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올해 1분기 실질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세계 주요국 중 최상위권에 속한 것으로 나타났다. AI 툴로 만든 사진.
수치부터 들여다보면 격차가 얼마나 큰지 드러난다. 1분기에 1% 이상 성장한 나라는 전 세계에서 한국과 인도네시아(1.367%), 중국(1.3%) 세 나라뿐이었다. 4위인 핀란드(0.861%)와도 0.8%포인트 이상 차이가 났다. 미국(0.494%)과 독일(0.334%)은 0%대에 머물렀다. 프랑스(-0.005%), 스웨덴(-0.21%), 멕시코(-0.8%)는 역성장했고, 아일랜드는 1분기에만 2.014% 뒷걸음쳤다.
불과 한 분기 전까지만 해도 한국의 처지는 정반대였다. 지난해 4분기 성장률은 -0.161%로, 한은 통계에 포함된 주요 41개국 중 38위였다. 이 극적인 순위 역전을 가능케 한 것이 반도체다.
부산항 신선대부두와 감만부두 야적장의 컨테이너 모습. / 뉴스1
1분기 수출은 IT 품목을 중심으로 전기와 견줘 5.1% 급증했다. 2020년 3분기 이후 가장 높은 수출 증가율이다. 순수출(수출-수입)의 성장 기여도만 1.1%포인트에 달했다. 전체 성장률 1.694% 중 절반이 넘는 몫을 반도체가 혼자 책임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1분기에 각각 57조2000억원, 37조6000억원의 영업이익을 기록하며 시장 예상을 크게 웃도는 실적을 냈다.
이 같은 반도체 호황의 진원지는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AI 투자 열풍이다.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 등 빅테크 기업들이 AI 서버와 데이터센터 구축에 막대한 자금을 쏟아부으면서 고성능 메모리 반도체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었다. 특히 SK하이닉스가 사실상 독점 공급하는 고대역폭 메모리(HBM) 반도체가 AI 서버의 핵심 부품으로 자리 잡으면서 한국 기업들의 수혜가 집중됐다. 지난달 수출에서 반도체가 차지하는 비중은 37.1%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2010년 이후 20% 안팎에 머물던 반도체 수출 비중이 최근 들어 급격히 치솟은 것이다.
1분기 국가별 GDP 성장률 순위. / 위키트리
반도체 수출 호조는 GDP 성장률 뿐 아니라 경상수지에서도 고스란히 나타났다. 한국은행이 8일 발표한 '2026년 3월 국제수지(잠정)'에 따르면 올해 1분기 누적 경상수지 흑자는 737억8000만달러로 분기 기준 역대 최대치를 갈아치웠다. 1분기 상품 수출액은 2301억9000만달러로 역대 최대를 기록했고, 3월 한 달에만 373억3000만달러의 흑자를 올리며 월간 기준으로 사상 처음 300억달러 선을 돌파했다. 이 같은 흑자 규모는 지난해 전체 연간 흑자(1230억5000만달러)의 59.96%에 해당한다. 단 석 달 만에 지난해 연간 실적의 60%를 채운 셈이다. 골드만삭스는 11일(현지시간) 블룸버그를 통해 한국이 AI 주도 초대형 흑자 국면에 진입했으며, 이 흑자 규모가 한국 GDP의 10%를 넘어설 것으로 전망했다.
수출뿐 아니라 국민 소득 지표에서도 반도체 효과는 뚜렷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1분기 실질 국내총소득(GDI)은 전기 대비 7.5% 급증해 성장률을 큰 폭으로 웃돌았다. 1988년 1분기(8.0%) 이후 최고치다. GDI는 GDP에 교역 조건 변화에 따른 실질 구매력을 반영한 지표로, 반도체 수출 가격 상승 등이 실제 국민의 소득 여건 개선으로도 이어졌음을 보여준다.
2분기 수출 흐름도 이어지고 있다. 4월 수출은 전년 동월 대비 48.0% 늘었고, 이달 1일부터 10일까지 수출액은 184억달러로 전년 동기보다 43.7% 증가했다.
