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5월 17일 강남역 인근 건물의 화장실에서 한 여성이 살해당했다. 범인이 화장실에 숨어 남성들은 보내고, 여성이 들어올 때까지 기다려 범행을 저질렀다. 이 사건은 많은 여성에게 자신이 '여자라서' 죽을 수도 있다는 감각을 환기시켰다. '묻지마 범죄'로 프레이밍 되었던 살인사건을 젠더 기반 여성 폭력으로 다시 프레이밍했고, 여성이 일상에서 겪는 불안과 공포를 설명하는 언어로 크게 공명했다. 이는 기존의 폭력에 대해 다시 생각하고 변화를 촉구하는 활발한 움직임으로 이어졌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지금, 한국 사회는 얼마나 달라졌을까. 안타깝게도 긍정적으로 답하기 어렵다. 무엇보다 정확한 통계조차 여전히 부족하다. 문제의 심각성과 위험요인을 파악하고 개입해야 할 지점을 찾기 위해서는 신뢰할 수 있는 데이터가 필수적이라는 점이 오래전부터 지적되었지만, 국가 차원의 여성폭력 통계는 여전히 미비하다. 그나마 지난해 말 성평등가족부가 여성폭력통계를 발표했지만, 현실을 포착하기에 부족한 점이 많다. 국가가 오랫동안 믿을만한 통계를 생산하지 않았다는 것은 결국 이 문제를 충분히 측정하고 관리하지 않겠다는 정치적 선택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한국여성의전화는 언론보도를 바탕으로 여성살해 통계를 집계해 왔다(☞관련자료 바로가기). 이에 따르면, 친밀한 관계의 남성 파트너에 의한 여성살해 피해자 수가 10년 전에 비해 2025년에 두 배가 넘었다. 일면식 없는 남성에 의한 여성살해 피해자는 작년 한 해 동안 92명이었다. 언론보도된 사건만 집계해도, 약 4일에 한 명의 여성이 일면식 없는 남성에 의해 살해당한 셈이다. 최근에도 광주에서 스토킹 가해자로 신고된 남성이 이틀 후 일면식 없는 여고생을 살해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여성살해가 예외적 사건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구조적 문제임을 다시 보여준다.
물론 정부가 가만히 있었던 것은 아니다. 여성폭력방지기본법을 제정하면서 여성폭력에 대한 정의를 법제화하고,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정책을 세울 근거와 재원을 확보하게 했다. 2021년부터는 스토킹처벌법이 시행되어 스토킹 범죄에 대한 형사처벌도 가능해졌다. 그 밖에도 지자체는 여성안심귀갓길을 조성했고, 경찰은 스토킹 범죄 대응 강화를 위해 여성안전상담관 제도를 도입하는 등의 조치를 시행했다. 그러나 현실은 바뀌지 않았고, 만남과 이별의 자연스러운 과정에서 여성은 불안에 떨며 '안전하게 이별하는 법' 등을 검색하며 살아가고 있다.
국가는 대체로 언론의 주목을 받은 이후에야 뭔가 조치를 취하는 듯 했고, 이는 주로 사법과 처벌, 보호에 방점이 찍혀있다. 하지만 그나마도 잘 작동하지 않아서 여성 살해를 막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개인을 처벌하고, 또 개인을 보호하는 것에만 초점이 맞춰질수록, 폭력이 구조적 젠더 불평등 속에서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은 오히려 가려진다. 사회경제적 자원의 격차, 가부장적 문화와 젠더 규범 등은 여성을 쉽게 종속적 위치에 놓는 한편, 통제와 지배 등을 남성성의 일부로 승인하는 사회는 여성에 대한 왜곡된 인식과 폭력 위험을 높인다.
강남역 근처 화장실에서 여성을 살해한 가해자는 "여자들이 자신을 무시해왔다"고 진술했다. 살면서 남성에게 무시당한 일은 없었던 걸까. 왜 그는 자신이 받은 좌절과 분노를 여성에게 쏟아냈을까. 광주의 여고생을 살해한 남성은 "사는 게 재미없어" 그랬다고 진술했다. 이러한 동기는 결코 특별하거나 예외적인 것이 아니다. 앞서 언급한 한국여성의전화 보고서에 따르면, "나를 무시하는 것 같아서", "나와 성관계를 해주지 않아서", "기분이 나빠서". "그냥" 등의 이유로 여성을 살해했다. 친밀한 관계에서 여성을 살해한 경우에도 "생일을 챙기지 않아서". "잠꼬대를 해서". "몸이 아파서" 따위를 이유로 들었다. 반대로 이러한 이유로 남성을 살해했다는 여성의 이야기는 우리는 거의 들어본 적이 없다.
이처럼 반복되는 패턴을 개인의 일탈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가해자들의 인식 속에서 여성은 감히 자신을 거부하거나 무시할 수 있는 동등한 존재가 아니었다. 이러한 인식은 분명 사회적 관계, 문화를 통해 공유되는 것이지만, 사회는 이를 조현병, 분노조절장애, 이상 동기 등 몇몇 위험한 개인의 일탈로 치부하고, 정상성의 바깥으로 추방해 버리려 한다. 그럼으로써 구조에 관한 질문은 지워진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사회적 인식과 대응 방식 자체가 구조적 젠더 불평등의 작동을 여실히 보여준다.
구조적 차별이 존재할 때, 우리는 차별로부터 이득을 얻는 다수를 설득해 나가는 정치를 기대하지만 현실은 그 반대다. 당장 제도 정치인들 스스로가 차별의 강력한 수혜자가 아닌가. 지금까지 반복해 왔듯 이번 지방선거를 앞두고도 여성 후보를 별로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 구조적 젠더 불평등의 한 측면을 투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구조적 성차별 자체를 부정하고 여성가족부를 폐지하려 했던 이전 정부와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남성 역차별을 여러 차례 언급한 이재명 정부 역시 구조적 성차별에 개입하기 위한 정책에 무관심한 것은 마찬가지다.
결국 필요한 것은 젠더 불평등 구조에 균열을 내기 위한 담론의 확장이다. 공분을 사는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잠시 여성 안전을 말하고 대책을 내놓지만, 정작 구조 자체는 건드리지 않는 방식은 기만적이다. 그리고 여성 '보호'와, 가해자 '처벌'만 강조하는 구도 속에서 가해자는 괴물 같은 예외적 존재가 되고, 여성은 권리 주체가 아니라 보호받아야 할 대상으로 남는다. 반면 국가는 불평등 구조를 재생산해 온 책임에서 비켜서며, 스스로를 국민을 보호하는 중립적 주체로 위치시킨다.
강남역 사건 이후 10년 간 한국 사회는 '묻지마 살인'을 '여성살해'라는 언어로 다시 이해해 왔다. '운이 나빠서' 살해당한 것이 아니라 '여성이라서' 살해당해 온 것이라는 사실을 이제는 많은 사람이 믿고, 그러한 언어로 문제를 해석하고 있다. 여성살해 사건이 더 이상 개별적 비극으로 소비되지 않고, 여성의 불안이 예민하거나 과장된 것으로 취급되는 구조를 바꾸기 위해서는 더 많은 사람이 구조적 젠더 불평등을 말해야 한다. 여성살해를 비롯한 수많은 사회적 문제를 설명하고, 해결을 모색하는 공적 언어로 자리 잡게 해야 한다. 공론장에서 이러한 언어를 쌓아나가는 것만으로 저절로 구조적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 없이 구조적 문제가 결코 해결될 수 없다는 점 또한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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