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진 ‘코리아 풀’, 스포츠 중계권 전쟁의 그림자[스포츠리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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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코리아 풀’, 스포츠 중계권 전쟁의 그림자[스포츠리터치]

이데일리 2026-05-09 10:31:57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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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가 대한민국 스포츠의 미래를 고민합니다. 젊고 유망한 연구자들이 현장의 문제를 날카롭게 진단하고, 새로운 대안을 제시합니다. 변화의 목소리가 만드는 스포츠의 밝은 내일을 칼럼에서 만나보세요.[편집자 주]

[김현정 칼럼니스트] 올림픽이나 월드컵 같은 대형 스포츠 이벤트는 수십 년간 지상파 3사가 로고를 나란히 거는 공동중계체제 안에서 영유해왔다. ‘스포츠는 모두의 것’이라는 익숙한 명제는 스포츠라는 공적 자원을 사회 구성원 모두가 차별 없이 향유한다는 ‘보편적 시청권’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최근 JTBC가 단행한 중계권 독점 입찰과 그에 대응하는 레거시 미디어들의 날선 보복전은 이 시스템이 매우 위태로운 전략적 균형 위에 서 있었음을 폭로하고 있다. 이 혼돈을 단순히 플랫폼 간의 시장점유율 쟁탈전이나 거대 자본의 유입에 따른 일시적 진통으로만 볼 수는 없다. 각 주체가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선택이 어떻게 집단 전체의 후생을 파괴하는지, 그 공멸의 늪에서 어떻게 다시 협력의 실마리를 복구할 수 있는지를 고찰하는 일은 이제 스포츠 산업의 생존과 직결된 과제가 되었다.

미국의 정치학자 로버트 엑설로드. 사진=로버트 엑설로드 개인 홈페이지


로버트 엑설로드 '협력의 진화'


여기서 우리는 로버트 엑설로드(Robert Axelrod)가 그의 책 ‘협력의 진화’를 통해 설파한 ‘반복되는 죄수의 딜레마’라는 렌즈를 빌려오게 된다. 그가 증명한 이기적 개체들의 생존 메커니즘은 현재 대한민국 스포츠 중계권 시장이라는 거대한 게임판 위에서 벌어지는 배신과 응징, 재협력의 드라마를 해석할 가장 명확한 인문학적 당위성을 제공한다.

△‘코리아풀’의 정적인 평화와 신사적 전략의 임계점

과거 지상파 3사는 ‘스포츠중계발전협의회(KS)’, 이른바 ‘코리아 풀’을 구측했다. 엑설로드가 규정한 ‘신사적(Nice) 전략’이 한국적 미디어 지형 속에서 발현된 독특한 형태의 카르텔이었다. 이들은 독점입찰이 가져올 중계권료의 천문학적 상승과 그로 인한 수익성 악화라는 공멸의 가능성을 인지하고 있었다. 협력을 통해 비용을 통제하고, 명분과 실익을 공유하는 이 방식을 택했다. 엑설로드의 실험에서 먼저 배신하지 않는 개체들이 반복되는 게임 속에서 집단적 안정을 구가하듯, 수십 년간 한국 스포츠 미디어의 정적인 평화 체제를 지탱해 왔다.

하지만 이 평화는 구성원 간의 자발적 윤리나 신뢰 위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외부 경쟁자가 진입하기 어려운 시장의 폐쇄성과 독점적 지위에 기댔던 측면이 크다. 엑설로드의 이론에 따르면 협력은 배신을 즉각적으로 응징할 수 있을 때 유지된다. 하지만 지상파 중심의 닫힌 게임판에서는 배신의 기회비용 자체가 매우 높았다. 그렇기에 역설적인 안정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들만으로도 충분했던 ‘이너서클의 시대’의 자화상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JTBC라는 뉴미디어 자본의 등장은 일개 플레이어의 추가가 아니다. 게임의 규칙 자체를 전복시키는 ‘외생적 충격’이다. JTBC는 2026년부터 2032년까지 올림픽과 월드컵 중계권을 선제적으로 독점 확보했다. 기존의 관습적 협력 체제에 대한 ‘최후통첩’이었다. 엑설로드의 관점에서 볼 때, 협력이 주는 장기적 배당보다 단독 행위가 가져올 단기적 점유율 상승과 브랜드 가치 선점의 이익이 압도적이라고 판단한 ‘전략적 이탈(Defection)’의 전형이다. ‘미래의 그림자’보다 현재의 선점이 중요해진 순간, 수십 년을 이어온 신사적 협력의 임계점은 허망하게 무너져 내렸다.

이미지=퍼플렉시티 AI 생성


△‘팃포탯’의 처절한 실행과 보복의 악순환

문제는 JTBC가 단행한 이탈이 지난 수십 년간 미디어 생태계에 축적된 ‘신뢰의 자본’을 단숨에 잠식했다는 점이다. 시장 전체를 상호보복의 악순환으로 밀어 넣었다. 지상파 3사는 재판매 협상을 거부하고 법적 대응과 여론전을 병행하며 보여준 격렬하게 저항했다. 엑설로드가 강조한 ‘팃 포탯(Tit-for-Tat, 맞대응)’ 전략의 가장 처절한 실행사례다. 상대의 배신에 대해 즉각적이고 비타협적인 보복을 가했다. 배신의 대가가 결코 가볍지 않음을 알리는 전략이다. 역설적으로 협력이 실종된 시장이 도달하게 되는 ‘나쁜 균형(Bad Equilibrium)’의 실체를 명확히 드러냈다.

