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발국들은 종합제철 건설에 거듭 실패하고 있었는데 그 대표적인 나라가 브라질과 터키입니다. 특히 브라질은 나라가 굉장이 크고 천연자원이 풍부한데도 실패했는데 우리나라는 별다른 자원도 없으니 더 어렵지 않으냐 하는 생각들이었습니다. 성심을 다한 사람의 힘은 하늘도 움직인다는 말을 저는 믿습니다."
격동의 한국 현대사를 그린 조정래의 대하 장편 소설 '한강'에서 박태준 회장이 신문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포항제철의 성공 과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조정래의 소설 '한강'은 산업화 과정을 물질 만능주의의 확대 과정으로 비판하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음에도 포항제철만큼은 그 역할을 아주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대목이 인상적이었다.
한국 산업화의 상징을 하나만 꼽으라면 많은 사람들은 반도체나 자동차보다 조정래의 소설 '한강'에 나오는 대목처럼 먼저 포항의 붉은 용광로를 떠올릴 것이다. 그 뜨거운 쇳물은 단지 철을 만든 것이 아니라, 가난했던 나라를 산업국가로 바꾸는 연료였다.
"제철소가 생기면 자동차와 조선, 건설과 기계산업이 함께 일어선다."
1960~70년대 정부와 산업계가 공유했던 이 믿음은 단순한 구호가 아니었다. 당시 한국은 철광석도 부족했고 자본도 기술도 없었다. 세계은행조차 "한국에서 종합제철소는 경제성이 없다"는 부정적 평가를 내놓았을 정도다. 그럼에도 1973년 첫 쇳물이 나온 포항제철소는 한국 산업사의 흐름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당시 조선업체들은 일본산 후판을 사기 위해 외화를 써야 했고, 자동차 산업 역시 안정적 철강 공급망이 없어 성장에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포스코가 값싸고 품질 좋은 철강재를 대량 공급하기 시작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현대중공업의 초대형 선박 건조, 경부고속도로와 아파트 건설 붐, 자동차 산업 성장 뒤에는 언제나 포스코의 철강이 있었다. '산업의 쌀'이라는 표현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리튬'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산업의 쌀…수소환원제철을 통한 미래형 종합 소재 기업의 완성
하지만 국내 증시의 무게추가 반도체로 기울어진 지금, 한국 산업사의 상징 같은 철강 기업들은 유난히 긴 겨울을 지나고 있다. 특히 포스코홀딩스를 중심으로 한 포스코그룹은 철강 업황 둔화와 중국발 공급 과잉, 탄소중립 압박이라는 삼중고 속에서 쉽지 않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한때 "철강은 곧 포스코"라는 말이 통했던 시대와 비교하면 존재감이 예전 같지 않다는 평가도 나온다.
시장의 시선이 온통 삼성전자와 AI(인공지능) 반도체에 쏠린 사이, 포스코그룹은 조용하지만 분명한 변신을 진행하고 있다.
지금 포스코가 보여주는 변신은 단순히 철강에서 배터리 소재로의 확장이 아니다. 미국 시장에서 최대 50%에 달하는 고율 관세라는 장벽은 한국 철강업계의 수출 경쟁력을 크게 약화시켰다. EU(유럽연합) 역시 세이프가드로 쿼터 초과분에 25% 관세를 부과하고 있어, 전통 철강만으로는 글로벌 시장에서 성장 동력을 확보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이런 보호무역의 벽을 넘기 위해 포스코는 리튬과 니켈, 수소환원제철 같은 미래 소재로 눈을 돌리고 있다. 이는 박태준 회장이 강조했던 '제철보국' 정신을 오늘날 '소재보국'으로 확장하는 과정이며, 글로벌 공급망 재편 속에서 한국 기간산업의 새로운 생존 전략을 보여준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이차전지 소재 사업이다. 포스코그룹은 더 이상 철광석과 쇳물만 이야기하지 않는다. 리튬, 니켈, 양극재와 음극재가 그룹의 미래 전략 핵심으로 떠올랐다.
특히 포스코퓨처엠은 그룹 변신의 상징적 존재다. 철강 중심 기업집단이 배터리 소재 공급망으로 영역을 넓히며 '산업의 쌀'이 철에서 배터리 소재로 이동하는 흐름에 올라타고 있는 셈이다.
최근 키움증권 보고서에 따르면, 포스코홀딩스의 1분기 영업이익은 7070억원으로 시장 컨센서스를 상회했다. 주목할 점은 실적의 질이다. 리튬 사업의 적자 폭이 전 분기 대비 820억원 축소되었고, 포스코퓨처엠이 흑자 전환에 성공하며 이차전지 소재 부문의 영업적자가 1500억원가량 개선되었다.
특히 아르헨티나 리튬 사업의 핵심법인 '포스코아르헨티나'는 가동률 70%를 돌파하며 월 단위 영업흑자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이는 포스코가 가진 대규모 장치산업 운영 노하우와 글로벌 자원 확보 능력이 배터리 소재 산업이라는 새로운 무대에서도 유효함을 증명하는 지표다.
