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는 새 헌법이 필요하다. 그리고 한국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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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는 새 헌법이 필요하다. 그리고 한국도

프레시안 2026-05-12 09:27:17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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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껏 대한민국을 비롯해 세계 많은 나라에서 미국은 헌법과 이에 대한 강한 믿음에 바탕을 둔 민주주의의 전범으로 존경받아왔다. 최근까지도 그랬다. 18세기 말에 제정된 헌법이 어떻게 21세기 사회를 지탱하는 규범이 될 수 있겠냐고 묻는 이들도 간혹 있었지만,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1기 트럼프 정부를 통해 이 체제가 생각보다 허술하다는 사실이 드러났어도 미국식 체제에 대한 믿음이 크게 흔들리지는 않았다. 바이든 정부의 등장을 보며 미국식 헌법 민주주의의 저항력과 회복력에 다들 박수갈채를 보냈다.

그러나 지금 상황은 어떠한가? 2기 트럼프 정부가 들어선 지 불과 몇 달 만에 이 모든 믿음은 미국 안팎에서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트럼프 정부는 너무도 쉽게 국내에 준계엄 상태를 조성하고 있고, 너무도 쉽게 세계 곳곳에서 전쟁을 일으키고 있다. 다른 민주 국가였으면 헌법에 명시된 안전장치들을 통해 아예 시도 자체를 막았을 조치들을 백악관은 날마다 별 어려움없이 밀어붙인다. 헌법이 보장하는 자유주의-민주주의의 보루라던 의회도, 법원도, 연방제도 이런 민주주의의 후퇴에 수동적 반발만 할 뿐 능동적 반격의 진지는 되지 못한다.

아니, 민주주의를 지키기는커녕 오히려 트럼프 정부의 손발이 되어주고 있다. 4월 29일 미국 연방대법원은 루이지애나 주가 2024년에 획정한 연방하원 선거구가 위헌적인 '인종 게리맨더링'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흑인 인구가 전체의 3분의1을 넘는 루이지애나 주에는 본래 흑인이 다수인 선거구가 1곳밖에 없었다. 그런데 2022년 연방법원은 이런 선거구 획정이 투표권법 제2조를 위반했다고 판결하면서 흑인 다수 선거구를 2곳으로 늘렸다. 이번에 연방대법원은 이 판결을 다시 뒤집었다. 투표권법 제2조가 선거구 획정의 주된 기준임을 부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투표권법 제2조란 무엇인가? 1950~60년대 흑인 시민권운동이 쟁취한 대표적인 법률적 성과인 투표권법의 핵심이라 할 만한 조항이다. 그 내용은 이렇다. "주 또는 하위 행정구역은 인종이나 피부색을 이유로 미국 국민의 투표권을 제한 또는 부정하는 결과를 초래하거나 (…) 투표자격이나 투표를 위한 전제조건이나 기준, 사무, 절차를 요구하거나 적용해서는 안 된다."

이 조항 덕분에 그간 헌법상 투표권을 인정받으면서도 실제로는 투표를 할 수 없었던 남부 흑인 시민들이 다시 선거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1870년대에 남부 주들에 반동적 백인 지배 질서가 복구된 이후 거의 한 세기만이었다. 그리고 4년 전에 연방법원은 바로 이 조항의 정신에 따라 루이지애나 주민의 3분의1에 달하는 흑인 시민이 그에 걸맞게 자기 대표를 배출할 수 있는 선거구를 할당받아야 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이번에 9인의 연방대법관들은 '6 대 3'으로 이 판결을 뒤집었다. 6명의 연방대법관 다수파는 이 판결을 통해 20세기 미국 민주주의의 가장 인상적인 성취를 무력화시켰고, 앞으로 마가(MAGA) 공화당이 '합헌적' 게리맨더링을 통해 집권을 연장시킬 토대를 마련해주었다.

연방대법원, 의회, 선거제도 모두 문제 투성이다

사실 연방대법원이 투표권법을 무력화시키는 판결을 내린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공화당 대통령들이 지명한 대법관 숫자가 늘어남과 동시에 연방대법원은 지난 세기 민주주의의 성과를 하나, 둘 회수했다.

대표적으로, 2013년 '셸비 카운티 대 홀더' 사건 판결은 투표권법 제5조를 사문구로 만들었다. 제5조는 역사적으로 인종차별적 투표법을 실시했던 주들이 선거제도를 변경할 경우에 연방정부의 사전 승인을 받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제5조를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해석되는 연방대법원 판결이 나오자 텍사스 주는 곧바로 특정 유권자에게 신분증 제시를 요구하는 법률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이후 여러 주가 마음껏 선거제도를 개악했다.

