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마트 온 줄"…네팔 휴양지 뒤덮은 '짝퉁 한글 라면'
지난 8일 네팔 휴양도시 포카라의 한 대형마트. 페와 호수에서 도보로 10분가량 떨어진 이곳은 밤낮 없이 현지인과 관광객들로 붐비는 지역 최대 소매점이다. 입구를 지나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라면 매대였다. 진열대를 가득 채운 제품 대부분에 한글이 적혀 있었다. 검은색과 붉은색, 분홍색 계열 패키지까지 익숙한 분위기가 이어지자 잠시 한국 마트 라면 코너에 와 있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가까이 다가가 제품을 하나씩 집어 들자 묘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한국 제품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현지·해외 브랜드 제품들이었기 때문이다. 가장 눈에 띈 건 '한국(HANKOOK)'이라는 브랜드의 볶음면이었다. 검은색 바탕 위에 닭 캐릭터가 불을 뿜고 있는 디자인은 삼양식품 불닭볶음면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했다. '불닭(BULDAK)' 영문 표기와 '불닭볶음라면'이라는 제품명, 특유의 글씨체까지 판박이였다. 심지어 '메이드 인 코리아(Made in Korea)' 마크가 들어가야 할 자리에는 태극 문양과 함께 '테이스트 오브 코리아(Taste of Korea)'라는 문구를 넣어 혼란에 빠뜨렸다. 오리지널은 물론 핑크색 패키지의 까르보불닭까지 그대로 베껴 팔고 있었다.
매대를 둘러볼수록 비슷한 제품들이 계속 눈에 들어왔다. 한글을 사용하는 방식도 제각각이었다. 네팔의 라면 브랜드 '커렌트(Current)'는 브랜드명을 직역한 '현재'를 패키지 전면에 크게 적어놨고 '잭팟(Jackpot)'은 '공동자금'이라는 엉뚱한 단어를 제품명 옆에 배치했다. 라면 맛이나 특징과는 전혀 관계없는 표현들이다.
매운맛을 강조하기 위해 한글을 쓰는 사례도 많았다. '악마의' '매콤한' '라라 매콤한' 같은 문구가 적힌 제품들이 매대 곳곳에 놓여 있었다. 현지 마트 직원은 "뜻보다 중요한 건 한글이 적혀 있다는 사실 자체"라며 "한글이 들어가면 한국 라면이라는 인식이 강해져 선호도가 올라간다"고 말했다.
실제 소비자 반응도 비슷했다. 매대 앞에서 제품을 고르던 인도 출신 로빈씨(28)는 "HANKOOK 제품이 복제품이라는 사실을 몰랐다"며 "한글이 적혀 있어 당연히 한국 라면인 줄 알았다"고 말했다. 이어 "원조 제품보다 가격이 저렴해 선택했다"고 덧붙였다.
◆동남아 넘어 일본까지…국적 불명 'K-스타일'의 역습
이 같은 현상은 네팔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K-푸드 인기가 높아지면서 아시아 곳곳에서 한국식 패키지와 한글을 차용한 현지 식품들이 빠르게 늘고 있다. 단순히 한국 제품을 수입·판매하는 수준을 넘어 현지 업체들이 한국 라면의 디자인과 네이밍 방식을 적극적으로 따라 하는 흐름까지 나타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인도 시장이다. 인도 대형 식품기업 ITC는 즉석면 브랜드 '이피(Yippee)'를 통해 '대박 라면'을 판매 중이다. 제품 전면에 한글로 '대박'을 넣고 검은색과 붉은색 중심의 강렬한 색 배치로 한국식 매운 라면 이미지를 강조했다. '코리안(Korean)'이라는 문구도 함께 삽입해 한국 라면 콘셉트를 전면에 내세웠다.
