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제타 홀의 ‘치유의 등불’… 100년 넘어 안산대학교로 이어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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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제타 홀의 ‘치유의 등불’… 100년 넘어 안산대학교로 이어지다

경기일보 2026-05-11 13:33:34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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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대학교 진리관 전경. 안산대 제공
안산대학교 진리관 전경. 안산대 제공

 

개항 이후 처음 세계로 발을 뻗은 인천의 이면에는 가난과 질병 속에서 치료받지 못한 채 고통을 감내해야 했던 여성들의 삶이 있었다. 이에 1921년 로제타 셔우드 홀이 세운 ‘인천부인병원’은 그 침묵을 깨고 ‘사람을 살리는’ 역사를 시작했다. 그 정신은 의료를 넘어 교육으로 이어지며 한 세기의 시간을 관통해 오늘의 안산대까지 이어지고 있다.

 

간호학교 설립을 위해 문교부에 제출한 ‘학교법인 새빛학원 설립허가 요지문. 안산대 제공
간호학교 설립을 위해 문교부에 제출한 ‘학교법인 새빛학원 설립허가 요지문. 안산대 제공

 

■ 산업의 그늘 속에 세워진 여성 전용 병원

 

근대 조선의 관문인 인천은 개항 이후 각국 상선이 드나들며 산업의 중심지로 성장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먼지와 소음 속에서 일하던 여성 노동자들의 고된 삶이 있었다.

 

1890년대 후반 인천항은 전국 각지의 곡물이 인천 정미소에서 도정돼 평양과 일본으로 실려 나갔고 그 중심에 하루 12시간 넘도록 열악한 악조건에서 일하던 여성들이 있었다. 이들은 위생과 안전의 개념조차 없는 환경에서 질병과 부상에 시달렸으며 산업재해와 영양실조, 산후 후유증이 이어졌지만 조선인 여성이 편히 진료받을 수 있는 의료 환경은 사실상 전무했다.

 

당시 인천의 의료기관 대부분은 일본인 중심으로 운영됐고 조선인 여성은 문턱을 넘기 어려웠다. 성리학적 관습까지 더해져 여성들이 남성 의사의 진료를 받는 것 역시 쉽지 않았다.

 

이 현실을 바꾸기 위해 나선 인물이 바로 미국 북감리회 여선교사 로제타 셔우드 홀이다.

 

그는 “여성을 치료하지 않고는 가정을 세울 수 없다”는 신념으로 1921년 인천 율목동에 ‘인천부인병원(Inchon Woman’s Hospital)’을 설립했다. 미국 북감리회 해외여선교부의 지원으로 세워진 인천 최초의 여성 전용 의료기관이었다.

 

홀은 조선인 여의사를 상주시켜 여성들이 안심하고 진료받을 수 있도록 했으며 ‘여성에 의한 여성의 치료’라는 새로운 의료 방식은 당시 사회에 적지 않은 변화를 가져왔다.

 

1924년 선교사 베르타 알프리다 코스트럽이 유아건강연구소를 설립하며 병원의 역할은 더욱 확장됐고 치료를 넘어 복지와 위생교육까지 이어지며 그 공간은 여성과 아이들을 위한 보호와 회복의 장소로 자리 잡았다.

 

인천부인병원은 산업의 굉음 속에서도 인간의 존엄을 지켜낸 ‘치유의 등불’이었고 한국 여성의료와 간호교육의 출발점이 됐다. 인천의 산업이 근대화를 상징했다면 인천부인병원은 그 속에서 피어난 ‘인간화의 시작’이었다.

 

안산대학교 간호학과 학생들이 임상실습을 진행하는 모습. 안산대 제공
안산대학교 간호학과 학생들이 임상실습을 진행하는 모습. 안산대 제공

 

■ 일제강점기와 전쟁의 시대, 의료선교의 끈을 잇다

 

인천부인병원은 작은 진료소에서 출발했지만 분명한 사명을 갖고 있었다.

 

병원은 시간이 지나면서 진료실 넘어 위생교육, 유아 진료를 갖추며 지역 사회에 뿌리를 내렸고 의료의 손길이 닿기 어려웠던 시대에 가장 낮은 자를 위한 헌신과 봉사는 여성과 아이들에게는 가장 가까운 ‘치유의 집’이 됐다.

