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태안은 꽃 축제로 한창이다. 태안국제원예치유박람회와 태안세계튤립꽃박람회가 동시에 열리고 있다. 치유농업이 나의 일이라 원예치유박람회 쪽을 꼼꼼히 둘러보러 갔다. 박람회장 안은 온갖 꽃이 어우러져 그야말로 화려했다. 사람들은 사진 찍느라 정신이 없고, 나도 넋을 놓고 정원을 거닐었다. 그런데 그 많은 꽃들 중에 내 눈을 가장 오래 붙잡은 것은 역시나 튤립이었다.
튤립은 봄 축제에 빠지지 않는 꽃이다. 톡톡 벌어져 있는 빨갛고 노란 꽃봉오리가 보는 사람을 행복하게 만든다. 색색의 튤립을 줄지어 심어놓은 정원은 봄을 한껏 만끽하게 해준다. 나는 튤립을 매우 좋아한다.
튤립을 처음 만난 건 1994년 봄 에버랜드 입사 첫해였다. 사무실이 공원 한복판에 있어서 출퇴근길마다 꽃밭을 통과해야 했다. 어리바리한 신입사원의 스트레스는 야간개장 조명 아래 황홀했던 튤립과 장미가 매번 달래주었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소녀 같은 감수성은 아마 그때 생긴 것 같다.
태안 박람회의 빨간 튤립을 또 한참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데 옆의 동행자가 스마트폰을 열더니 비명을 지른다. 그의 손에 쥔 화면이 온통 빨갛다. 매우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날이 바로 5월 6일. 코스피가 7300을 넘어가던 찰나였다. 그의 얼굴도 같이 불타올랐다.
17세기, 바람을 사고팔다
튤립은 아무리 봐도 자본주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꽃이다. 그 유명한 네덜란드 튤립 투기 사건만 봐도 그렇다.
17세기 네덜란드는 해상무역의 황금기를 누리며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였다. 신흥 부유층은 자기 돈 자랑할 새로운 수단을 찾았는데 마침 오스만 제국에서 들어온 튤립이 그 희소성과 화려함 덕분에 신분 과시의 정점에 올랐다. 특히 바이러스 감염으로 독특한 줄무늬가 생긴 변종 튤립은 부자들의 소유욕을 강렬하게 자극했다. 꽃 하나가 곧 명함이었던 셈이다.
여기서 잠깐, 경제학 책 한 페이지를 펼쳐보자. 미국 경제학자 소스타인 베블런(Thorstein Veblen)이 1899년 <유한계급론> 에서 정리한 베블런 효과(Veblen Effect)라는 게 있다. 보통의 상품은 가격이 오르면 수요가 줄어든다. 유한계급론>
그런데 어떤 상품은 정반대다. 비싸면 비쌀수록 더 갖고 싶어진다. 이유는 단순하다. 그 물건의 효용이 '쓰임'에 있는 게 아니라 '과시'에 있기 때문이다. 비쌀수록 남들이 알아봐 주니 가격이 곧 메시지가 되는 셈이다.
17세기 네덜란드 신흥 부유층에게 튤립이 정확히 그랬다. 향이 좋은 것도 아니고 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약효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비싸고 희귀하니까 갖고 싶었다. 줄무늬가 있는 셈페르 아우구스투스는 그중에서도 정점이었다. 변종이라 희귀하고 희귀하니 비싸고 비싸니 더 갖고 싶고 갖고 싶으니 더 비싸지는 무한루프. 이른바 '비싸서 사는' 시장이 열린 것이다.
초기에는 실제 구근을 사고파는 현물 거래가 주였다. 그런데 수요가 폭발하자 꽃이 피지 않는 겨울철에도 권리만 사고파는 선물 거래(Futures Trading) 방식이 도입됐다. 네덜란드어로 '바람 장사(Windhandel)'라 불렀다. 실물 없이 종이 한 장으로 거래가 이루어지니 투기성이 극대화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이름 한번 잘 지었다. 정말로 바람만 사고팔았으니까.
1630년대 중반에 이르자 광풍은 귀족을 넘어 목수·하녀·농민에까지 번졌다. 1637년 초에는 셈페르 아우구스투스 구근 한 알 가격이 5500길더까지 치솟았다. 숙련 노동자의 10년 치 연봉, 당시 암스테르담 최고급 저택 한 채 값이었다. 꽃 한 송이로 집을 살 수 있었던 시대다. 베블런이 보았다면 무릎을 쳤을 풍경이다. “거 봐라, 내 말이 맞지?” 하면서.
그러나 1637년 2월 3일 하를렘의 한 경매장에서 평소와 달리 낙찰자가 나타나지 않으면서 광기는 공포로 돌변했다. 매수세가 사라지며 구근값은 고점 대비 1퍼센트 이하로 폭락했다. 수많은 계약자가 파산했고 네덜란드 경제 전반에 깊은 상흔을 남겼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빨간 차트는 17세기에 한 번 본 풍경이라는 얘기다.
우리 튤립은 어디에서 왔나
우리의 튤립 사랑도 만만치 않다. 전국에 튤립 축제가 성행하고 지자체는 곳곳에 튤립을 심는다. 그런데 저 많은 튤립은 어디에서 왔을까. 거의 전부가 네덜란드산이다. 튤립은 꽃이 진 뒤 구근이 급격히 작아져서 이듬해 다시 꽃을 피우기가 어렵다. 전남 신안군 임자도가 튤립축제로 국산화를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잘되었으면 신안 주민들이 지금쯤 튤립 농사를 짓고 있을 텐데 여전히 마늘과 양파에 매진하고 있다.
