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뉴스투데이 김진영 기자] 한때 “중국 가전은 저렴하지만, 품질은 떨어진다”는 인식이 강했지만, 최근에는 분위기가 달라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중국 업체들이 가격 경쟁력을 넘어 디자인과 기술, 브랜드 경쟁력까지 확보하면서 삼성전자와 LG전자의 핵심 시장을 빠르게 잠식하고 있어서다. 삼성전자가 중국 생활가전·TV 판매 중단을 공식화하고, LG전자가 중국 가정용 에어컨 시장 철수를 검토하는 배경에도 이 같은 산업 구조 변화가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10일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최근 중국 내 TV·생활가전 판매 종료 방침을 정하고 관련 절차를 진행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냉장고·세탁기·에어컨 생산시설 일부는 유지하되, 중국 내 판매보다는 수출 생산 거점 역할에 무게가 실릴 가능성이 거론된다. LG전자 역시 2020년 이후 중국에서 가정용 에어컨 판매를 사실상 중단한 상태다. 지난해 시장 재진입 가능성도 검토했지만 수익성 확보가 쉽지 않다고 판단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업계 안팎에서는 사실상 철수 방향으로 무게가 실리고 있다는 분위기도 감지된다.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중국은 한국 가전업계의 핵심 성장 시장 가운데 하나로 꼽혔다. 그러나 최근에는 시장 환경 자체가 크게 바뀌고 있다는 진단이 이어지고 있다. 중국 정부가 기존 제품을 새 제품으로 교체할 경우 보조금을 지급하는 ‘이구환신(以旧换新)’ 정책을 통해 약 3000억위안 규모의 재정을 투입하며 가전 교체 수요를 끌어올렸고, 현지 업체들은 이를 발판으로 빠르게 몸집을 키웠기 때문이다.
메이디·하이얼·하이센스·TCL 등 중국 가전업체들은 정부 보조금과 거대한 내수 시장, 자체 공급망을 기반으로 빠르게 몸집을 불려 왔다. 여기에 일본·미국·유럽 가전 브랜드를 잇달아 인수하며 글로벌 시장에서 브랜드 인지도와 유통 경쟁력까지 빠르게 확대하고 있다는 반응도 적지 않다.
과거 한국 기업들이 주도했던 프리미엄 TV 시장에서도 중국 업체들의 존재감이 커지고 있다. 중국 스카이워스는 최근 초슬림 아트TV를 미국 시장에 출시했고, 하이센스는 이동형 스크린 제품 출시를 예고했다. 삼성전자의 ‘더 프레임’, LG전자의 ‘스탠바이미’를 연상시키는 콘셉트다. 업계에서는 중국 업체들이 단순 저가 제품을 넘어 라인업과 디자인, 사용자 경험 영역까지 빠르게 확장하고 있다는 예측이 나온다.
업계에서는 가격 경쟁력까지 더해졌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비슷한 디자인과 기능을 갖추고도 판매 가격은 삼성·LG전자보다 낮은 수준이기 때문이다. 중국 업체들이 제조자개발생산(ODM)과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을 통해 글로벌 공급망 경험을 축적하면서 생산 효율과 제조 경쟁력까지 함께 끌어올렸다는 것이다.
한 가전업계 관계자는 “이제 중국 시장은 단순한 저가 시장이 아니라 정책·내수·생산·브랜드를 모두 갖춘 구조로 바뀌었다”며 “중국 업체들이 프리미엄 영역까지 빠르게 잠식하면서 외산 기업으로서는 갈수록 버티기 어려운 시장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과거처럼 기술력만으로 격차를 유지하기 어려운 국면에 들어섰다는 점에서 업계 위기감도 커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삼성전자와 LG전자 역시 시장 변화에 맞춰 사업 구조 재편에 속도를 내는 모습이다. 삼성전자는 최근 TV 사업 수장을 교체하며 영상디스플레이(VD) 사업 전략 변화에 나섰다. 구글 출신의 이원진 사장을 VD사업부장으로 선임한 것을 두고 업계에서는 TV 사업의 무게 중심을 단순 하드웨어 판매에서 광고·콘텐츠·서비스 기반 플랫폼 사업으로 옮기려는 움직임으로 보고 있다. 삼성 TV 플러스와 아트스토어 등 서비스 사업 확대 역시 같은 흐름으로 해석된다.
생활가전 사업에서는 저수익 제품군 구조조정과 함께 일부 OEM·ODM 확대 방안도 거론된다. 중국 업체들의 제조 경쟁력이 빠르게 강화되면서 직접 생산 중심 구조보다는 브랜드·플랫폼·소프트웨어 중심으로 사업 무게를 옮기려는 움직임으로 읽힌다. 제조 자체만으로 수익성을 확보하기 어려워진 만큼, 앞으로는 서비스와 운영 역량이 핵심 경쟁 요소로 떠오를 것이라는 전망도 제기된다.
반면 LG전자는 상대적으로 냉난방공조(HVAC), B2B, 구독 사업 확대에 집중하고 있다. 중국 의존도를 줄이는 대신 인도·유럽·동남아 시장 공략을 강화하는 전략이다. 실제 LG전자는 인도에서 현지 맞춤형 제품으로 시장 1위를 유지, 유럽에서는 고효율 공조 제품 중심으로 판매를 확대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럭셔리 빌트인 시장 공략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최근 미국 플로리다의 초고가 주택 프로젝트에 TV·HVAC·빌트인 가전 등을 대거 공급한 것도 이런 전략의 연장선으로 풀이된다.
중국 현지에서는 삼성의 철수를 두고 “탈중국이 아니라 산업 구조 변화에 따른 전략 조정”이라는 의견도 나온다.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와 현지 매체들은 삼성이 소비가전 대신 반도체·의료기기·B2B 중심으로 사업 구조를 재편하고 있다고 짚었다. 실제 삼성은 중국 내 반도체와 연구개발(R&D) 투자까지 중단한 것은 아니다.
업계에서는 이번 흐름이 단순 시장 점유율 변화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보고 있다. 한국 가전 산업이 TV·냉장고·세탁기 같은 ‘제품 판매 중심 시대’를 지나 플랫폼·콘텐츠·AI·에너지 효율·운영 서비스 중심 산업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중국이 제조 경쟁력을 장악한 상황에서 앞으로 승부처는 하드웨어 자체보다 AI 서비스와 플랫폼, B2B 운영 역량이 될 가능성이 크다”며 “한국 가전업계도 결국 제조 중심 경쟁에서 벗어나 구독·콘텐츠·에너지 관리 같은 지속 수익형 사업 구조를 얼마나 빠르게 구축하느냐가 중요해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단순 제품 판매만으로는 중국과의 가격 경쟁을 버티기 어려워진 만큼, 고객 경험과 서비스 생태계를 묶는 방향으로 산업 구조가 재편될 가능성이 크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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