1분기 성장률은 한국은행이 지난 2월 제시한 전망치(0.9%)를 두 배 가까이 웃도는 수준이었다. 깜짝 성장에 국내외 기관들은 앞다퉈 연간 전망치를 올려잡고 있다. 한국금융연구원은 11일 올해 성장률 전망치를 기존 2.1%에서 2.8%로 0.7%포인트 상향 조정했다. JP모건은 2.2%에서 3.0%로 0.8%포인트나 끌어올렸다. 구윤철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도 전날 "올해 성장률은 2%를 웃돌 것으로 예상한다"며 "얼마나 웃돌지는 반도체 업황 흐름과 중동전쟁 양상 등에 따라 결정될 것"이라고 했다. 한국은행도 오는 28일 수정 경제전망을 발표할 예정이다.
이 성적이 다른 나라들의 속보치 발표 이후에도 유지될 경우, 한국은 2010년 1분기(2.343%) 이후 16년 만에 분기 성장률 세계 1위를 기록하게 된다. 2010년 초는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세계 교역이 살아나면서 반도체, 자동차 등 한국 주력 수출이 빠르게 반등하던 시기였다. 당시와 달라진 점이 있다면, 지금의 성장은 반도체 한 품목에 대한 의존도가 훨씬 더 강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1분기 수출 총액 2192억달러 가운데 약 40%가 반도체에 집중됐다. 반면 반도체를 제외한 나머지 품목의 수출은 오히려 1% 가량 감소했다. 가전(-20.0%), 철강(-11.6%), 이차전지(-6.5%), 자동차(-5.5%), 디스플레이(-2.7%) 등 전통 주력 품목들이 줄줄이 뒷걸음쳤다. 수출 통계 전체에서 반도체를 빼면 사정이 전혀 달라진다는 뜻이다.
통계와 체감의 괴리도 숙제로 남아 있다. 반도체 기업들이 거대한 이익을 쌓는 동안, 자영업자와 내수 소비 현장에는 좀처럼 온기가 미치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온다. 반도체발 성장이 전체 경제로 퍼져 나가는 데는 시간이 걸리고, 낙수효과가 실제로 발생할지 여부도 장담할 수 없다.
기저효과도 염두에 둬야 한다. 전기 대비 성장률은 직전 분기의 수준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1분기에 크게 오른 만큼, 2분기에는 기저효과 때문에 수치가 하락할 가능성이 크다. 정부도 지난달 23일 "2분기에는 1분기 큰 폭 성장에 따른 기저효과와 중동 전쟁 영향 본격화 등이 중첩되며 전기 대비로는 조정이 불가피해 보인다"고 밝혔다. 실제로 2024년 1분기에도 1.174%라는 예상 밖의 성장률이 나왔다가 2분기에 -0.028%로 급락한 전례가 있다.
대외 리스크도 여전하다. 지난 2월 말 시작된 미국·이스라엘의 이란 공습으로 중동 전쟁이 본격화하면서 국제유가 불안과 에너지 수입 비용 상승이 하반기 경상수지를 끌어내릴 수 있다는 경고가 나오고 있다. 아울러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중동 사태 장기화 우려를 반영해 올해 한국 성장률 전망치를 2.1%에서 1.7%로 오히려 낮춘 상황이다. 한국금융연구원과 JP모건 등 낙관론과 OECD의 신중론이 공존하는 모양새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은 AI 관련 투자의 GDP 기여도가 지난해를 정점으로 올해부터 점진적으로 둔화할 것이라며 AI와 반도체 이후를 대비해야 한다고 이날 밝혔다. 반도체는 경기에 민감하고 순환 사이클이 있다. 지금의 슈퍼 사이클이 영원히 이어지리라는 보장은 없다. 한국 경제가 반도체 한 품목에 의존하는 구조를 얼마나 분산할 수 있느냐가 1위 성적표 이후 마주해야 할 진짜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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