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3일 지방선거와 동시에 실시하려던 헌법 개정 국민투표가 국민의힘의 강력한 반대로 결국 무산됐다. 국회 승인 없는 비상계엄을 무효화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이번 개헌안은 대통령 권력구조 개편 등 민감한 쟁점이 빠져 있어 1987년 직선제 개헌 이후 39년 만에 성공 가능성이 그 어느 때보다 높다는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국민의힘이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라는 초강수를 두며 표결 자체를 봉쇄함에 따라 개헌 논의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국민의힘은 지방선거 이후 권력구조 개편까지 포함한 전면 개헌을 주장하고 있지만, 정치권 안팎에서는 이번 사태로 개헌 동력 자체가 크게 상실될 수 있다는 우려가 깊다.
우원식 의장, 눈물의 무산 선언… "국민의힘, 역사의 죄인 될 것"
우원식 국회의장은 8일 국회 본회의 개의를 선언한 후, "헌법 개정안을 상정하지 않겠다. 오는 6월 3일 개헌 국민투표 시행을 위한 절차는 오늘로서 중단됐다"고 공식 선언했다. 우 의장은 전날 국민의힘 의원들의 전원 표결 불참으로 개헌안 처리가 '투표 불성립'으로 끝나자, 10일까지 본회의를 계속 열어 개헌안 표결을 재시도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바 있다.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한 사진 / 뉴스1
그러나 국민의힘이 개헌안은 물론 본회의에 상정된 모든 법안에 대해 필리버스터로 대응하겠다고 배수진을 치자, 우 의장은 현실적으로 더 이상의 개헌안 처리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개헌안 의결을 위해서는 재적 의원 3분의 2인 191명의 찬성이 필요한데, 국민의힘(106석)에서 최소 12명의 이탈표가 나오지 않는 이상 통과가 불가능한 구조였다.
우 의장은 개의 선언 후 16분간 할애하여 개헌 표결을 막아선 국민의힘을 향해 강도 높은 비판을 쏟아냈다. 그는 "개헌의 필요성과 시급성에 대한 국민적 요구가 분명하고, 여야 간 얼마든지 합의가 가능한 내용에 반대가 전혀 없는 개헌안조차 정략과 억지 주장을 끌어들여 무산시켰다"며 강력한 유감을 표했다. 이어 "불법 계엄에 반대한다는 소리는 다 어디 갔느냐"며 "만약 수십 년 후에 이런 불법 내란이 또 벌어진다면 국민의힘은 역사의 죄인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번 달 29일 임기를 마치는 우 의장은 본회의 종료 선언 후 눈물을 훔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본회의장 고성·야유 아수라장… 여야, 네 탓 공방 격화
우 의장의 발언 도중 국민의힘 의원들 사이에서는 "마음대로 하지 말라", "법부터 지키라"는 고성과 야유가 터져 나왔고,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은 "몽니 정당"이라고 맞받아치며 본회의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본회의 종료 후에도 설전은 이어졌다. 국민의힘 최수진 원내수석대변인과 박충권 의원은 "졸업여행 간다"며 우 의장이 10일부터 예정된 네덜란드와 케냐 순방 일정 때문에 개헌안 상정을 안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국회의장실은 "저급한 인식과 태도"라며 즉각적인 사과를 요구했다.
여야는 개헌안 무산의 책임을 서로에게 돌리며 공방을 이어갔다. 민주당 한병도 원내대표는 "개헌을 필리버스터까지 동원해서 막은 것은 국민으로부터 큰 심판을 받을 것"이라며 필리버스터 악용을 막기 위한 국회법 개정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반면 국민의힘 송언석 원내대표는 "계엄 옹호 정당이라는 고약한 프레임을 씌워 지방선거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려는 저의"라고 맞섰다. 청와대 강유정 수석대변인은 서면 브리핑을 통해 "국가의 안위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개헌마저 반대한 이유를 납득하기 어렵다"며 후반기 국회에서 책임 있는 자세로 개헌 논의를 이어갈 것을 요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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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건너간 단계적 개헌… 차기 개헌 논의 수렁 빠지나
국민의힘은 지방선거 이후 개헌특위를 구성해 권력구조 개편을 포함한 개헌 논의에 참여하겠다고 밝혔지만, 전문가들의 시각은 회의적이다. 2028년 총선에 맞춰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힌 권력구조 개편 개헌안을 통과시키는 것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다는 관측이다. 1987년 개헌 이후 한 정권 임기 내에 개헌 시도가 두 차례 본격적으로 추진된 전례도 없다.
조진만 덕성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차기 대선과 총선이 가까워지는 2028년 무렵에는 권력 쟁취를 위한 여야의 이해관계가 지금보다 훨씬 첨예하게 맞물릴 것"이라며 "상대적으로 내용적 이견이 크지 않았던 단계적 개헌안도 처리하지 못한 상황에서 다음 개헌 논의는 더욱 수렁에 빠져들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결국 이번 무산으로 39년 만에 찾아왔던 개헌의 기회는 정쟁 속에 허무하게 사라졌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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