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가 인하 압박과 자본시장 경색, 글로벌 지정학 리스크까지 겹치면서 국내 제약사들이 외형 확장보다 내실 다지기에 무게를 싣고 있다. 최근 업계에선 흩어져 있던 조직과 자산을 다시 묶고, 연구개발(R&D)과 상업화 역량을 한 축으로 재배치하는 움직임이 뚜렷해졌다. 시장 불확실성이 커질수록 한정된 자원을 선택과 집중 방식으로 투입해 생존력과 성장성을 동시에 확보하겠다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12일 제약업계에 따르면 정부의 약가 인하 기조가 이어지며 제네릭(복제약) 중심 업체들의 채산성 우려가 커졌고, 증시 침체와 투자심리 위축으로 바이오·제약 기업의 자금 조달 환경도 예전보다 까다로워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수익성과 투자 여건이 동시에 흔들리는 이중 압박에 직면한 것이다. 여기에 중동 정세 불안으로 원료의약품과 완제의약품 공급망 차질 우려까지 제기되면서 기업들은 비용 통제와 조직 효율화에 한층 속도를 내고 있다.
이 같은 환경 변화 속에 제약사들은 단순한 감량 경영보다 핵심 파이프라인 중심의 조직 재편을 선택하고 있다. 비핵심 사업이나 중복 기능은 과감히 덜어내되, 미래 먹거리로 꼽히는 신약 후보물질과 글로벌 사업 조직은 오히려 전진 배치하는 방식이다.
가장 눈에 띄는 곳은 한미약품이다. 한미약품은 이달 조직 개편을 단행하고 '혁신·지속·미래·성장'의 4개 부문 통합 체제로 운영에 들어갔다. 새 수장인 황상연 대표 체제 아래 글로벌 제약·바이오 시장 변화에 기민하게 대응하고 사업 목표 달성 속도를 높이기 위한 조치로, 혁신성장부문에 비만 치료제를 비롯한 핵심 과제의 상업화 조직을 통합 배치한 것이 주목된다. 연구 단계와 사업화 단계를 따로 떼어 놓기보다 개발과 허가, 생산, 시장 진입 전략을 한 몸처럼 움직이게 하겠다는 전략으로 보인다.
한미약품의 이번 개편은 단순한 인사 조정이 아니라 수익화 가능성이 높은 파이프라인에 무게중심을 재설정한 데 의미가 있다. 비만 치료제는 글로벌 빅파마들까지 경쟁이 치열한 분야인 만큼, 연구 인력만으로는 승부가 어렵고 임상 전략과 파트너링, 상업화 준비를 한꺼번에 엮는 실행력이 중요하다. 결국 조직을 기능별로 쪼개기보다 과제 중심으로 재배열해 의사결정 속도를 끌어올리는 것이 핵심이라는 분석이다.
일동제약도 사업 구조 손질에 속도를 내고 있다. 일동제약은 비용 효율화와 R&D 조직 재통합, 컨슈머헬스케어 강화라는 세 갈래 전략을 동시에 추진하고 있다. 기존 연구개발 조직을 다시 묶어 중복 투자를 줄이고, 일반의약품과 건강 관련 소비재 부문을 키워 현금흐름 안정성을 높이려는 구상이다. 최근 흑자 전환 흐름 속에서도 비용 구조를 단순화하고, 신약 개발과 생활건강 사업 간 균형을 다시 맞추는 데 집중하고 있다.
HK이노엔은 후속 성장동력 확보를 위한 조직 재정비에 들어갔다. HK이노엔은 최근 신약연구소장에 박병철 연구소장을 선임하며 연구 리더십을 교체했다. 자체 개발 위식도역류질환 신약 '케이캡'이 국내외에서 성과를 내고 있는 상황에서 이른바 '포스트 케이캡'을 찾기 위한 후속 파이프라인 발굴과 연구 조직 정비에 속도를 내는 모습이다. 연구소장 교체와 조직 정비는 결국 케이캡 이후를 준비하는 선제 조치라는 점에서 최근 제약업계의 R&D 중심 체질 개선 흐름과 맞닿아 있다.
업계 관계자는 "최근 제약업계의 조직 재편은 단기 불황 대응을 넘어 '잘하는 분야에 더 세게 베팅하는' 구조 전환이 주목된다"며 "약가 인하, 공급망 불안, 투자 위축이라는 삼중 악재 속에서도 R&D를 핵심축으로 놓되 사업화 가능성이 높은 분야에 인력과 자본을 집중하는 기업이 상대적으로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을 것"이라고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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