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신문 문영서 기자】 5대 금융그룹이 벤처·스타트업 시장에 대출이 아닌 지분 투자 방식으로 총 1조500억원을 투입한다. 담보를 잡고 이자를 받는 전통적 은행 영업 방식에서 벗어나 모험자본 공급자로 역할을 확대하는 것으로, 금융의 구조적 전환 시도라는 해석이 나온다.
8일 금융위원회(이하 금융위)에 따르면 금융위와 중소벤처기업부는 지난달 30일 KB·신한·하나·우리·NH농협 등 5대 금융그룹과 ’벤처투자 활성화 및 생산적 금융 대전환을 위한 업무협약(MOU)’을 체결했다. 오는 2029년까지 8000억원 규모 민간 벤처모펀드를 조성하고, 모태펀드 공동 LP성장펀드에 1000억원, 지역성장펀드 출자에 200억원 규모를 투자할 예정이다. 여기에 금융권 200억원 출연을 기반으로 기술보증기금이 1500억원 규모의 협약보증을 신설하는 구조도 포함됐다.
담보 대출 ‘전당포식 운영’ 넘어 ‘생산적 금융’ 실천까지
정부가 ‘생산적 금융’을 내세웠으나 실상은 담보 대출 총량을 늘리는 데 그쳤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은행 중기대출 중 담보·보증 비중은 지난 2015년 말 66.7%에서 22년 말 79.2%로 올랐고, 2024년 9월 80%를 돌파하는 등 꾸준한 증가세를 보였다.
지난해 말 기준 5대 은행의 기업 담보대출 잔액은 전년(571조2850억원)보다 약 15조원 증가한 586조2207억원 수준을 기록했다. 기업 부문 총여신에서 담보대출이 차지하는 비중 역시 68.9%에서 0.2%포인트 늘어난 69.1%다.
한성대 경제학과 김상봉 교수는 “자본 확충을 통한 손실 보전보다 부실 채권 상각에 따른 수익 보전 효과가 크기 때문에 담보대출에 치중돼 있다”며 “대출은 생산적 금융이 아니다”라고 짚었다.
이처럼 금융권에서 담보 중심 운영을 지속한 것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 부동산 관련 가계·기업 대출 규모는 지난 2012년 말 639조원에서 지난해 말 1740조원으로 12년 만에 2.7배로 팽창했다. 기업대출로 분류된 자금도 상당수는 토지·공장을 담보로 잡는 방식이었다. 미국·유럽 금융기관이 투자은행 기능을 통해 기술 스타트업에 직접 자본을 공급한 것과 달리, 국내 시중은행은 사실상 이 역할을 산업은행 등 정책금융기관에 위탁해온 셈이다.
명지대 경제학과 우석진 교수는 “현재 우리나라 은행권에서는 대부분 보증서 없이 대출이 불가능하다”며 “제조업 같은 경우 기계나 공장 같은 담보물이 있다고 볼 수 있으나 AI 산업과 같이 담보물이 없을 경우 자금 마련이 어렵다”고 말했다.
이어 우 교수는 “은행들이 해당 기업에 대출 심사를 할 수 없으니 일부 중소벤처기업진흥공단이나 기업은행 등에 역할을 떠넘겨온 것”이라는 지적이다.
이 같은 정책 수요는 국내 실물경제와 자본시장의 양극화가 심화되는 상황과 맞닿아 있다. 내수 부진이 장기화하면서 중소기업들의 자금 조달 여건은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 기준금리 인하에도 불구하고 고금리 환경이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담보력이 부족한 중소·벤처기업은 시중은행 대출 창구에서도 사실상 배제될 우려가 큰 것이다.
자본시장도 마찬가지다. 코스피는 지난해 76% 상승하며 2000년 이후 최고 상승률을 기록했지만 실적은 반도체·AI 대형주에 집중됐다. 코스피와 코스닥의 성장률 격차는 40%포인트 가까이 벌어지며 대형주와 중소형주 간 양극화가 뚜렷해졌다. 올해 코스닥 상장폐지 대상 기업도 기존 50여 곳에서 최대 150~220곳으로 급증할 것으로 전망되는 등 중소·벤처 기업의 자본시장 접근성은 오히려 좁아지고 있다. 정부 주도의 벤처투자 확대가 대두될 수밖에 없는 배경이다.
‘2025년 신산업 분야 벤처투자 동향 발표’에서 전체 벤처투자는 전년 대비 2.7% 증가했으나 신산업 분야 투자는 1.2% 감소했고, 인공지능 분야가 전체 투자의 19.6%를 차지했다. 투자규모 역시 신규투자는 12.3% 수준으로, 초기 기업보다는 성장 기업에 집중됐다. 신생 기업보다는 기술 검증과 고객층이 보장된 기업에만 자금이 쏠리는 상황이다.
PitchBook-NVCA 벤처 모니터(Venture Monitor) 올해 1분기 전 세계 VC(벤처 캐피탈, 모험 자본) 투자금의 75% 이상이 OpenAI·Anthropic·xAI·Waymo·Databricks 5개사에 집중된 것으로 나타났다.
다만 금융당국이 지난해 은행 보유 비상장 기업 주식의 위험가중치(RW)를 현행 400%에서 250%로 낮추겠다고 발표함에 따라 금융지주 측에서는 투자 지분을 확대할 여력이 생긴 상황이다.
한편 금융당국은 금융지주뿐만 아니라 증권업권과도 모험자본 공급 확대를 위한 민관 협의체를 출범했다. 종합금융투자사업자(종투사, 한투·미래·NH·KB·하나·키움·신한) 7곳의 올해 1분기 모험자본 공급 규모는 9조9000억원으로, 주요 투자 대상은 중견기업(4조5000억원), P-CBO(2조3000억원), 중소·벤처기업(2조1000억원) 등으로 구성됐다.
금융당국은 중소형 증권사 육성과 중소벤처기업 자금조달 지원을 위한 중기특화 증권사 제도 개선을 추진하겠다고 설명했다. 금융투자협회는 생산적 금융 및 모험자본 공급 확대 기조 속에서 회수시장 활성화 필요성이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며 우리나라는 회수체계가 IPO에 과도하게 편중돼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약 1~2조원 규모의 회수시장 유동성 공급 방안을 검토하고, 기업공개(IPO) 외에도 인수·합병(M&A), 세컨더리 투자 등 다양한 회수 경로를 확대하겠다는 구상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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