 

하지만 1930년대 들어 일제는 외국 선교 기관 활동을 강하게 통제하기 시작했고 병원 역시 행정적 제약을 받으며 운영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럼에도 병원의 문은 닫히지 않았다. 선교사들은 신앙과 헌신을 바탕으로 현장을 지켰고 의료선교의 사명은 조용히 이어졌다.

 

이후 전개된 제2차 세계대전은 상황을 더욱 급격하게 변화시켰다. 미국과 일본이 적국 관계가 되면서 인천에 있던 미국 선교사들은 철수를 강요받았고 1944년 인천부인병원은 일본인 관리 아래 ‘인천부 후생병원’으로 강제 전환됐다.

 

의료선교의 불빛이 꺼질 위기에 놓인 순간이었지만 그 불빛은 끝내 사라지지 않았다.

 

억압과 전쟁의 혼란 속 1945년 광복 이후 병원은 다시 제자리를 되찾았으며 1947년 ‘감리교회 부속 인천부인병원’은 재개했다.

 

1953년 인천기독병원 외과 수술실과 병원 전경. 안산대 제공
1953년 인천기독병원 외과 수술실과 병원 전경. 안산대 제공

 

■ 전쟁의 잿더미에서 시작된 ‘교육선교의 씨앗’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인천기독병원 역시 전쟁의 상흔을 피할 수 없었다.

 

전쟁이 끝난 뒤 폭격으로 무너진 건물들 사이로 시민은 질병과 가난 그리고 굶주림에 시달렸다.

 

병원 건물의 절반 이상이 파괴됐고 의약품은 턱없이 부족했지만 미감리교 여선교부는 재건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으며 사회적으로 소외된 이들에 대한 보살핌이 필요한 병원이 다시 문을 열기 시작했다.

 

그렇게 1952년 5월26일 인천기독병원은 재개원했다.

 

미국 여선교부의 지원 아래 ▲내·외과 ▲소아과 ▲산부인과를 중심으로 진료를 시작한 병원은 인천의 유일한 종합병원으로 자리 잡았으며 1960년대 병원은 미군 원조 프로그램(AFAK)의 지원으로 현대식 병동과 진단시설을 갖추며 인천 의료의 중심으로 성장했다.

 

이 시기 병원의 역할은 단순한 치료를 넘어섰다. 무료 진료와 위생교육, 결핵 예방 활동이 꾸준히 이어졌고 의료의 손길이 닿기 어려운 지역까지 찾아가는 이동 진료도 확대됐다.

 

선교사 레나 벨 로빈슨은 이동 진료를 이어갔으며 어린이들을 위한 이동 영화관은 단순한 오락을 넘어 전쟁의 상처를 잊게 하는 위로의 시간이 됐다.

 

전쟁으로 코를 잃은 한 어린이에게 “고쳐주겠다”고 다정히 약속했던 장면은 지금도 병원 기록 속에 남아 있다. 이들의 헌신은 인천기독병원을 단순한 병원이 아닌 의료와 인류애를 함께 실천하는 공간으로 만들었다.

 

지난해 10월 안산대학교 간호학과 학생들이 나이팅게일 선서식을 진행하고 있다. 안산대 제공
지난해 10월 안산대학교 간호학과 학생들이 나이팅게일 선서식을 진행하고 있다. 안산대 제공

 

■ 새빛학원과 안산대

 

1960년대 서독을 파견되는 간호사들이 늘면서 의료 수요의 급증과 함께 간호 인력 부족은 새로운 과제로 떠올랐다.

 

그들의 목표는 단순한 확장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을 회복하는 의료와 교육의 실천이었다.

 

1966년 로버타 G 라이스 선교사의 연례보고서는 당시 인천기독병원이 직면한 현실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환자는 빠르게 늘어나고 있었지만 한국 간호사들은 더 나은 처우를 찾아 서독으로 떠나고 있었다.

 

심각한 인력난에 직면하면서 병원은 더 이상 외부 인력에 의존할 수 없었다.

 

임의선 이사장을 비롯해 문창모, 신봉조, 오귀섭, 강석봉 등은 병원의 미래를 ‘교육’에서 찾았다. 이들은 사람을 살리는 전문인을 양성하는 교육기관을 세워야 한다는 데 뜻을 함께했다.

