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신문 권신영 기자】6만명 넘는 시민 동의를 얻은 ‘사실적시 명예훼손죄 폐지’ 국민동의청원이 국회 법사위 문턱에서 장기간 멈춰서면서 국민동의청원 제도의 실효성에 대한 비판이 커지고 있다.
7일 투데이신문 취재에 따르면 올해 1월 활동을 재개한 ‘양육비 해결하는 사람들(양해들)’ 활동가 가운데 한 명이 게시한 ‘사실적시 명예훼손죄 폐지’ 국민동의청원의 심사기한이 오는 29일 종료를 앞두고 있지만 국회 논의는 사실상 멈춰 있다.
청원은 지난해 3월 4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회부됐지만 현재까지 실질적인 심사 움직임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국민동의청원 누리집에 따르면 해당 청원은 지난해 2월 19일부터 3월 21일까지 진행된 동의 기간 동안 6만8445명의 동의를 받아 성립됐다. 현재 진행 단계는 ‘위원회 회부’ 상태로 아직 본회의 심의 단계로는 넘어가지 않았다.
국민동의청원은 시민이 직접 입법 필요성을 제기하는 제도다. 30일 안에 5만명 이상의 동의를 얻으면 소관 상임위원회에 자동 회부된다. 국회법은 위원회가 청원 회부 뒤 90일 이내에 심사 결과를 국회의장에게 보고하도록 규정한다. 특별한 사유가 있을 때는 60일 범위에서 한 차례 연장할 수 있다.
하지만 실제 운영 과정에서는 심사기한이 연장되는 사유에 대해 알려지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다수 청원이 장기간 계류되거나 임기 만료와 함께 폐기되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이번 사실적시 명예훼손죄 폐지 청원 역시 연장 사유에 대해 알려진 바가 없는 것으로 전해졌다.
해당 청원은 대한민국 형법 제307조 제1항과 정보통신망법 제70조 제1항이 ‘진실한 사실’을 말한 경우에도 타인의 사회적 평가를 훼손했다는 이유로 형사처벌하도록 규정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청원인은 “미투 운동, 양육비 미지급 사실 공개, 내부고발, 권력자 갑질 폭로 등 공익적 고발까지 명예훼손죄로 처벌될 수 있다”며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이 이를 이용해 고소를 남발하고, 진실을 말한 사람들이 역고소를 당해 형사 피의자가 되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청원문에는 사실적시 명예훼손죄가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키고 사회적 감시 기능을 약화시킨다는 주장도 담겼다. 청원인은 “유독물질이 나온 식품이나 화학제품, 의료사고가 발생한 병원 등에 대한 언론보도가 실명 대신 익명 처리되는 경우가 많다”며 “국민들은 정확한 정보를 알지 못한 채 불안에 떨고, 무관한 업체들이 피해를 입기도 한다”고 지적했다.
현행법상 ‘공공의 이익을 위한 행위’는 위법성이 처벌 대상에서 제외될 수 있다는 반론에 대해 청원인은 “‘공익 목적’ 여부나 ‘비방 목적’ 판단 기준 자체가 지나치게 모호하다”며 “수사와 재판 과정 자체가 표현을 위축시키는 효과를 낳는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국회 논의는 좀처럼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법사위 차원의 본격적인 논의 일정이나 법안 병합 심사 계획도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은 상태다. 청원 심사기한 종료가 임박했지만 추가 연장 여부조차 불분명하다.
이에 국민동의청원 제도가 사실상 ‘민원 접수 창구’ 수준에 머물고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양해들 구본창 대표는 본보와의 통화에서 “5만명 넘는 시민이 동의해 법제사법위원회에 정식 회부된 청원인데도 논의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며 “이런 식이면 국민동의청원 제도가 사실상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고 비판했다.
구 대표는 “국회가 입맛에 맞는 청원은 다루고 불편한 청원은 미루는 것 아니냐는 의문이 든다”며 “5만명 동의는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는 숫자다. 그만큼 사회적 논의 필요성이 확인된 사안이라면 국회가 최소한의 심사 책임은 져야 한다”고 꼬집었다.
투데이신문에서 국회의안정보시스템을 분석한 결과 7일 기준 22대 국회에 접수된 청원은 모두 278건이었다. 이 가운데 본회의 불부의(회의에 올리지 않음) 11건과 청원인 철회 1건을 제외한 262건이 상임위에 계류돼 있었고. 이 중 241건(92%)은 이미 심사 기한(90일)을 넘겼다.
문제는 이 같은 현상이 단순 논의 지연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청원 계류가 오래 지속되면 국회 임기 종료와 함께 자동 폐기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청원 폐기 비율은 국회를 거듭할수록 높아지는 흐름을 보이고 있다. 20대 국회에서는 청원 207건 가운데 166건, 80%가 임기만료로 폐기됐고 21대 국회에서는 194건 가운데 161건, 83%가 폐기됐다.
2028년 5월 29일 종료되는 22대 국회 역시 임기 절반가량이 지난 현재 다수 청원이 심사기간을 넘긴 채 계류돼 있어 같은 전철을 밟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서휘원 정치입법팀장은 본보에 “국회법상 청원은 회부 30일이 지나면 소관위원회에 자동 상정되는 것이 원칙이지만 위원장이 간사와 합의하면 예외를 둘 수 있다”며 “이 단서 조항 때문에 여야가 합의하지 않을 경우 상정 자체가 계속 미뤄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서 팀장은 심사기간 연장 규정도 문제로 짚었다. 그는 “청원은 원칙적으로 최장 150일 안에 심사를 마쳐야 하지만, 장기간 심사가 필요한 특별한 사유가 있으면 위원회 의결로 추가 연장을 요구할 수 있다”며 “문제는 이 추가 연장의 횟수나 기한에 명확한 상한이 없다는 점”이라고 짚었다.
이어 “그 결과 국회가 부담스러운 청원을 임기 말까지 미루다가 자동 폐기되도록 둘 수 있는 구조가 생긴다”며 “국민동의청원의 실효성을 높이려면 심사기간 추가 연장에 상한을 두는 국회법 개정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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