다.
외환위기 이후 붕괴한 대우그룹의 핵심 계열사였던 대우자동차는 대규모 구조조정과 해외매각 과정에 들어갔다. 수천 명 감원 문제가 발생했고 노동조합은 강하게 반발했다. 특히 부평공장과 창원공장에서는 장기 농성과 경찰 투입이 이어졌다.
노무현 정부는 한편으로는 해외 투자 유치와 기업 정상화를 추진해야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리해고에 반발하는 노동계와도 충돌해야 했다. 결국 정부는 공권력을 동원해 농성을 해산시키는 한편, 일부 고용보장과 보상책 협의를 병행했다.
◇삼성전자는 이제 한국경제의 심장이자 글로벌 공급망의 중심, 파업만은 막아야
삼성전자는 한국 경제의 심장이다. 반도체와 스마트폰, 디스플레이 등 핵심 산업을 이끌며 국가 수출의 20% 이상을 책임지고 있다. 따라서 삼성전자 노조의 파업은 단순한 기업 내부 갈등이 아니라 국가 경제 전체를 뒤흔드는 사건이다. 긴급조정권 발동 논의가 나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삼성 반도체와 스마트폰은 글로벌 공급망의 핵심이다. 파업으로 생산이 멈추면 세계 시장에서 한국의 신뢰도가 흔들리고, 이는 곧바로 수출 감소로 이어진다. 삼성전자는 코스피 시가총액의 20% 이상을 차지한다. 파업 장기화는 주가 급락과 외국인 투자자 이탈을 불러와 금융시장 전반의 불안을 증폭시킨다.
삼성의 부품·서비스 협력업체 수만 개가 연계되어 있다. 생산 차질은 곧바로 중소기업과 지역경제에 연쇄적인 피해를 낳는다. IMF 위기 당시 "대한민국 부도"라는 말이 떠돌았듯, 삼성 파업이 장기화되면 한국 경제의 안정성에 대한 국제적 신뢰가 흔들릴 수 있다.
김대중 정부는 IMF 위기 속에서 정리해고제를 도입하며 사회적 합의를 통해 위기를 극복했다. 노무현 정부는 화물연대 파업에서 대화와 공권력 사이의 줄타기를 하며 국가 기능을 지켜냈다. 두 사례 모두 정부가 단순한 중재자가 아니라 국가 경제와 사회적 균형을 동시에 책임지는 주체였음을 보여준다.
김용범 청와대 정책실장이 초과 세수 등을 활용하는 '국민 배당금'을 제안했다가 큰 논란에 휩싸였는데 '국민 배당금'과 같은 초과 세수 또는 이익의 공유 아이디어 역시, 결국 삼성전자라는 국가 경제의 심장이 안정적으로 작동한다는 전제 위에서만 성립할 수 있는 담론이다. 심장이 멈추면 분배를 논할 피도 돌지 않기 때문이다.
로이터, 블룸버그, 닛케이아시아 등 주요 외신은 삼성전자 노조의 평택 집회와 파업 가능성을 비중 있게 다루며 사태 전개를 예의주시하고 있는데 파업이 곧바로 글로벌 공급망 리스크로 확대될 가능성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로이터는 "노조 파업으로 생산에 차질을 빚을 경우 AI 데이터 센터와 자동차, 스마트폰 등 전 산업 분야에서 공급 병목 현상이 심화할 것이다"고 경고하고 글로벌 공급망 전반에 미칠 파장을 예의 주시하는 기사를 내보냈다.
삼성전자 영업이익 규모는 월평균 약 30조 원인데 18일간 파업 시 손실 규모를 단순하게 추정해도 총 20~30조 원에 달한다. 총파업 직간접 손실을 감안했을 경우 삼성전자 측은 손실규모가 최대 100조 원에 이를 수 있다고 추산했다.
삼성전자는 세계 최대 메모리 반도체 공급업체로, AI 데이터센터·스마트폰·자동차·서버 등 핵심 산업에 부품을 공급하고 있다. 파업으로 생산 차질이 발생하면 AI 반도체 공급 병목 심화, 글로벌 IT 산업 전반에 납기 지연과 가격 변동 초래는 불가피해질 것이다.
반도체가 한국 총수출의 약 38%를 차지하는 현실에서 삼성전자의 위기는 곧 국가 성장 동력의 붕괴를 의미한다. 사태가 장기화될 경우 한국 GDP 성장률이 최대 1%p까지 하락할 수 있다는 업계의 경고는 결코 과장이 아니다.
파업은 노동자 권리를 위한 불가피한 선택일 수 있지만 파업이 반복될 경우 국가경제는 물론 해당 기업은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는다. 이미 그와 같은 사례는 수없이 발견되고 있다.
2023년 UAW(전미자동차노조) 파업으로 GM·포드 등은 각각 11억~13억 달러의 손실을 보고 시가총액은 무려 20%나 폭락했다. 보잉사 역시 2024년 3만 명 파업으로 60억 달러 손실은 물론 주가는 30% 이상 하락했다.
◇이재명 정부의 '유능한 중재'와 긴급조정권 발동 역시 적극 검토해야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정부의 위기감도 최고조에 달했다.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삼성전자 노조가 예고한 대로 오는 21일 총파업에 돌입할 경우 법이 허용한 최후의 보루인 '긴급조정권' 발동이 불가피하다고 밝혔다. 김영훈 고용노동부 장관 역시 "노동자 없는 기업 없고, 회사 망하라고 설립된 노조 없다"며 노사 모두의 파국을 경고하고 나섰다.
긴급조정권(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제76조)은 쟁의행위가 국민경제를 현저히 해할 우려가 있을 때 고용노동부 장관이 발동할 수 있는 예외적 조정 절차다. 발동 시 30일간 모든 쟁의행위가 중단되며 중노위가 직권 조정에 착수한다. 이는 노동권에 대한 일방적 억압이 아니라, 파국으로 치닫는 열차를 잠시 멈춰 세우고 공존의 해법을 찾기 위한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 수단이다.
이제 이재명 정부에게 필요한 것은 방관자적 중재가 아니다. 노동의 가치를 존중하되 국가 경제라는 거대한 실익을 위해 노사 양측을 협상 테이블로 강하게 끌어당기는 유능한 중재자의 모습이다. 긴급조정권이라는 최후의 카드가 '경제 살리기'라는 대의 아래 당당히 논의할 수 있을 때, 이재명 정부는 과거 진보 정권이 보여준 '위기에 강한 정부'의 계보를 잇게 될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대우차 문제 등으로 노사문제가 혼돈에 빠졌을 때 기자회견에서 이같이 복잡한 속내를 토로했었다.
"민주주의는 대화와 타협이 기본입니다. 하지만 그 밑바탕에는 '법과 원칙'이 있어야 합니다. 원칙 없는 타협은 굴복이고, 대화 없는 법 집행은 독재입니다. 정부는 끝까지 대화하겠지만, 끝내 합의에 이르지 못해 국가 경제가 파탄 날 지경에 이른다면 정부는 해야 할 일을 할 것입니다."
이용웅 주필 / 경제를 읽는 맑은 창 - 비즈니스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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