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뉴스투데이 김재한 항공·방산 전문기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K방산이 글로벌 시장에서 존재감을 키우고 있다. 그러나 실제 방산 수출 시장에서는 가격과 납기, 성능 외에도 동맹 구조와 자국 우선주의 같은 정치·제도 변수가 적지 않은 영향력을 미친다는 분석이 나온다.
◇ 유럽 재무장 속 강해지는 ‘자국 우선’
13일 로이터 등 주요 외신에 따르면, 최근 유럽 재무장과 동시에 유럽 내 방위산업 육성 움직임이 강화되고 있다. EU(유럽연합) 집행위원회는 지난 2024년 3월 유럽방위산업전략(EDIS)과 유럽방산프로그램(EDIP)을 발표하며 유럽 내 공동 조달과 공급망 강화를 공식화했다.
EU의 SAFE(Security Action for Europe) 프로그램도 같은 흐름으로 평가된다. EU 집행위에 따르면 SAFE는 공동 조달과 방산 투자 확대를 지원하는 제도로, 유럽 공급망 활용 비중을 높이는 방향으로 설계됐다. 지난 8일, SAFE 프로그램을 활용해 437억유로 규모의 대출 계약을 체결한 폴란드가 첫 회원국이 됐다.
유럽 내부에서는 소위 ‘바이 유러피언(Buy European)’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프랑스는 지난해 EDIP 협상 과정에서 미국 등 유럽 외 국가의 무기 의존도를 줄이는 방향을 요구했다. 유럽 업체 중심의 공동개발 구조로 추진되는 유럽 공동 방공·전자전 사업이 이러한 움직임이 반영된 사례다.
북대서양조약기구 나토(NATO)도 공동 조달과 공동 생산 확대에 속도를 내고 있다. 나토는 지난해 갱신한 ‘방위생산 행동계획(Defence Production Action Plan)’을 통해 회원국 간 공동 조달과 공급망 협력 강화를 추진하고 있다. 이에 따라 유럽 재무장은 단순 무기 구매 확대를 넘어 유럽 내 생산과 공급망 강화를 함께 추진하는 방향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다만 나토 내부에서는 EU의 유럽 우선 정책을 둘러싼 쟁점도 있다. 마르크 뤼터 나토 사무총장은 지난해 1월 13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유럽의회 외교·안보위원회에서 미국·영국·튀르키예 등 나토 동맹국이지만, EU 비회원 국가의 업체까지 배제하는 방식으로 EU 방산정책이 추진돼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EU의 안보·산업 결속 강화 움직임도 빨라지고 있다. EU 집행위는 지난 2월 ‘러시아·벨라루스·우크라이나 접경 동부지역에 관한 커뮤니케이션’을 발표하고, 폴란드 등 동부 회원국을 중심으로 안보·산업·공급망·인프라 역량 강화를 추진하겠다는 방향을 제시했다.
이와 관련 국가안보전략연구원(INSS)은 ‘EU 2030 방위전략 전환의 특징과 시사점’ 보고서에서 EU의 유럽 내 조달·공급망 강화 움직임이 한국 등 EU 외부 방산업체에는 새로운 경쟁 변수로 작용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 미국 시장 진출 가로막는 정치 장벽
미국 시장은 또 다른 변수로 꼽힌다. 미국은 세계 최대 방산시장인 동시에 자국 산업 보호와 기술 통제를 강하게 유지하는 국가 가운데 하나다. 그중 미 해군 함정의 해외 건조를 제한하는 반스·톨레프슨 수정법(Byrnes-Tollefson Amendment)과 미국 내 해상 운송에 미국 건조·미국 소유 선박을 요구하는 존스법(Jones Act), 그리고 방산시장을 상호개방하는 협정인 국방상호조달협정(RDP-A) 등이 한국 방산업체의 미국 방산시장 접근성을 낮추는 요인으로 거론된다.
이들 제도는 단순 산업 정책을 넘어 미국 내 일자리와 공급망, 국가안보 문제와 연결돼 있다는 점에서 정치적 민감성이 크다는 평가다. 미국 의회와 노동계가 자국 조선·방산 산업 보호 필요성을 지속적으로 강조해온 것도 같은 맥락으로 해석된다.
현재 국내 조선·방산업계에서 미 해군 MRO(유지·보수·정비) 시장과 함정 협력 확대 기대감이 커지고 있지만, 미국 내 관련 법과 제도를 완화하는 문제는 정치권과 산업계 이해관계가 얽혀 있어 해결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적지 않다.
국제전략문제연구소가 지난해 12월 발표한 ‘부상하는 방산 수출국 한국(South Korea as a Rising Defence Exporter)’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은 핵심 군사 기술 이전과 방산 공급망 문제에서 여전히 신중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지난 2015년 한국형 전투기(KF-X) 사업과 관련한 AESA(능동전자주사배열) 레이더 등 주요 기술 이전 요청도 승인하지 않았다.
이런 사례는 방산 수출이 단순히 판매국과 구매국 사이의 계약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준다. 핵심 부품과 기술의 원천국, 동맹 관계, 수출통제 규정이 함께 작동한다는 의미다. 특히 고성능 레이더와 미사일, 항공전자, 통신·데이터링크 같은 분야는 수출 승인과 기술보호 문제가 계약 구조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는 평가가 많다. 이 때문에 미국 방산시장 역시 단순 성능 경쟁력만으로 진입하기 어려운 구조가 굳어지고 있다는 지적이 이어진다.
◇ 방산도 결국 ‘정치 산업’
카네기국제평화재단은 지난 2월 공개한 보고서에서 한국이 유럽에서 방산 입지를 확대하기 위해서는 단순 공급국을 넘어 장기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안보 파트너로 인식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분석했다.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역시 한국 방산기업이 유럽 시장에서 역할을 확대할수록 현지 생산과 공동 연구개발, 장기 유지·보수 체계 구축 중요성이 커질 것으로 전망했다.
국내 방산업계에서도 K방산 경쟁 기준이 점차 달라지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과거에는 가격 경쟁력과 빠른 납기가 핵심이었다면, 앞으로는 현지 생산과 공급망 안정성, 정치·외교적 신뢰까지 함께 요구되는 방향으로 시장 구조가 바뀌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향후 방산 수출은 현지 생산과 공급망 협력, 안보협력까지 포함한 종합 경쟁으로 확대될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Copyright ⓒ 이뉴스투데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본 콘텐츠는 뉴스픽 파트너스에서 공유된 콘텐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