인도네시아도 비슷하다. 현지 대표 라면 브랜드 미스답(Mie Sedaap)은 '한국 양념 닭갈비 라면' 콘셉트 제품을 선보이며 패키지에 한글로 '양념 닭갈비'를 표기하고 불맛·매운맛을 강조하는 붉은 계열 디자인을 입혔다.
인스턴트 라면 본고장이라 불리는 일본도 예외는 아니다. 일본 편의점과 마트에서는 '한국짬뽕' '한국식라면' 등을 전면에 내세운 현지 브랜드의 컵라면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일본어보다 한글을 더 크게 배치하거나 붉은색·검은색 디자인으로 한국식 매운 라면 이미지를 강조한 제품도 많다.
일본 최대 라면기업 닛신식품도 일찍이 논란에 휘말린 적이 있다. 2023년 출시한 '닛신 야키소바 U.F.O 볶음면 한국풍 달고 매운 까르보'는 분홍색 패키지와 제품 콘셉트가 삼양식품 '까르보불닭볶음면'과 유사하다는 지적을 받았다. 일본 제품임에도 '볶음면'이라는 한글 표현을 제품명에 그대로 쓴 점도 화제가 됐다.
업계에서는 이 같은 현상이 나타나는 배경으로 신라면·불닭볶음면을 중심으로 한 K-라면 흥행을 꼽는다. 농림축산식품부에 따르면 지난해 K-푸드 플러스 수출액(잠정)은 전년 대비 5.1% 늘어난 136억2000만 달러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특히 라면(15억2100만 달러)은 수출액이 21.9% 급증하며 단일 품목 최초로 15억 달러를 돌파했다. 올해 성장세도 가파르다. 1분기 라면 수출액은 4억3500만 달러(약 6500억원)로 전년 대비 26.4% 늘었고 지난달에는 월별 기준 역대 최대 실적을 갈아치웠다.
◆"법망 피하며 이미지 절도"…브랜드 훼손 직면한 식품업계
식품업계는 최근 해외에서 나타나는 '한글 차용' 현상을 단순한 유행 이상의 변화로 보고 있다. 과거에는 영어와 현지어 중심 패키지가 일반적이었다면 이제는 한글과 'KOREA' 표기 자체가 제품 경쟁력을 높이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높아진 위상만큼 브랜드 훼손에 대한 우려도 커지고 있다. 삼양식품에 따르면 불닭볶음면 브랜드가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면서 모방 제품도 빠르게 늘고 있다. 과거에는 로고나 캐릭터를 그대로 베끼는 방식이 많았다면 최근에는 법적 규제를 교묘히 피해 가는 형태로 진화하고 있다.
삼양식품 관계자는 "최근에는 브랜드 고유의 색상 조합이나 패키지 구성 등 '트레이드 드레스' 요소를 유사하게 구현해 소비자 혼동을 유도하는 사례가 많아지고 있다"며 "마스코트 캐릭터의 디테일만 살짝 바꾸거나 '한국식 매운맛' 같은 문구를 삽입해 정품처럼 보이게 만드는 식"이라고 했다.
농심도 마찬가지다. 농심 관계자는 "예전에는 제품명 자체를 그대로 베껴 쓰는 사례가 많았다면 요즘은 디자인과 색상, 분위기만 교묘히 흉내 내는 방식이 늘고 있다"며 "상표를 직접 복제한 게 아니라 디자인의 '느낌'만 가져가는 식이라 법적 대응이 더 복잡해지고 있다"고 했다.
업계는 현지 유통망과 소비자 제보를 통해 유사 제품을 모니터링하면서 경고장 발송과 행정 조치 등 법적 대응을 병행하고 있다. 주요 국가에서 상표권과 패키지 디자인 저작권 등록도 확대하고 있다. 한 업계 관계자는 "K-푸드 위상이 높아진 건 고무적이지만 소비자가 한국 제품과 혼동할 만큼 악의적으로 모방하는 건 장기적으로 브랜드 가치를 갉아먹는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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