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0~11:00 대도상가 탐방하기
평일 오전 9시였지만 회현역 일대는 이미 젊은이와 외국인들로 활기가 넘쳤다. 하루 종일 이곳을 돌아다니며 물건을 고를 심산이었기에 가벼운 물건들을 파는 상가부터 둘러보기로 했다. 대도상가 1층과 지층은 수입 식료품과 영양제, 위스키를 파는 상점이 줄지어 있다. 일본에 여행 가면 쓸어 오던 각종 소스와 향신료가 한데 모여 있는 걸 보니 일본의 돈키호테 식품 코너가 따로 없었다. 미국산 맥코믹 후추도 이곳에서 건진 것. 한때 품절 대란이 났던 일본 위스키 야마자키 12년도 이곳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도 내 눈길을 끌었던 건 가게마다 특색 있게 수입해 온 미니어처 위스키 컬렉션이었다. 한정판으로 출시되거나 특별하게 디자인된 미니 보틀에 담긴 위스키들은 소장 가치가 있어 웬만한 본품보다 훨씬 비싼 가격을 호가했다. 크리스마스 한정판으로 출시돼 산타클로스 보틀에 담긴 코냑은 알코올이 거의 다 날아가 빈 병에 가까웠지만 소장 가치는 충분했다. 많은 위스키 상회 중 가장 많은 미니어처 컬렉션을 보유한 곳은 대도상가 D동 지하 1층에 위치한 ‘광천상회’니 위스키 러버들은 메모해두자.
11:00~13:00 질 좋은 국산 안경을 찾아서!
남대문시장에 안경원이 모여 있다는 사실은 이번 탐방기를 준비하며 알게 됐다. 1970년대부터 남대문시장은 도매 물건을 바로 가져와 팔았고, 부품 상가와 기술자들이 몰리며 자연스레 안경 상권이 강화됐다는 게 돈키호테 안경원 사장님의 설명이었다. 철 지난 뿔테 안경만 많을 것 같은 안경점 외관과 달리 그 안은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2026 S/S 질샌더 안경부터 생 로랑 베스트셀러 선글라스, 제니가 앰배서더인 레이밴 선글라스가 즐비했다. 하지만 이곳에 온 이유는 값비싼 디자이너 브랜드 제품을 사기 위해서가 아니다. 트렌드는 반영하되 국내에서 생산된 제품이어야 하며, 품질에선 타협이 없고 무엇보다 합리적인 가격의 안경을 찾으러 온 것. 이것저것 구경하다 보면 사장님이 대뜸 말을 걸어온다. “어떤 거 찾어?” 질 좋고 멋진 안경을 찾고 있다고 답하니 마치 〈해리 포터〉 속 올리밴더 지팡이 상점 할아버지처럼 수많은 안경 상자 더미 속에서 하나를 골라 들었다. “이거 서연이가 썼던 거”라며 건네주신다. “네?” 하고 되물으면 “트리플에스 서연이 몰라?” 아이돌에 박학하시기까지 하다. 검색해보니 서연이가 썼다던 그 안경은 공식 홈페이지보다 30%나 저렴하게 판매하고 있었다. 추천해주신 안경이 썩 마음에 들긴 했지만 좀 더 둘러본 뒤 구매하고 싶은 마음에 옆 가게로 넘어갔다. 해외 명품 빈티지 안경을 균일가 15만원에 판매하는 곳이었다. 휴고 보스, 일제 안경이 대부분이었지만 잘 찾으면 구찌, 비비안 웨스트우드, 이자벨 마랑 같은 경쟁력 있는 브랜드나 괴짜처럼 독특한 디자인의 안경을 발굴할 수 있다. 그러나 실용주의를 따지는 나로서는 빈티지 안경보다는 거칠게 사용해도 끄떡없는 내구성 좋은 안경을 찾는 게 우선이었다. 다음 안경점으로! 입구로 들어서자마자 가장 먼저 보이는 매끈한 선글라스에 바로 눈길이 갔다. 내가 시선 고정한 바로 그 선글라스를 낚아채듯 집어 든 사람은 남대문시장 탐방에 동행한 〈코스모폴리탄〉 아트팀 선배였다. 보는 눈이 잘 맞는 일행과의 쇼핑은 불행 반 다행 반으로 소비를 부추긴다. 선배는 고민도 없이 그 선글라스를 17만원에 구매했다. 이 역시 공식 홈페이지를 찾아보니 원가 25만원으로 이미 품절인 제품이었다. 안경점을 나서는데 입구에 진열된 균일가 10달러 선글라스에 한 번 더 눈이 갔다. 트렌디한 프레임의 틴티드 선글라스를 1만3천원에 추가로 구입했다. 만족스러운 소비를 마치고 나오며 서로의 모습을 확인했다. 어떤 게 10달러짜리인지 구분이 잘 안 가긴 했지만, 만족스러웠으니 됐다!
