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한스경제 전시현 기자 | 미국 의회가 추진 중인 디지털자산 시장구조법, 이른바 ‘클래리티법’이 하원을 통과한 뒤 상원 심사를 앞두면서 가상자산 시장의 시선이 오는 14일(현지 시각) 미 상원 은행위원회로 쏠리고 있다.
다만 하원 문턱을 넘었다고 해서 최종 입법이 임박한 것은 아니다. 상원 은행위를 통과하더라도 상원 본회의 표결과 필요 시 하원과의 문안 조정, 대통령 서명 절차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 5월 14일 상원 심사대…"규칙 세워야 시장도 큰다"
상원 일정부터 순탄치 않았다. 상원 은행위원회는 당초 지난 1월 15일 법안 심사에 들어갈 예정이었지만 하루 전인 14일 “초당적 협상이 계속되고 있다”며 일정을 미뤘다. 이후 팀 스콧 상원 은행위원장이 협상 내용을 반영한 수정안을 공개했고 현재 공식 일정상 오는 14일 하원 발의안 3633호를 다시 다룰 예정이다.
의회 기록에 따르면 이 법안은 지난해 7월 17일 하원에서 294대 134로 가결됐고 같은 해 9월 18일 상원으로 넘어갔다. 그러나 상원은 하원과 상황이 다르다. 여야 간 이견이 여전한 데다 법안 문구를 둘러싼 추가 조정 가능성도 남아 있다. 시장이 14일 상원 은행위 심사를 첫 고비로 보는 이유다.
클래리티법 찬성론의 핵심은 분명하다. 시장은 이미 커졌고 이제 필요한 것은 금지가 아니라 명확한 규칙이라는 것이다. 프렌치 힐 하원 금융서비스위원장은 이 법안을 두고 “디지털자산 생태계에 오랫동안 부족했던 명확성을 가져올 법안”이라고 평가했다. 소비자 보호와 미국의 혁신 경쟁력을 함께 살릴 수 있는 제도 틀이라는 주장이다.
하원 농업위원장 글렌 GT 톰프슨도 비슷한 입장을 내놨다. 그는 클래리티법이 디지털자산 시장과 창업가들이 요구해 온 확실성과 명료성을 제공하는 역사적 조치라고 밝혔다. 소비자를 보호하면서도 기업가 정신을 북돋우고 미국이 글로벌 혁신의 기준을 세우는 데 도움이 될 것이란 설명이다. ‘규칙 없는 시장’의 시대를 끝내야 한다는 게 찬성 진영의 논리다.
상원에서는 팀 스콧 위원장이 가장 적극적이다. 그는 “가족과 중소기업은 명확한 규칙의 혜택을 본다”며 이 법안이 일반 투자자에게 보호와 예측 가능성을 제공하고 범죄자와 해외 적대세력을 단속하는 장치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산업 육성과 투자자 보호, 국가안보를 한 틀 안에 묶어 입법 필요성을 강조한 셈이다.
▲ 민주당도 한목소리는 아니다…"더는 방치 못 한다"
민주당 안에서도 전면 반대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하원 농업위 민주당 간사 앤지 크레이그는 디지털자산이 더 이상 주변부 상품이 아니라 기존 금융체계 안으로 들어오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에 따라 소비자와 개인투자자를 위한 보호장치, 사업자를 위한 기본 규칙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시장을 계속 제도 밖에 둘 수 없다는 현실론에 가깝다.
반대 진영은 클래리티법이 ‘명확성’을 내세우고 있지만 실제로는 기존 금융 규제의 틈을 더 벌릴 수 있다고 보고 있다. 하원 금융서비스위 민주당 간사 맥신 워터스 의원은 이 법안을 아예 “재앙법”이라고 부르며 연방 금융법 체계에 거대한 허점을 만들고 소비자와 투자자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고 비판했다. 기존 증권법상 보호장치를 약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워터스 의원은 특히 디지털상품의 정의와 자기인증 구조가 잘못 설계될 경우, 본래 증권으로 규제받아야 할 상품이 ‘디지털 상품’이라는 이름 아래 규제를 피해 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자금세탁과 테러자금 조달, 각종 사기 위험에도 충분히 대응하지 못할 수 있다는 지적도 내놨다. 제도 정비가 아니라 규제 공백의 제도화가 될 수 있다는 게 반대론의 핵심이다.
민주당의 스티븐 린치 의원도 공식 성명에서 클래리티법과 지니어스법이 금융안정과 국가안보, 소비자 보호를 더 큰 위험에 노출시킬 수 있다고 비판했다. 암호자산의 높은 변동성과 취약한 투자자 보호 장치가 미국인의 재정 생활에 파괴적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주장이다. 찬성 측이 ‘시장 육성’을 말한다면, 반대 측은 ‘규제완화의 위장’을 의심하는 구도다.
