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신문 김효인 기자】 실손보험 청구 전산화가 제도 시행 이후에도 현장 안착에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소비자는 앱이나 플랫폼을 통해 보험금을 청구할 수 있지만, 해당 의료기관이 전산화 서비스와 연계돼 있지 않으면 간편한 청구가 불가능하다. 보험금 청구 방식은 디지털로 바뀌고 있지만, 현장에서는 여전히 종이서류를 챙겨야 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 상황이다.
정부가 이 같은 병목을 해소하기 위해 실손보험 청구 전산화 서비스인 ‘실손24’ 확산에 다시 속도를 낸다. 단순히 앱 이용을 독려하는 수준을 넘어 의료기관과 전자의무기록, 즉 EMR 업체의 참여를 끌어올려 실제 이용 가능한 병원을 늘리겠다는 구상이다.
11일 금융권에 따르면 금융위원회는 이날 보건복지부, 공정거래위원회, 금융감독원 등 관계기관과 함께 ‘실손보험 청구전산화 점검회의’를 열고 실손24 연계 현황과 활성화 방안을 논의했다. 회의에는 생·손보협회 등 보험업계와 소비자단체를 비롯해, 실손24 서비스를 플랫폼과 연계해 제공하는 네이버와 토스도 참석했다.
‘동네 의원’ 빠진 전산화…소비자 체감은 ‘아직’
실손24는 병원에서 종이서류를 발급받는 번거로움 없이 진료비 영수증, 세부산정내역서, 처방전 등을 보험사에 전자적으로 전송해 보험금을 청구할 수 있는 서비스다. 보험개발원이 운영하는 실손24 앱과 웹사이트뿐 아니라 네이버, 토스 등 플랫폼을 통해서도 이용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장의 체감도는 아직 낮다. 지난 6일 기준 실손24에 참여한 의료기관은 총 3만614곳으로, 전체 의료기관 기준 연계율은 29.0%에 그쳤다. 병원급 의료기관과 보건소를 대상으로 한 1단계 연계율은 56.3%였지만, 실생활에서 청구가 잦은 의원과 약국 중심의 2단계 연계율은 26.8%에 머물렀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앱을 내려받았더라도 실제 이용 가능한 병원을 찾는 과정에서 다시 불편을 겪을 수밖에 없다. 특히 감기나 통원치료, 약 처방 등 소액 청구가 자주 발생하는 동네 의원과 약국의 연계율이 낮다는 점은 실손24 확산의 가장 큰 한계로 꼽힌다.
실손보험은 국민 대다수가 가입한 생활밀착형 보험이다. 정부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실손보험 피보험자는 약 4035만명에 달한다. 그럼에도 청구 과정의 번거로움 때문에 소액 보험금은 아예 포기하는 사례가 반복돼 왔다. 정부는 매년 수천억원 규모의 미청구 실손보험금이 발생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권대영 금융위 부위원장은 이날 회의에서 “실손청구 전산화는 국민이 보험금을 창구 방문과 복잡한 서류, 사진 제출 없이 간편하게 청구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라고 설명했다. 의료계와 보험사 역시 서류 발급과 처리 부담을 줄일 수 있어 실손24가 모든 참여자에게 유용한 국민서비스 인프라가 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열쇠 쥔 EMR 업체…공정위 카드까지 꺼낸 정부
정부가 실손24 확산의 병목으로 지목한 곳은 의료기관 전산망을 쥔 EMR 업체다. 의료기관이 실손24에 참여하려 해도 사용 중인 전자의무기록, 즉 EMR 프로그램이 연계되지 않으면 전산청구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정부는 미참여 업체를 상대로 참여를 설득하는 동시에, 집단적 불공정 관행 여부를 공정거래위원회와 함께 들여다보기로 했다.
그동안 일부 대형 EMR 업체는 경제적 유인 부족 등을 이유로 실손24 참여에 미온적이었다. 이 경우 병원이나 약국이 참여 의사를 갖고 있어도 기존 EMR을 바꾸지 않는 한 실손24 연계가 어려워진다. EMR 업체가 사실상 실손청구 전산화 확산의 관문 역할을 해온 셈이다.
정부는 최근 주요 EMR 업체의 참여 확정으로 연계 기반이 마련됐다고 보고 있다. 관련 시스템 개발 절차가 마무리되는 6월 이후에는 실손24 연계율이 최대 52% 수준까지 오를 것으로 전망된다. 다만 최종 목표는 이보다 높다. 올해 하반기 의료기관 연계율을 80~90% 이상으로 끌어올려 소비자가 실제로 체감할 수 있는 수준까지 제도를 안착시키겠다는 방침이다.
이 과정에서 정부는 실손24를 단순한 민간 편의 서비스가 아닌 공적 인프라로 규정하고 있다. 약 4000만명의 실손보험 가입자가 혜택을 볼 수 있는 제도인 만큼, 특정 업체의 참여 여부가 소비자 편익을 좌우해서는 안 된다는 판단에서다.
소비자단체도 자발적 참여만으로 한계가 있을 경우 과태료 신설, 담합 여부 조사 등 실효적인 제재 방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실손24 확산이 앱 고도화보다 의료기관 전산망과의 연결 문제에 달려 있다는 점에서, EMR 업체의 참여 여부가 향후 제도 안착의 핵심 변수가 될 전망이다.
네이버·토스보다 중요한 건 ‘내가 가는 병원’
실손24의 이용 경로는 점차 넓어지고 있다. 정부는 별도 앱 설치 없이도 보험금 청구가 가능하도록 네이버·토스 등 생활 플랫폼과의 연계를 확대하고 있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익숙한 앱 안에서 실손보험금을 청구할 수 있게 되는 만큼 접근성은 한층 높아질 수 있다.
다만 서비스 접점이 늘어나는 것과 실제 이용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실손24를 통해 보험금을 청구하려면 소비자가 진료받은 병원이나 약국이 시스템과 연계돼 있어야 한다. 플랫폼 안에서 청구 기능을 찾기 쉬워져도, 정작 이용한 의료기관이 빠져 있다면 기존처럼 서류를 발급받아 제출해야 한다.
정부가 의료기관 연계율 제고에 무게를 두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실손24에 병원별 청구 건수를 표시하고, 병원이 직접 소개글과 이미지를 등록할 수 있도록 해 참여 의료기관의 노출 효과를 높이는 방안이 추진된다. 소비자가 실손24 도입을 요청한 의료기관이 실제 연계될 경우, 해당 소비자에게 별도로 안내하는 방식도 검토되고 있다.
결국 실손24의 확산은 플랫폼의 편의성보다 의료기관 연결망의 밀도에 달려 있다. 대형병원뿐 아니라 동네 의원과 약국까지 전산망이 촘촘히 이어져야 소비자가 제도 변화를 체감할 수 있다. ‘앱 하나면 끝’이라는 설명이 현실이 되기 위해서는 청구 창구의 디지털화와 함께 의료기관 현장의 참여가 뒷받침돼야 하는 셈이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실손청구 전산화는 소비자의 청구 편의성을 높이기 위한 생활밀착형 인프라”라며 “의료기관 연계 범위를 넓혀 국민이 실제 이용 과정에서 변화를 체감할 수 있도록 제도를 안착시켜 나가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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