키움증권은 특히 리튬사업 흑자전환이 가시권에 들어왔다고 평가했는데 리튬사업의 핵심법인인 포스코아르헨티나는 1단계 2.5만톤 공장의 상업생산 본격화와 함께 3월 들어 가동률이 70%대로 올라서며 가동 이후 처음으로 월단위 영업흑자를 기록하는 등 의미있는 변화가 시작되었다고 분석했다. 연간 2.5만톤 생산 규모는 전기차 약 60만대분 배터리 공급량에 해당한다.
아르헨티나 리튬사업의 구조적 흑자전환 기대감 등을 반영해 목표주가를 64만원으로 상향하고 투자의견 '매수'를 유지했다.
이는 단순한 사업 다각화와는 결이 다르다. 포스코는 철강업을 통해 축적한 대규모 장치산업 운영 경험, 글로벌 자원 확보 능력, 공정 기술 경쟁력을 배터리 소재 산업으로 연결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즉, 기존 제조 DNA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미래 산업에 맞게 재해석하는 전략이다.
물론 현실은 녹록지 않다. 전기차 시장 성장세 둔화와 글로벌 경기 침체 우려 속에서 이차전지 업종 역시 변동성이 커졌다.
투자자 입장에서는 "철강도 어렵고 배터리도 불안하다"는 이중의 의구심이 여전했지만 포스코의 변신이 주목받는 이유는 방향성 때문이다.
지금 세계 제조업은 탄소중립과 공급망 재편이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새로 짜여지고 있다. 철강 산업 역시 친환경 고부가 제품과 수소환원제철 같은 기술 혁신 없이는 생존을 장담하기 어렵다. 포스코는 전통 산업의 한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며, 그래서 더 적극적으로 다음 시대를 준비하고 있다.
특히 수소환원제철은 포스코가 단순히 '배터리 소재 회사'로 변신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형 종합 소재 기업으로 진화하려 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탄소를 줄이면서 철을 생산하는 기술은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성공할 경우 글로벌 철강 산업 질서를 바꿀 가능성도 있다. 과거 고로 기술이 국가 산업화를 이끌었다면, 미래에는 친환경 제철 기술이 새로운 경쟁력이 될 수 있다. 수소환원제철 기술은 기존 고로 대비 탄소 배출을 최대 80~90% 줄일 수 있다는 국제에너지기구(IEA) 추정치도 나와 있다.
결국 지금의 포스코그룹은 두 시대 사이에 서 있다. 과거 한국 경제 성장기를 이끈 철강기업의 얼굴과, 미래 에너지·소재 기업으로 탈바꿈하려는 새로운 얼굴이 공존한다. 당장의 주가 흐름만 보면 반도체 기업들에 비해 초라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산업의 판이 바뀌는 시기에는 화려한 주도주보다 묵묵히 체질을 바꾸는 기업이 오히려 긴 생명력을 보여주기도 한다.
장인화 현 회장은 이미 여러 차례 "창업자 박태준 회장께서 남기신 정신은 단순히 철을 만드는 기술을 넘어, 국가와 사회를 위해 헌신하는 기업가 정신이었다"면서 "포스코는 리튬과 니켈, 양극재와 음극재를 통해 새로운 시대의 '산업의 쌀'을 공급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과거 제철소가 자동차와 조선, 건설을 일으켰듯, 이제 배터리 소재가 미래 모빌리티와 에너지 산업을 일으킬 것이라는 전략이다.
포스코의 리튬·수소 전략은 단순히 기업의 변신이 아니라, 한국 제조업이 반도체 중심에서 소재·에너지 중심으로 다변화하는 흐름을 보여준다. 특히 미국 '마스가'(MASGA) 프로젝트와 같은 글로벌 조선·방위산업 재건에도 포스코의 친환경 철강과 소재 공급망은 전략적 자산이 될 수 있다.
다만 포스코의 미래 전략이 장밋빛 전망만으로 설명되는 것은 아니다. 리튬과 수소환원제철은 분명 차세대 성장 축이지만, 동시에 상당한 변동성과 불확실성을 안고 있는 사업이기도 하다. 특히 최근 글로벌 리튬 시장은 공급 확대 속도가 수요 증가를 앞지르면서 가격 변동성이 극심해진 점도 부담으로 작용한다.
특히 수소환원제철의 성공 여부는 기술 개발뿐 아니라 재생에너지 확대, 수소 인프라 구축, 글로벌 탄소 규제 변화와도 맞물려 있어 여러 변수에 노출되어 있다는 점도 부담이다.
어쨌든 포스코의 변신에 시장이 주목하는 이유는 이처럼 중후장대형의 한국 기간산업의 새로운 변신을 가늠할 수 있는 척도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결국 포스코의 두 번째 용광로는 단순히 철을 녹이는 고로가 아니다. 리튬과 수소, 친환경 제철 기술이라는 새로운 용광로가 한국 산업의 미래를 달구고 있다.
이용웅 주필 / 경제를 읽는 맑은 창 - 비즈니스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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