13:00~14:00 가장 남대문시장스러운 한 끼
70년 동안 한자리를 지켜온 ‘진주집’은 꼬리곰탕과 설렁탕을 파는 곳이다. 갈치조림골목 초입에 위치한 작은 노포로 미닫이문을 열면 구수한 곰탕 사골 냄새가 맛있게 퍼진다. 뜨끈한 국밥으로 속을 단단히 채우고 나면 커피가 당기는 법. 지척에 위치한 ‘가배도’는 남대문시장 감성을 재현한 카페다. 옛 근대식 건물을 그대로 살려 고즈넉한 분위기가 특징. 이곳에서 판매하는 추억의 간식인 눈깔사탕, 호박엿 사탕, 유가 캔디 등은 저울에 무게를 달아 가격을 매긴다. 정겨운 옥춘사탕을 모티프로 만든 스마트폰 그립톡도 이곳에서 구매한 것.
14:00~15:00 현대기물에서 그릇 파묘하기
남대문시장이 ‘핫플’로 떠오른 데 한몫한 것은 다름 아닌 ‘그릇 쇼핑’이다. 중앙상가 C동 3층엔 그릇 도매 상가가 몰려 있다. 귀여운 일러스트가 그려진 접시와 빈티지한 찻잔을 찾는 재미도 있고, 컵을 고르면 즉석에서 원하는 글귀나 이미지를 새겨주는 상점도 있었다. 우리는 곧장 그릇 상점계의 핫플인 ‘현대기물’로 향했다. 새로 도착한 신상 접시들이 일사불란한 손길로 매대에 펼쳐지고 있었고, 바구니를 든 젊은이들은 정신없이 그릇을 쓸어 담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언제부터 젠지들이 이토록 그릇에 진심이었지? 이곳은 도매 전문 업체기 때문에 매대에 재고를 많이 가져다 두지 않는다. 희소성이 있어 보이는 탓일까? 마음에 드는 그릇을 찾으면 고민 없이 장바구니에 담아버렸다. 종류가 어찌나 많은지 하루 종일 그릇 쇼핑만 해도 시간이 ‘순삭’될 것 같았다. 어느새 내 손에는 귀고리나 차 키 등 소지품을 올려두면 딱 좋을 것 같은 트레이가 색깔별로 들려 있었다.
15:00~17:00 행운에 진심인 민족이 만든 민속공예품
민속공예품 상점이 밀집된 대도아케이드 D동 2층에서 가장 많이 보였던 것은 다름 아닌 행운의 부적, 액막이 복어, 풍경 같은 액막이 아이템들이었다. 몇 년 전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럭키 참’ 아이템이 남대문 상가에도 고스란히 반영된 것. 이곳은 외국인 여행객을 위한 온갖 기념품부터 장인이 한 땀 한 땀 만드는 하이 퀄리티 공예품까지 아우른다. 영롱한 나전칠기 자개함에 푹 빠져 구경하고 있는데 별안간 사장님이 다가와 조그마한 복주머니 열쇠고리를 불쑥 내밀었다. 건네받고 얼떨떨한 표정을 짓자 사장님은 뒤도 안 돌아보며 “아무렴 그거 하나 못 줄까”라고 읊조리셨다. 시장의 정을 온몸으로 느끼는 순간이었다. 20만원이 넘는 나전칠기 보석함을 사는 대신 우리는 손바닥만 한 약통 자개함을 골랐다. 비타민을 소분해 다니기 딱이라며 좋아했더니 사장님은 “우리나라 사람들만 그걸 약통으로 쓰더라고. 외국인들은 액세서리 케이스로 생각해요”라며 웃었다. 점포들의 셔터가 하나둘 내려가기 시작한 오후 4시.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천연석 액세서리 상가다. 은으로 만들었거나 도금이 된 것들은 비싸서 엄두도 못 냈지만 유화 처리를 해 빈티지하게 마감한 제품은 비교적 저렴했다. “이런 걸 앤틱했다 그래요~. 변색도 없고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게 멋스럽죠.” 판도라 천연석 주얼리 상점 사장님의 설명이다. 터키석으로 만든 목걸이와 장미석으로 만든 반지, 비즈 목걸이까지 골랐는데 3만원이 채 넘지 않았다. ‘혜자롭다!’ 하루 종일 이 말을 몇 번이나 되뇌었는지 모르겠다.
두둑해진 장바구니를 보자 그제야 어깨가 무거웠고, 다리가 아파왔다. 그런데 아직 남대문시장의 반의반도 못 돌아봤다는 것이 팩트다. 남대문시장은 한 번 방문으로 끝낼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걸으면 걸을수록, 파헤칠수록, 발품 팔수록 신세계를 경험하는 화수분 같은 곳이다. 그러니 N번이고 재방문해야 마땅하다. 젠지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이유를 단번에 납득할 수 있었다. 과하게 콘셉추얼한 플레이스, 극도로 미래 지향적인 비주얼이나 만들어진 빈티지 따위에 너무 많이 노출된 탓에 날것 그대로에 매혹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일지도. 세월의 흔적이 여과 없이 묻은 원초적이고도 별천지 세상 남대문이 반갑게 느껴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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