'셸비 카운티 대 홀더' 사건 판결의 다수 의견은 5명으로, 소수 의견보다 고작 한 명 더 많았다. 2억 명에 육박하는 미국 유권자들에게 1인 1표의 권리를 실질적으로 보장하느냐 마느냐 하는 중대한 결정을 연방대법관 단 한 명이 결정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물론 이 연방대법관은 민주적 선출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단지, 이제는 임기가 끝난 공화당 대통령 한 명이 자신이 책임지지도 못할 미국 국민의 미래 삶을 좌지우지하기 위해 남겨놓은 비선출직 종신 최고 결정권자다.

대통령이 임명하는 9인의 종신 연방대법관이 이렇게 헌법 해석과 판결을 통해 사실상 21세기 헌법을 제정하는 미국식 대법원 제도는 민주주의와 거리가 멀 뿐만 아니라 권력 분립과 견제, 균형이라는 자유주의 원칙에도 미달한다. 이에 비하면, 선구적으로 헌법재판소를 도입했을 뿐만 아니라 '대법원장과 대법관은 법관의 자격이 있는 자로써 조직되는 선거인단이 이를 선거하고 대통령이 확인한다(제78조)'라고 규정했던 대한민국 제2공화국 헌법이 훨씬 더 자유주의적이다. 1년만에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 미국식 대법원 제도로 회귀하는 통에 한국사회가 이 더 나은 제도를 실제로 누려본 적이 없지만 말이다.

하지만 연방대법원 문제는 미국 헌정 체제의 숱한 한계와 맹점, 모순 중 하나에 불과하다. 다시 루이지애나 선거구 문제로 돌아가 보면, 이런 사안이 쟁점이 된다는 것 자체가 미국 민주주의가 얼마나 낡았는지 증명한다. 그리고 이 점에서는 미국, 영국과 마찬가지로 소선거구제(단순다수대표제)를 고집하는 대한민국 역시 시대착오적이기 이를 데 없다.

루이지애나 주민의 3분의1 이상인 흑인이 단 한 선거구 외에는 모두 소수가 되도록 선거구를 획정했다는 것은 분명 문제다. 그리고 이런 문제를 시정하려는 방안이 '게리맨더링'이라는 연방대법원 판결은 분명 민주주의의 근간에 대한 공격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이렇게 지도 위에 선거구 경계선을 어떻게 그을지에 따라 숱한 유권자의 기본권이 좌우되는 선거제도 자체가 심각한 문제다. 흑인이 다수인 선거구를 1개 만들 것이냐, 2개 만들 것이냐가 격렬한 쟁점이 되는 체제부터 뜯어고쳐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럴 필요가 없는 선거제도가 이미 존재한다. 비례대표제다. 권역별 비례대표제(북유럽 등)든 연동형 비례대표제(독일 등)든 단기이양제(아일랜드)든, 이런 다양한 형태의 비례대표제에서는 아프리카계나 라틴계 소수자들이 선거구 구획에 연연할 필요가 없다. 단지 자신들을 대변할 정당을 제대로 조직하고, 선거에서 이런 정당에 힘을 모아주면 된다. 마르크스주의자 도메니코 로수르도도 주장(<Democracy or Bonapartim?>, Verso, 2024)하고 하버드 정치학과 교수들인 스티븐 레비츠키, 대니얼 지블랫도 강조(<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 박세연 옮김, 어크로스, 2024)하듯이, 이런 점에서 '1인 1표 원칙'을 제대로 구현하는 선거제도는 비례대표제뿐이다.

따라서 연방대법원이 투표권법을 무력화시켰다고 좌절하기만 할 일이 아니다. 투표권법의 정신을 제대로 구현할 선거제도인 비례대표제를 쟁취하려는 운동이 시작되어야 한다. 실제로 미국에도 한국처럼, 비례대표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논객이나 사회운동이 존재한다. 더구나 일부 주에서는 오히려 한국보다 훨씬 더 전향적으로 선거제도 개혁이 시도되고 있다. 비례대표제까지는 아니어도 즉석결선투표제 등을 각급 선거에 도입하는 실험이 곳곳에서 펼쳐지고 있다.

그러나 연방 차원에서는 선거제도 개혁을 가로막는 너무나 강력한 장애물이 버티고 있다. 헌법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미국은 양원제이고 그 중 상원은 주마다 2인의 의원을 선출하도록 헌법에 명시되어 있다. 인구가 4000만 명에 가까운 캘리포니아 주도 상원의원을 2명 뽑고, 60만 명밖에 안 되는 와이오밍 주도 2명을 뽑는다. 와이오밍 유권자는 상원에서 대략 캘리포니아 유권자의 70배 되는 결정권을 행사하는 셈이다. '1인 1표제'의 완전한 부정이다. 게다가 인구가 적은 주 중에 공화당 텃밭이 많은 탓에 공화당이 상원에서 항상 과잉 대표되고 실제 유권자 지지보다 더 막강한 권력을 행사한다.