네덜란드의 종자 기술은 워낙 탁월해서 심기만 하면 확실히 꽃이 핀다. 그래서 축제장에서는 매년 새 구근을 수입해 심는 '소모성' 방식을 택한다. 한 번 쓰고 버리는 꽃, 일회용 봄인 셈이다. 구근 자체는 개당 300~500원이지만 식재와 관리 비용이 붙어 웬만한 튤립원 하나에 수억 원이 든다. 전국 단위로 보면 해마다 수천억원어치의 튤립이 네덜란드로 빠져나간다고 조경업계는 추정한다.
그걸 매년 반복한다. 튤립이 워낙 보기 좋고 사람들이 좋아하니 지자체 입장에서는 고객만족도가 높아 선호한다. 봄이라 튤립을 보니 좋긴 좋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정작 화훼농가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 구조다. 예산 낭비 시비가 붙는 것도 그래서다.
2022년 대전시는 갑천 산책로에 튤립단지를 조성했다가 예산낭비 논란을 일으켰다. 1억2000여만원을 들여 튤립9만 본을 심었는데 꽃이 시든 뒤 불과2주 만에 모두 뽑아내고 그 자리에 수레국화를 심었다. 사시사철 다른 꽃을 보여주겠다는 취지였다. KBS 대전이 그해 5월 보도한 제목 그대로다. ( ‘2주 눈요기용 하천변 튤립에 1억2000만원’.)
더 야릇한 건 따로 있다. 튤립은 뽑지 않고 두면 이듬해 다시 꽃이 피는 여러해살이다. 그런데도 굳이 뽑았다. 산책 나온 시민도 어이가 없었던 모양이다. “도대체 심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럴 거면 왜 심었을까. 튤립 비싸잖아요.” 누가 봐도 일리 있는 의문이다. 한 송이에1300원꼴 세금이 흙 속에 묻혔다 한 번 피고 사라진 셈이다.
보도 이후 대전시는 “시민 의견을 수렴해 내년도 튤립 식재를 종합적으로 검토하겠다”고 답했다. 이듬해 갑천에는 다시 튤립이 50만 송이로 돌아왔다. 다만 이번에는 “튤립이 진 뒤 알뿌리 무료 나눔” 계획이 함께 발표됐다. 한 번 데인 뒤 회수 통로를 만들어 둔 셈이다. 작은 진전이지만 진전은 진전이다.
튤립이 소모성이라는 지적에 식재를 포기하거나 홍매화·국화로 수종을 바꾼 지자체도 있다. 튤립은 국산화가 어렵지만 장미와 백합은 어느 정도 국산화에 성공해 해외로 수출까지 한다니 이쪽은 눈여겨볼 만하다.
그래도 튤립은 여전히 절대적이다. 아무리 국내 품종 장미·국화·백합이 있고 유채꽃밭이 펼쳐져도 봄에 수입 튤립이 대량으로 풀리면 다른 꽃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튤립축제는 지역 농가를 살리거나 기술을 키우는 데에는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 오직 구근을 사 와서 한 번 피고 사라지는 소비형 모델이다. 이른바 빨대 효과만 보인다. 봄이 한 번 빨려 나가는 것이다. 종자 값은 네덜란드로 가고 부수적인 돈만 지역에 떨어지는 구조. 이게 우리 봄의 풍경이다.
아는 만큼 의뭉스러운 꽃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사랑한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튤립은 좀 다르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의뭉스럽다.
17세기 네덜란드 신흥 부유층은 비싸서 튤립을 샀고 21세기 한국의 지자체는 화려해서 튤립을 사들인다. 베블런이 말한 과시의 욕망은 시대를 건너뛰며 옷만 갈아입는다. 옷만 갈아입을 뿐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
그래도 봄은 봄이다. 빨간 튤립은 여전히 예쁘고, 7300을 찍은 코스피도 일단 예쁘다. 다만1637년 2월 3일의 그 경매장이 자꾸만 마음 한구석에 어른거릴 뿐이다. 자본주의의 꽃은, 역시 튤립이다.
☞베블런 효과=가격이 오르는데도 일부 계층의 과시욕 때문에 수요가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늘어나는 현상이다. 19세기 미국 경제학자 소스타인 베블런이 저서 <유한계급론> 에서 상층 계급의 두드러진 소비를 지적하며 처음 사용했다. 유한계급론>
여성경제신문 김성주 슬로우빌리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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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주 슬로우빌리지 대표
한양대학교와 동 대학원에서 관광과 엔터테인먼트를 전공했다. 삼성에버랜드에서 오랫동안 '환상의 나라'를 설계하며 쌓은 노하우를 바탕으로, 현재는 슬로우빌리지 대표이자 컨설턴트로 변신해 농촌에 행복의 마법을 부리는 중이다. 한국수달보호협회 수도권서부지회장으로서 생태 보호에 앞장서고 있으며, 한국사회적농업협회 부회장을 맡아 치유농업과 6차산업을 이끌고 있다. 사람과 생명이 함께 웃고, 모든 이가 즐거운 세상을 만드는 것을 유쾌한 사명으로 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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