 

학교법인 새빛학원과 인천간호전문학교 현판식(1971년). 안산대 제공.
학교법인 새빛학원과 인천간호전문학교 현판식(1971년). 안산대 제공.

 

1971년 5월 재단법인 ‘미감리교회대한부인선교부유지재단’은 중요한 결정을 내린다. 인천기독병원의 재산 일체를 새로 설립될 학교법인 ‘새빛학원’에 이양하기로 한 것이다. 이는 단순한 자산 이전이 아니었다. 의료선교에서 교육선교로의 방향 전환을 공식화한 역사적 선택이었다.

 

같은 해 11월27일 정부는 ‘기본재산 무상양도인가’를 승인했다. 이로써 인천기독병원의 재산은 새빛학원으로 이관됐고 의료와 교육이 신앙 공동체 안에서 연결되는 기반이 마련됐다.

 

하지만 학교 설립은 순탄하지 않았다. 1972년 2월 새빛학원은 인천간호전문학교 설립을 위한 예비인가를 신청했지만 교육 시설 미비로 반려됐고 그렇게 첫 시도는 실패했다.

 

하지만 임의선 이사장과 문창모 이사 등 이사진은 매주 회의를 열고 ▲재정 확보 ▲시설 보완 ▲교육 환경 개선 등 문제를 하나씩 해결해 나갔다.

 

그 결과 1972년 12월 마침내 당시 문교부로부터 학교설립 인가를 받는다. 수업연한 3년, 입학정원 40명의 ‘인천간호전문학교’는 그렇게 첫발을 내디뎠다.

 

인터뷰 윤동열 안산대학총장 “지난 100년의 은혜… 100년의 혁신으로 보답”

윤동열 안산대학교 총장. 안산대 제공
윤동열 안산대학교 총장. 안산대 제공

 

안산대는 지난 100년의 역사 속에서 사람을 살리고 키우는 숭고한 소명을 이어왔습니다.

 

1921년 로제타 홀 선교사가 세운 ‘인천부인병원’의 등불을, 2026년 오늘 ‘미래 시대를 선도하는 지식·혁신 플랫폼 대학’이란 비전으로 실현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습니다.

 

안산대의 역사는 단순한 과거의 기록이 아닌 일제의 억압과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꺼지지 않았던 ‘치유와 교육’의 정신은 우리 대학의 경쟁력이자 유전자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역사적 유산을 바탕으로 대학의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전환하고자 합니다.

 

현재 수립하고 있는 ‘AU VISION 2031’은 급변하는 디지털 전환 시대에 대응하는 안산대만의 생존 전략이자 발전 지도입니다.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상아탑에 머물지 않고 지역사회와 산업체가 유기적으로 소통하며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혁신 플랫폼으로 거듭날 것입니다.

 

안산대가 역점을 두고 추진하는 사업은 ‘실무융합 교육 기반의 UBRC 캠퍼스 구축’으로 100년 전 로제타 홀 선교사가 여성과 아동의 삶을 돌봤듯이 이제 우리는 초고령사회의 대안으로 ‘미래형 라이프 서비스 거점’을 꿈꿉니다.

 

대학의 간호·보건·복지 전문 역량을 은퇴자 공동체와 결합한 UBRC는 단순한 주거를 넘어 교육과 의료, 문화가 공존하는 혁신적인 모델이 될 것입니다.

 

이는 우리 대학의 ‘Health & Life 실무융합 교육 특성화’를 실현하는 구체적인 실천이자 지역사회와 전 생애에 걸쳐 동행하고자 하는 우리의 의지입니다. 또 AID(AI, IoT, Data) 기반의 교육 혁신을 통해 학습자들의 미래 직업 역량을 강화하고 지역·산업·대학 거버넌스를 공고히 해 지역 상생의 가치를 확립하겠습니다.

 

특히 안산대의 미래는 ‘치유’에서 ‘교육’으로 그리고 이제 ‘전 생애 라이프 서비스’로 확장되고 있습니다. 지나온 100년의 은혜를 기억하며 다가올 100년의 혁신을 안산대가 책임지고 준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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