▲ 한국, 예금토큰 실험·제도 정비 병행...'프로젝트 한강' 본격 실험
국내에서는 클래리티법 자체를 두고 한국 정부나 한국은행 고위 인사가 공식 찬반 입장을 낸 사례는 확인되지 않았다. 대신 국내은 미국처럼 디지털자산 시장구조를 한꺼번에 재편하기보다, 한국은행의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예금토큰 실험과 금융위원회의 스테이블코인 규율 정비를 병행하는 쪽으로 움직이고 있다.
한국은행의 방향은 비교적 분명하다. 한은은 공식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 페이지를 통해 기관용 디지털화폐를 토대로 한 예금토큰을 정책의 중심축으로 제시하고 있다. 스테이블코인보다 예금토큰이 가치 안정성과 금융시스템 측면에서 더 안전할 수 있다는 인식도 깔려 있다. 가격 변동성이 낮다고 해서 시스템 리스크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판단이다.
대표 사업인 ‘프로젝트 한강’도 이런 기조를 보여준다. 한국은행 설명에 따르면 이 사업은 7개 은행이 참여해 최대 10만명 일반 참가자를 대상으로 예금토큰을 발행·유통하고 실제 상거래 환경에서 결제 기능을 시험하는 방식으로 설계됐다. 예금과 유사한 성격을 지닌 토큰을 QR결제와 전자지갑 등 실제 환경에서 검증하겠다는 것이다.
신현송 총재의 취임사도 같은 방향성과 맞닿아 있다. 신 총재는 프로젝트 한강 2단계 사업을 통해 중앙은행 디지털화폐와 예금토큰의 활용도를 높이고 국제협력을 통해 디지털 지급결제 환경에서도 원화의 위상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동시에 통화제도 혁신이 금융안정을 해치지 않도록 거시건전성 안전장치도 함께 논의하겠다고 했다.
▲ 스테이블코인 확산 땐 '예금 이탈'… 은행권, 긴장
국내 금융권이 더 민감하게 보는 대목은 스테이블코인의 은행권 충격이다. 한국금융연구원은 10일 스테이블코인의 활성화가 은행의 예금 수취·신용 창출·결제 중개라는 3대 핵심 기능을 위협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이대기 한국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국내 은행은 해외보다 예대율이 높고 인터넷전문은행은 요구불예금 의존도가 높아 충격이 더 클 수 있다"고 내다 봤다.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본격 확산할 경우 예금 이탈과 대출 재원 축소, 수수료 수익 감소가 동시에 나타날 수 있다는 진단도 나온다. 결제와 송금 기능 일부를 스테이블코인이 대체하면 인터넷은행이 시중은행보다 더 큰 타격을 받을 수 있다는 분석이다. 혁신의 이름으로 등장한 디지털화폐가 은행권에는 수익성 악화와 유동성 부담의 뇌관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 미국은 '관할 정리', 한국은 '안전판 구축'
이런 점에서 미국과 한국의 접근은 결이 다르다. 미국이 클래리티법을 통해 디지털자산 시장의 관할과 규제 체계를 한꺼번에 정리하려는 데 방점을 찍고 있다면 한국은 예금토큰과 중앙은행 디지털화폐 실험을 병행하면서 스테이블코인이 금융권에 미칠 충격을 제도적으로 흡수할 안전판을 먼저 고민하는 흐름이다. 미국이 ‘누가 무엇을 규제할 것인가’를 서두른다면 한국은 ‘어떤 디지털화폐를 어떤 틀 안에서 운용할 것인가’를 먼저 따지는 셈이다.
금융당국도 제도 정비에 속도를 내고 있다. 금융위원회 측은 제1차 가상자산위원회에서 혁신과 안정의 균형을 맞추는 방향으로 정책을 추진해 왔다고 밝혔고 지난 3월 회의에서는 스테이블코인과 사업자 규제, 거래 규제를 포괄하는 ‘가상자산 2단계 통합법’ 마련에 착수했다고 공식화했다. 미국의 입법이 시장 질서 재편의 신호탄이 될 경우 국내 제도 설계 역시 더 이상 늦출 수 없다는 관측이 나온다.
디지털자산 업계 한 전문가는 “미국은 시장의 룰을 먼저 세우겠다는 쪽이고, 한국은 금융안정 훼손을 막을 장치부터 점검하는 쪽”이라며 “스테이블코인이 제도권 혁신으로 자리 잡을지, 은행권 자금 이탈과 수익성 악화를 키우는 변수로 번질지는 결국 입법과 감독 체계가 얼마나 촘촘하게 설계되느냐에 달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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