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썰 / 손성은 기자] 국내 은행권이 수십 년간 이어온 ‘주택담보대출(주담대) 필승론’을 던져버리고 체질 개선에 나섰다. 가계부채 총량 규제와 부동산 시장 경색이라는 파고 속에서, 은행들은 오히려 가계대출 비중을 줄이고 기업금융의 덩치를 키우는 방식으로 포트폴리오의 ‘중력’을 이동시켰다. 그 결과 대출 잔액의 역성장 속에서도 순이익은 우상향하는 기염을 토했다.
◇목표치 무색한 ‘가계대출 급감’…대출 시장의 냉기
12일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이인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금융당국 자료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올 1분기 주요 시중은행의 가계대출 성적표는 ‘낙제점’에 가까운 역성장을 기록했다. 금융당국이 가계부채의 고삐를 죄기 위해 설정한 연간 증가 목표치가 무색할 정도다.
은행별로 보면 KB국민은행은 1분기 9092억원을 늘리려 했으나 실제로는 1조6143억원이 증발했다. 신한은행 역시 목표와 정반대로 1조5896억원이 줄었으며, 하나은행(-1조5402억원)과 NH농협은행(-1조3551억원)도 조 단위의 감소세를 피하지 못했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당국의 총량 규제로 대출 문턱이 높아진 데다, 고금리 여파로 기존 차주들의 중도 상환이 쏟아지며 잔액이 급속도로 빠졌다”며 “부동산 거래 절벽까지 겹쳐 신규 수요를 창출할 창구마저 좁아진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주담대 빈자리 채운 ‘기업 여신’…수익성 방어의 일등 공신
가계대출의 빈자리를 기업금융이 완벽하게 메운 점은 흥미로운 대목이다. 과거에는 가계대출이 줄면 은행 수익성에 ‘비상등’이 켜졌으나, 올해는 순이자마진(NIM) 방어와 기업 대출 확대를 통해 ‘불황형 호실적’을 일궈냈다.
KB국민은행은 1분기 순이익 1조1010억원을 기록하며 전년보다 7.3% 성장했다. 하나은행은 11.2%의 가파른 수익 증가율을 보였고, 신한은행도 2.7% 순익을 늘렸다. 우리은행은 순이익이 소폭 감소했으나, NIM 개선세를 유지하며 기초 체력을 증명했다.
실제 수익성 지표인 NIM을 보면 KB국민은행이 1.76%에서 1.77%로 소폭 올랐고, 신한과 우리 등도 견조한 수준을 유지했다. 대출 규모는 줄었지만, 금리 산정의 정교화와 고금리 기조를 활용해 ‘남는 장사’를 한 셈이다.
◇“가계는 관리, 기업은 공격”…은행권 성장판도 뒤집혔다
이제 은행권에서 가계대출은 ‘성장 동력’이 아닌 ‘관리 대상’으로 전락했다. 대신 그 자리를 대기업과 중소기업 여신이 꿰찼다.
신한은행의 경우 1분기 가계대출이 0.6% 빠지는 동안 대기업 대출은 무려 6.1% 급증했다. KB국민은행 역시 기업대출에서 1.2%의 성장세를 보였고, 우리은행과 하나은행도 기업금융 부문에서 각각 2.0%, 1.8% 늘어나는 등 선명한 ‘온도 차’를 보였다.
금융권 관계자는 “이제 은행의 실력은 가계대출을 얼마나 늘리느냐가 아니라, 우량 기업을 얼마나 확보하고 자산관리를 얼마나 전문적으로 하느냐에서 갈린다”며 “주담대 위주의 영업 방식은 이제 유통기한이 다했다”고 단언했다.
◇‘밸류업’ 열풍 속 RWA 다이어트…내실 경영으로의 회귀
이러한 변화의 이면에는 정부의 ‘생산적 금융’ 유도와 더불어 최근 금융권을 강타한 ‘밸류업(기업가치 제고)’ 기조가 자리 잡고 있다. 가계대출은 위험가중자산(RWA) 비중이 커서 무작정 늘릴 경우 자본 적정성 지표(CET1)를 갉아먹는다.
주주 환원을 강화해야 하는 은행 입장에서는 자본 부담이 큰 가계대출 대신, 정책적 명분과 수익성을 동시에 챙길 수 있는 기업금융 집중이 효율적이라는 판단이다.
시중은행 고위 관계자는 “단순한 외형 성장은 오히려 주주 가치를 훼손할 수 있다는 인식이 확산됐다”며 “앞으로 은행들은 위험자산 비중을 조절하면서도 수익을 극대화하는 ‘스마트 포트폴리오’ 경쟁에 사활을 걸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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