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뉴스투데이 김진영 기자] 건강보험 재정이 적자 전환을 눈앞에 둔 가운데, 필수·지역의료 보상 확대를 둘러싼 의료계와 정부의 충돌이 본격화되고 있다. 올해 2027년도 수가협상은 단순한 ‘인상률 줄다리기’를 넘어, 건강보험 지속가능성과 1차 의료 생존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치킨게임’ 양상으로 번지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11일 의료계에 따르면 국민건강보험공단과 의약단체들은 이달 말까지 2027년도 요양급여비용 계약(수가협상)을 진행한다. 수가는 병의원과 약국 등이 환자에게 제공한 의료서비스 대가로 건강보험 재정에서 받는 비용이다.
올해 협상이 예년보다 거칠어질 것이란 전망이 나오는 배경에는 빠르게 악화되는 건강보험 재정이 자리하고 있다. 초고령사회 진입으로 의료 이용량이 급증하는 가운데 정부가 필수·지역·공공의료 강화 정책까지 확대하면서 건강보험 지출 부담도 빠르게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정기석 건보공단 이사장은 최근 합동간담회에서 “올해부터 건보 재정의 큰 폭 적자 전환이 확실시되고 있다”고 밝혔다. 고령화에 따른 진료비 증가와 필수의료 투자 확대가 동시에 진행되면서 재정 압박이 한계 수준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설명이다.
다만, 건강보험 재정을 추가로 확대하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현재 건강보험 보험료율은 7.19%로 법정 상한인 8%에 근접한 상태다. 가입자 부담 확대에도 한계가 있는 만큼, 건보공단은 재정 건전성을 우선 고려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다. 가입자 단체 내부에서도 보험료 인상과 재정 확대에 신중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적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반면 의료계는 현장은 이미 한계 상황이라고 반발하고 있다. 고물가와 인건비 상승이 장기화되면서 의원급 의료기관과 중소병원을 중심으로 경영 부담이 급격히 커졌다는 주장이다. 의정갈등 이후 정부가 필수·지역의료 강화를 강조하고 있지만, 정작 이를 유지할 현실적인 보상체계는 여전히 부족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대한개원의협의회는 올해 추가소요재정 규모인 ‘밴드’를 최소 1조5000억원 이상으로 확대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지난해 밴드 규모였던 1조3433억원으로는 누적된 원가 상승분조차 감당하기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의료계는 특히 이번 협상을 단순 수가 인상률 논의가 아니라 ‘1차 의료 생존 문제’로 규정하고 있다. 인건비와 임대료, 의료 소모품 가격 상승이 누적된 상황에서 낮은 수가 구조가 이어질 경우 동네의원과 필수의료 기반 자체가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이다.
대한의사협회는 “재정 안정화라는 명분 아래 인상 폭 최소화에만 집중한 결과 일차의료와 필수의료 붕괴를 초래했다”며 “예방·상담·만성질환 관리 등 일차의료 가치가 제대로 반영되는 보상체계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재정 압박이 커질수록 의료계 내부에서는 현행 수가협상 구조 자체를 손봐야 한다는 목소리도 확대되는 분위기다. 공급자 단체들이 전체 밴드 규모조차 모른 채 협상에 들어가는 이른바 ‘깜깜이 협상’ 구조와, 협상 결렬 시 의료공급자에게 사실상 불이익이 집중되는 방식에 대한 불만이 대표적이다.
지난해 대한개원의협의회는 정부와 공단이 추진했던 ‘환산지수 차등 적용’ 방식에 대해서도 강한 불만을 드러냈다. 필수의료 보상을 명분으로 일부 항목에만 인상분을 집중하면서 실제 의원급 필수의료 기관은 오히려 손실을 봤다는 주장이다. 의료계는 올해도 같은 방식이 반복될 경우 협상 결렬까지 포함한 대응에 나설 수 있다고 경고했다.
건강보험 재정을 둘러싼 책임 공방도 거세지고 있다. 의료계는 건강보험 누적 적립금이 약 30조원에 달하는 데다 정부가 법정 기준대로 지급하지 않은 국고지원금도 약 21조7000억원 규모라고 주장하고 있다. 정부가 부담해야 할 재정 책임은 뒤로한 채 공급자에게만 희생을 떠넘기고 있다는 반발도 커지고 있다.
한 의료계 관계자는 “물가와 최저임금은 매년 큰 폭으로 오르는데 수가는 1~2% 수준에 묶여 있는 구조가 반복되고 있다”며 “필수·지역의료를 살리겠다고 하면서 정작 이를 유지할 최소한의 보상체계는 마련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이번 수가협상은 ‘얼마를 더 올릴 것인가’보다 한국 의료체계를 유지하기 위해 누가 비용을 부담할 것인가를 둘러싼 충돌로 확대되는 모습이다. 정부가 재정 건전성을 앞세울수록 의료계는 필수·지역의료 붕괴 현실을 내세우며 압박 수위를 높이고 있어, 올해 협상은 예년보다 훨씬 험로가 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박근태 대한개원의협의회 회장은 “이번 수가협상은 단순히 수치상의 인상률을 정하는 협상이 아니라 1차 의료의 불씨를 살리고 지역 의료 붕괴를 막는 협상이 돼야 한다”며 “더 이상의 ‘어쩔 수 없는 타결’은 없어야 한다”고 단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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