이런 상원이 선거제도 개혁의 결정적 장애물 노릇을 해왔다. 선거제도를 조금이라도 개선하려는 법안은 매번 상원이라는 암초 앞에서 좌초했다. 법안을 통과시킬 의석 수에 근접할 경우에는 양당의 선거제도 개혁 반대파가 필리버스터라는 무소불위의 수단을 활용해 끝내 막아냈다. 이런 상황이기에, 하원에 한해 비례대표제를 도입해보려 해도 상원이라는 장애물을 돌파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상원은 18세기에 만들어진 헌법에 의해 보호받는다. 상원을 흔들려면, 헌법 자체에 손을 대야 한다. 그리고 여기에 미국 헌정 체제의 가장 암담한 난제가 있다. 미국 헌법은 상하 양원의 3분의2가 헌법개정을 발의할 경우에만 개정 절차를 밟을 수 있다. 아니면 전체 주 중 3분의2 이상의 주의회의 요청으로 헌법제정회의(1787년 필라델피아 제헌회의 같은)를 소집해야 한다. '마가 공화당'과 민주당 주류가 막강한 수문장 노릇을 하는 현 정치 지형을 감안하면, 이는 사실상 '제2의 미국 독립혁명'을 요청하는 것이다.

▲미 하원 의사당 복도에 걸려 있는 역사기록화 '미국 헌법 서명 장면'(하워드 챈들러 크리스티 작). ⓒ미 의회 영선국 홈페이지(aoc.gov)

새 헌정 없이 새 체제 없다

헌법을 뜯어고쳐야 하지만 그러지 못하는 나라는 미국만이 아니다. 8일, 국민의힘을 제외한 모든 원내정당이 공동 발의한 개헌안이 국민의힘의 비토로 끝내 본회의에 상정조차 되지 못했다. 우원식 국회의장은 6월 3일 개헌 국민투표 시행을 위한 절차가 좌절됐음을 알리며 눈물을 흘렸다. 국민적 동의가 높은 ‘비상계엄 요건 강화’ 등을 담은, 극히 부분적인 개헌안인데도 극우화된 국민의힘의 방해 앞에 속수무책이었다. 헌법개정은 이토록 어렵다.

아마도 이 문제는 21세기 민주주의의 최대 난제가 될 것이다. 나라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각국의 기존 민주정은 21세기의 급변하는 현실, 절박한 위기와 커다란 간극을 보인다. 간극이 특히 심각한 나라들은 18세기식 소선거구제와 양당 정치(대통령제든 의회정부제든)를 고집해온 미국·영국이고, 한국이나 일본도 이에 못지않다. 시간이 지날수록, 복합위기가 격렬해질수록, 이런 나라들에서 낡은 민주정과 새로운 현실 사이의 간극은 재앙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그리고 그럴수록 민주주의의 자멸 운동, 즉 파시즘의 기회가 열릴 것이다.

따라서 시대 변화에 맞춰 발 빠르게 민주정을 '업그레이드-업데이트'하는 헌정 질서 변화가 시도돼야 한다. 1인 1표 원칙에 부합하면서 21세기 각국의 조건에 맞는 민주 헌정을 새롭게 구축하지 않으면 안 된다. 복합위기의 원인을 근본적으로 해결해가는 사회 대개혁 또한 이런 새 헌정 아래에서 비로소 제대로 추진될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헌정의 구축 없이 새로운 경제사회 체제는 실현될 수 없다.

그러나 이 점을 분명히 확인할수록 현실은 더 난해하게 다가오고 좌절은 더욱 깊어진다. 새로운 헌정을 절실히 필요하게 만드는 바로 그 이유(양당 독점 정치)로 인해 헌정 개혁이 계속 난관에 부딪히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운명이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도 그렇고, 한국에서도 그렇다.

8일 국회 본회의에서도 확인했지만, 어차피 왕도(王道)는 없다. 민주주의를 심화시키는 방향에서 사회 변화를 추구하는 세력은 현재의 낡은 '게임 규칙' 안에서 어떻게든 진지를 넓히려고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다 어느 때라도 작은 틈이나마 생기면 다시, 또 다시 헌정 질서 개혁을 시도해야 한다.

다만 이렇게 비좁은 기회의 문이라도 최대한 더 활짝 열 수 있으려면, 늘 한 가지 진실을 새겨 두고 있어야만 한다. 새로운 민주 헌정 없이는 새로운 사회 체제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을.

▲우원식 국회의장이 지 8일 국회에서 열린 5월 임시국회 제2차 본회의 산회를 선포한 뒤 의장석에서 내려가고 있다. 앞서 국민의힘은 대한민국헌법 개정안과 다른 법안에 대해 필리버스터를 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우 의장은 이날 본회의에 대한민국헌법 개정안 등을 상정하지 않았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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