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연금 시장을 둘러싼 금융권 경쟁이 단순 수익 경쟁을 넘어 '장기 고객 선점 전쟁'으로 확산되고 있다. 당장 수익이 크지 않더라도 먼저 고객 자산을 확보해 수십 년 동안 묶어 두는 금융사가 결국 미래 시장을 지배할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8일 은행연합회와 금융감독원 퇴직연금 공시에 따르면, 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은행, 5대 시중은행의 올해 1분기 말 기준 퇴직연금 적립금 규모는 총 212조4108억원이다. 이는 1년 전보다 16.7% 증가한 수준이다. 신한은행이 54조7391억원으로 가장 많았고 KB국민은행과 하나은행도 각각 50조원 안팎까지 규모를 키우며 경쟁이 격화되는 모습이다.
금융권이 이처럼 퇴직연금 사업에 사활을 거는 배경에는 '장기 자금'이라는 특수성이 자리한다. 퇴직연금은 가입 이후 수십 년 동안 유지되는 구조인 만큼 초기에는 수익성이 낮더라도 시간이 지날수록 운용자산(AUM)이 누적되며 금융사의 핵심 기반으로 작용하게 된다.
특히 최근에는 개인형퇴직연금(IRP)을 중심으로 가입자가 직접 상품을 선택하는 비중이 늘어나면서 경쟁 구도도 빠르게 바뀌고 있다. 과거 기업 단위 계약 확보가 핵심이었다면 현재는 개인 고객을 얼마나 오래 플랫폼 안에 묶어 두느냐가 핵심 경쟁력으로 떠오른 것이다.
업계에서는 퇴직연금 시장 경쟁이 이미 '예금 경쟁'이 아니라 플랫폼 경쟁 단계로 넘어갔다고 보고 있다. 실제 주요 금융사들은 상장지수펀드(ETF), 로보어드바이저, 타깃데이트펀드(TDF), 연금 콘텐츠 서비스 등을 확대하며 고객 체류 시간을 늘리는 데 집중하고 있다. 단순히 계좌 수를 늘리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펀드·대체투자·연금 자문 등 다양한 자산관리 수익으로 연결시키기 위한 전략이라는 분석이다.
여기에 정부 차원의 퇴직연금 활성화 정책까지 맞물리며 시장 확대 기대감도 커지고 있다. 업계에서는 향후 퇴직연금 적립 의무화가 본격 도입될 경우 시장 규모가 장기적으로 2000조원 수준까지 커질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다만 현재처럼 원리금보장형 상품 비중이 높은 구조는 한계로 지적된다. 금융감독원 통합연금포털에 따르면 국내 퇴직연금 자산 상당수는 여전히 예·적금 등 원리금보장형에 머물러 있다. 이 경우 자산 규모는 커지더라도 금융사 입장에서는 운용 수익으로 연결되는 폭이 제한될 수밖에 없다.
결국 금융사들의 핵심 과제는 단순 자산 확대를 넘어 고객 자산을 실적형 상품으로 얼마나 이동시키느냐다. 최근 증권사와 자산운용사를 중심으로 TDF와 글로벌 ETF 중심 포트폴리오 확대 경쟁이 치열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퇴직연금 사업은 지금 당장 돈을 버는 구조라기보다 미래 금융 생태계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한 투자 성격이 강하다"며 "결국 얼마나 빨리 고객 자산을 확보하고, 그 고객을 얼마나 오래 붙잡아 두느냐가 승부를 가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연호 기자 / 경제를 읽는 맑은 창 - 비즈니스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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