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한스경제 김창수 기자 | 인공지능(AI) 확산이 국내 전력시장 지형도를 바꾸고 있다. 과거 전력수요가 경기 흐름과 제조업 가동률에 좌우됐다면 지금은 데이터센터와 반도체 클러스터가 수요 증가 축으로 떠오르는 모습이다. 첨단산업 투자, 데이터센터 증설, 산업부문 전기화가 맞물리며 전력 산업 경쟁력을 좌우하는 핵심 인프라로 재평가받고 있다.
▲ AI 데이터센터 확장·반도체, 산업 축 변화 ‘태풍의 눈’으로
최근의 이와 같은 변화 출발점은 AI 데이터센터에 있다. 국내 상업용 데이터센터는 네트워크 접근성과 고객 수요를 이유로 서울·수도권에 집중돼 왔다. 그러나 생성형 AI와 클라우드 서비스가 확산되며 전력 소모 규모 자체가 달라지고 있다.
과거 10~40MW급 데이터센터가 일반적이었다면 최근 주요 기업이 추진하는 AI 데이터센터는 100MW 안팎으로 규모가 커졌다. SK그룹은 울산, 현대차그룹은 새만금, 네이버는 세종, 삼성SDS는 구미·구리 등에서 대규모 연산 인프라 구축을 추진 중이다.
한국전력에 따르면 전력계통영향평가를 신청한 데이터센터 사업은 올해 3월 기준 33GW에 달하나 실제 인허가를 통과한 물량은 3.1GW 수준에 그쳤다. 전력망 수용 능력과 부지, 주민수용성, 계통 보강 조건이 사업 속도를 제약하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반도체 산업은 전력수요 증가를 견인하는 또 다른 축이다. AI 서버 확산으로 고대역폭메모리(HBM)와 첨단 메모리 수요가 급증하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평택·청주·용인 등을 중심으로 생산능력 확대에 속도를 내고 있다.
첨단 공정은 기존 제조업보다 전력 의존도가 훨씬 높다. 극자외선(EUV) 장비는 기존 심자외선(DUV) 장비보다 전력 사용량이 압도적으로 높다.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의 경우 국가산단과 일반산단을 합쳐 약 15GW 전력수요가 예상된다. 이는 2025년 국내 최대전력의 15% 수준이다. 해당 지역 기존 공급 여력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워 신규 LNG 발전소와 송전선로 건설이 병행돼야 하는 구조다.
문제는 수요 증가 속도에 비해 공급 체계 전환이 어렵다는 점이다. 정부는 재생에너지 확대를 에너지전환 핵심 축으로 삼고 있지만 AI 데이터센터와 반도체 공장은 24시간 안정적인 전력이 필요하다.
태양광·풍력은 간헐성과 지역 편중 문제가 있어 단독으로 대규모 신규 수요를 떠받치기 어렵다. 호남·충청권 재생에너지를 수도권과 첨단산업단지로 보내기 위해서는 송전망 확충이 필수지만 송전선로와 변전소 건설은 인허가와 주민수용성 문제로 지연 가능성이 크다. 정부가 99개 송전선로·변전소 사업을 국가기간 전력망으로 지정하고 패스트트랙을 추진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기저전원과 유연성 전원 역할도 다시 부각되고 있다. 원전은 계속운전과 신규 건설을 통해 활용도를 높이는 방향으로 정책 기조가 이동하고 있다. 반면 석탄발전은 단기 수급 안정 차원에서 일부 활용될 수 있지만 중장기적으로는 감축과 폐쇄 흐름을 피하기 어렵다.
LNG 발전은 재생에너지 변동성을 보완하는 유연성 전원으로 필요성이 커지고 있으나 신규 공급은 대체로 노후 석탄 폐지분 대체 수준에 머물 가능성이 높다. 전력수요는 빠르게 늘지만 발전원별 공급 확대는 정책·환경·입지 제약을 동시에 받는 셈이다.
이같은 환경은 기업의 입지 전략도 바꾸고 있다. 과거 데이터센터와 공장은 고객 접근성, 물류, 인력 확보를 우선 고려했으나 이제는 전력 확보 가능성이 입지 결정 선결 조건으로 떠올랐다.
서울 도심 전력망 포화가 이어지며 상업용 데이터센터는 안산, 하남, 부천 등 수도권 외곽으로 이동하고 있다. 자체 AI 연산 인프라는 울산, 새만금, 세종 등 비수도권으로 확산되는 흐름이다.
▲ HD현대일렉트릭·LS일렉트릭 등 직접적 수혜 기대
분산에너지특별법 시행 이후 일부 지역에서 직접 전력거래 기반이 마련된 점도 수요 분산을 뒷받침한다. 대규모 전력 소비 기업이 한전 계통에만 의존하지 않고 자가발전이나 직접 조달 방식을 검토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전력시장 패러다임 변화는 발전사보다 전력 인프라 기업에 더 직접적 기회가 될 수 있다. 국내 전력시장은 규제 기반 시장이라 수요 증가가 곧바로 민자발전사 마진 확대로 이어지기는 어렵다. SMP와 용량요금, 정산제도 등 정부 통제 변수가 커서다.
국내에서는 HD현대일렉트릭, LS일렉트릭, LS전선, 효성중공업 등 전력 인프라 기업들이 데이터센터 확장 흐름 영향권에 있다. 특히 변압기와 차단기, 배전 솔루션은 발전소 건설보다 투자 회수 기간이 짧고 수요처가 다양해 전력시장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AI 시대 수혜를 반도체와 서버 장비에만 국한해 볼 수 없는 이유다.
업계 관계자는 “AI와 첨단 제조업이 성장할수록 전력은 기업 투자와 지역 개발, 에너지 정책에 영향을 미치는 전략 자산으로 바뀌고 있다”며 “향후 산업 경쟁력은 반도체와 데이터센터를 돌릴 전기를 얼마나 안정적으로 확보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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