지상파 방송사들은 JTBC의 독점권 확보를 두고 “막대한 자본을 앞세운 보편적 시청권의 침탈”이라 비판했다. 한국방송협회는 성명을 통해 “JTBC의 독점중계권 확보는 국가적 자산인 스포츠 이벤트를 상업적 이익의 도구로 전락시킨 행위”라 맹비난했다. 방송권 재판매 협상 과정에서 단호한 거부 의사를 명확히 했다. 협력 체계를 이탈한 주체에게는 어떠한 관용도 베풀지 않겠다는 신호를 시장 전체에 보냈다.

이러한 파국 속에서 시청자의 후생이라는 공적 가치는 철저히 외면당했다. 독점권을 쥔 주체는 막대한 중계권료 투입 대비 광고시장의 냉대와 ‘독점자’라는 여론의 비난이라는 이중고에 시달렸다. 배제된 지상파는 플랫폼 영향력의 급격한 약화라는 치명상을 입었다.

스포츠를 구매 가능한 배타적 콘텐츠로 치부하는 자본의 논리와 보편적 시청권을 기득권 수호의 방패이자 보복의 명분으로 삼는 레거시 미디어의 논리가 평행선을 달렸다. 그동안 우리가 함께 향유하던 ‘사회적 공유지(Social Commons)’로서 스포츠는 그 형체가 희박해졌다.

이미지=제미나이 AI 생성


△‘미래의 그림자’가 가리키는 협력의 재구성

로버트 엑설로드는 개체들이 눈앞의 이익에 매몰돼 미래의 가치를 낮게 평가할 때 협력이 붕괴된다고 경고했다. 현재의 중계권 전쟁 역시 각 주체가 서로의 생존을 위협하는 약탈적 경쟁자로만 인식할 뿐이다. 스포츠 생태계의 지속가능성이라는 ‘미래의 그림자(Shadow of the Future)’를 외면해왔다는 점에서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최근 JTBC와 KBS가 2026 월드컵 중계권 재판매에 극적으로 합의한 현상은 팃포탯 전략이 가진 또 다른 속성인 ‘관용(Forgiveness)’의 발현으로 읽힌다.

KBS의 중계권 복귀는 일시적 휴전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독점권을 쥔 주체는 지상파의 광범위한 송출망과 제작 노하우 없이는 대형 이벤트의 사회적 파급력을 담보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레거시 미디어는 플랫폼의 독점적 권위가 무너진 시대에 단절된 고립은 곧 도태라는 사실을 절감한 것이다. 엑설로드에 따르면, 미래에 다시 만날 확률이 충분히 높다는 것을 인지할 때 개체들은 비로소 보복을 멈추고 협력의 이득을 계산하기 시작한다. 이번 타결은 서로가 서로의 생존에 기여해야만 하는 ‘공진화(Co-evolution)’의 필연성을 인정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진정한 의미의 진화는 단순히 ‘중계권을 나누어 갖는’ 배분의 문제를 넘어서야 한다. 플랫폼 간의 기술적 결합과 제작 역량의 유기적 공유를 통해 시청자에게 최적의 가치를 전달하는 새로운 협력 모델을 자생적으로 구축할 때 완성된다. 그래서 엑설로드가 우리에게 던진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는 찰나의 전리품을 위해 배신과 보복의 루프에 갇힐 것인가. 아니면 더 긴 미래를 위해 다시 협력의 손을 잡을 것인가.

스포츠 중계권의 진화는 누군가의 독점이 답이 아니다. 더 많은 이가 함께 열광할 수 있는 견고한 시스템을 구축하는 지혜의 끝에서 완성된다. 이제는 보편적 시청권이라는 당위 뒤에 숨은 기득권 싸움을 멈춰야 한다. 미디어 환경의 격변 속에서도 스포츠가 지닌 공공의 가치를 어떻게 지속시킬 것인가라는 본질적인 답을 내놓아야 한다. 엑설로드의 실험이 증명했듯 최후의 승자는 가장 이기적인 배신자가 아니다. 가장 끈기 있게 협력을 설계한 자들의 몫이다.

▲김현정 칼럼니스트. 한국외대에서 문화콘텐츠학 박사 수료 후 현재 작은 이야기 발전쇼 대표, 한국 과학창의재단 사이언스타임즈 기자, 한국스포츠과학원 공동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스포츠 콘텐츠 비평, 스포츠를 통한 국제교류, 스포츠 주제의 미디어 등에 관심을 갖고 있다.


▲ 더 스파크(The SPARC)는 스포츠 정책 연구를 위해 모인 신진 연구자 그룹입니다. 젊은 연구자들이 모여 스포츠와 사회의 다양한 이슈를 탐구하며, 새로운 정책 대안을 모색합니다. 이 그룹은 학문적 연구와 현장의 경험을 연결해 미래 지향적인 스포츠 정책 담론을 만들어가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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