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강원·김창원 형제, '순종 예제예필 현판' 등 국외재단에 기증
1892년 순종이 직접 짓고 쓴 글 새겨…고종·명성황후 장수 기원
푸른 빛의 이광사 글씨 눈길…"문화유산, 제자리 있을 때 가치"
(서울=연합뉴스) 김예나 기자 = "경사스러운 곤성(坤聖·명성황후)의 생신에 강녕전에서 양성(兩聖·고종과 명성황후)께 축수(祝壽)의 잔을 올리고…."('순종 예제예필 현판' 내용 중)
1892년 음력 9월 24∼26일 경복궁에서 성대한 잔치가 열렸다.
근정전에서는 문무백관이 모여 왕에게 예를 표했고, 강녕전에서는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곡을 연주하며 잔을 올렸다.
당시 세자였던 순종(재위 1907∼1910)은 어머니 명성황후의 생신(음력 9월 25일)을 축하하며 고종(재위 1863∼1907)과 명성황후의 장수를 바라는 글을 남겼다.
단정한 글씨는 용과 봉황, 연꽃으로 장식한 현판에 새겨 고이 간직했다.
130여 년 전 조선의 왕세자가 직접 짓고 쓴 글을 새긴 현판이 일본에서 돌아왔다. 역사가 깃든 문화유산이 제자리를 찾기 바라는 마음으로 이뤄진 기증이라 의미가 크다.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은 '순종 예제예필 현판'과 '백자청화 이진검 묘지'를 기증받아 국내로 환수했다고 8일 밝혔다.
예제예필(睿製睿筆)은 왕세자나 왕세손이 직접 글을 짓고 썼다는 뜻이다.
나무로 된 현판은 가로 124㎝, 세로 58㎝ 크기다.
1892년 진찬(進饌·조선시대 국가에 경사가 있을 때 궁중에서 베푸는 연회) 당시 만든 것으로 추정되며, 왕실에서 쓰이는 현판 형식을 갖췄다.
테두리에는 용과 봉황의 머리를 조각하고 연꽃·접시꽃 문양 등을 그려 넣었다. 양각으로 글씨를 새긴 뒤 바탕은 먹색, 글씨는 녹색으로 각각 칠했다.
구본능 단청기술연구소장은 "19세기 중반 이후 국내에 유입된 안료인 양청(洋靑)·양록(洋綠) 등 당시로서는 '신소재'를 사용했으며 덧칠한 흔적이 없다"고 설명했다.
순종의 글씨를 품은 현판은 역사적 가치가 높다.
1892년 열린 진찬은 고종의 즉위 30주년과 41세(망오·望五)를 맞아 열렸는데, 명성황후의 생일을 함께 축하하면서 국가적 행사로 열렸다.
순종이 지은 글은 조선 후기 진찬을 기록한 '진찬의궤'(進饌儀軌), 1892년 진찬에서 세자가 지은 글과 신하들의 시를 엮은 '순종어제곤성홍류'(純宗御製坤聖虹流) 등에도 남아있다.
구 소장은 "순종의 효심을 이해할 수 있는 유산"이라며 "당시의 현판 제작 수법, 단청 문양과 기법 등을 알 수 있어 가치가 크다"고 말했다.
현판은 2024년 일본의 한 경매에 출품됐고, 고미술 거래업체 '청고당'을 운영하는 김강원 대표가 낙찰받아 재단에 기증했다.
다만 현판이 언제, 어떻게 일본으로 건너갔는지 구체적 경위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날 함께 공개된 '백자청화 이진검 묘지'는 김강원 대표의 형 김창원 씨가 일본 도쿄의 한 고미술 거래업체에서 발견해 환수한 유물이다.
묘지(墓誌)는 고인의 생애와 행적 등을 적어 무덤에 함께 묻은 돌이나 판이다. 무덤 주인의 삶을 기록한 흔적으로써 당대 시대사를 연구할 때 가치가 있다.
총 10장으로 구성된 묘지는 조선 후기 예조판서 등을 지낸 문신 이진검(1671∼1727)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마지막 판에 적힌 '숭정(崇禎) 무진(戊辰) 기원후(紀元後) 재을축(再乙丑) 4월(四月)'이라는 표현을 볼 때 1745년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묘지의 글은 이조판서 등을 지낸 이덕수(1673∼1744)가 지었으며, 이진검의 아들이자 조선 후기 명필로 꼽히는 이광사(1705∼1777)가 글씨를 쓴 것으로 확인됐다.
이광사의 글씨는 서예사적으로 연구 가치가 크다.
박철상 한국문헌문화연구소장은 "한 시대를 대표하는 명가(名家·명망이 높은 가문)의 묘지 실물이 온전하게 발견된 사례"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박 소장은 "백자판마다 각 11행에 걸쳐 21자의 글씨를 썼다"며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서예가 이광사가 부친 묘지를 이렇게 제작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고 말했다.
평소 고미술과 서예에 관심이 많았던 김창원 씨는 지난해 고미술품을 다루는 가게를 둘러보다 우연히 묘지를 발견했고, 동생과 함께 기증에 동참했다.
2021년 '백자청화 김경온 묘지' 이후 4번째 기증에 나선 김강원 씨는 "순종의 글씨로 쓰인 현판은 조선 왕실의 유물이기에 경복궁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김창원 씨는 "문화유산은 제자리에 있을 때 그 가치를 온전히 드러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며 명필인 이광사의 글씨를 많은 이들과 나누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국가유산청과 재단은 이날 열린 기증식에서 두 사람에게 감사패를 전달했다.
박정혜 재단 이사장은 "기증자들의 소중한 뜻이 국외 문화유산의 연구와 보존, 활용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허민 국가유산청장은 "앞으로도 나라 밖에서 한국 문화유산을 보존·활용하는 숨은 공로자를 찾아 정성으로 예우하고, 소중한 뜻을 나누겠다"고 밝혔다.
yes@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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