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자 주 = 한국국제교류재단(KF)의 2024년 발표에 따르면 세계 한류 팬은 약 2억2천500만명에 육박한다고 합니다. 또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초월해 지구 반대편과 동시에 소통하는 '디지털 실크로드' 시대도 열리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한류 4.0'의 시대입니다. 연합뉴스 동포·다문화부 K컬처팀은 독자 여러분께 새로운 시선으로 한국 문화를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되고자 전문가 칼럼 시리즈를 준비했습니다. 시리즈는 매주 게재합니다.]
술의 완성은 기다림에 있다. 증류기에서 갓 흘러나온 갓난아기 같은 술은 날카롭고 거칠다. 이 거친 원액을 부드럽고 향기로운 명주로 탈바꿈시키는 마법사는 다름 아닌 '시간', 그리고 그 시간을 담아내는 '그릇'이다. 세계적인 명성을 자랑하는 위스키나 코냑, 그리고 와인은 오크통(Oak Cask)이라는 나무 그릇을 통해 완성된다. 반면, 우리 전통 증류식 소주는 예로부터 옹기(甕器)라는 흙 그릇 속에서 숨을 쉬며 익어왔다. 나무와 흙, 서양과 동양을 대표하는 이 두 가지 숙성 용기는 술을 보관하는 통을 넘어, 술을 대하는 철학과 미학의 극명한 차이를 보여준다.
서양의 증류주를 이야기할 때 오크통을 빼놓을 수 없다. 스코틀랜드의 싱글몰트 위스키, 프랑스의 코냑 등은 모두 오크통이 빚어낸 예술작품이다. 오크통 숙성의 핵심은 '덧입힘'이다. 투명했던 증류 원액은 참나무로 만든 통 속에 갇혀 수년에서 수십 년의 세월을 보내며 나무의 성분을 흡수한다.
오크통 내부를 불로 그을리는 토스팅(Toasting)이나 차링(Charring) 과정을 통해 참나무의 리그닌과 헤미셀룰로스 성분은 분해돼 바닐라, 캐러멜, 초콜릿, 견과류 등 복합적이고 풍부한 향기로 변모한다. 술은 나무가 가진 색을 고스란히 빨아들여 매혹적인 호박색으로 물들고, 나무의 타닌 성분은 술에 묵직한 구조감과 바디감을 부여한다. 즉, 오크통 숙성은 원래 술이 가지고 있던 개성에 나무의 개성을 적극적으로 개입시켜 전혀 새로운 제3의 맛을 창조해 내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오크통의 미세한 틈으로 알코올과 수분이 증발하는데,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이를 가리켜 '천사의 몫'(Angel's Share)이라 불렀다. 천사에게 기꺼이 술의 일부를 내어주는 대신, 나무가 품고 있던 자연의 향기를 선물로 돌려받는 셈이다. 이처럼 오크통은 술을 적극적으로 변화시키고 다듬는 조각가와 같다.
반면, 한국의 전통 증류식 소주가 선택한 그릇은 옹기다. 찰흙에 나뭇재와 부엽토를 섞어 만든 잿물을 입혀 1천200도의 고온에서 구워낸 옹기는 오크통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술을 숙성시킨다. 옹기 숙성의 핵심은 '덜어냄'과 '순수함의 응축'이다.
옹기의 표면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수많은 미세 기공(루미)이 존재한다. 흔히 옹기를 '숨 쉬는 그릇'이라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미세한 구멍들은 외부의 공기를 미세하게 통과시키면서도 내부의 물은 밖으로 새어 나가지 못하게 막아준다. 증류식 소주를 옹기에 담아두면, 이 기공을 통해 술 속의 거칠고 자극적인 아세트알데히드나 불쾌한 냄새를 유발하는 퓨젤유(Fusel oil) 등의 휘발성 물질들이 서서히 밖으로 빠져나간다.
오크통이 술에 나무의 색과 향을 입히는 것과 달리, 옹기는 술에 어떤 것도 더하지 않는다. 옹기는 그저 불필요한 것들이 날아가도록 길을 열어주고, 남은 술 입자들이 오랜 시간 동안 물 분자와 결합하여 스스로 둥글고 부드러워지도록 묵묵히 품어줄 뿐이다. 그 결과, 옹기에서 숙성된 소주는 증류 직후의 날카로움은 사라지고 목 넘김이 비단처럼 부드러워진다. 동시에 쌀, 보리, 수수 등 원재료가 가지고 있던 곡물 본연의 은은한 단맛과 누룩의 깊은 향기만이 고스란히 남아 맑고 투명한 자태를 유지한다. 오크통이 화려한 색채를 입히는 유화라면, 옹기는 여백의 미를 살린 수묵담채화라 할 수 있다.
이 두 그릇의 차이는 재료가 다른 차원이 아닌, 서양과 동양이 자연을 바라보고 다루는 세계관의 차이와도 맞닿아 있다.
오크통 숙성은 인간이 나무라는 자연을 적극적으로 가공하고 통제하여 술의 맛을 설계하려는 서양의 합리주의적이고 작위적인 태도를 반영한다. 어떤 종류의 오크나무를 쓸 것인지, 얼마나 불에 그을릴 것인지, 이전에 어떤 와인이나 셰리를 담았던 통을 쓸 것인지 등 인간의 치밀한 계산 아래 술의 풍미가 결정된다.
반면, 옹기 숙성은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며 기다림을 미덕으로 삼는 동양적 자연관을 보여준다. 흙과 불이 만나 만들어낸 옹기에 술을 담고, 맑은 바람과 적당한 햇살, 그리고 계절의 변화라는 자연의 흐름에 술의 운명을 맡긴다. 인위적으로 무언가를 더하려 하기보다, 스스로 성숙해지기를 기다리며 본연의 맛이 만개하도록 돕는 조력자의 역할을 자처하는 것이다.
최근 글로벌 주류 시장에서는 위스키의 짙은 향에 지친 소비자들이 본연의 순수한 맛을 지닌 프리미엄 화이트 스피릿(White Spirit)에 눈을 돌리고 있다. 최상급 아가베의 향을 살린 프리미엄 테킬라나 메스칼이 세계적인 인기를 끄는 현상이 이를 증명한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옹기에서 숙성된 한국의 프리미엄 증류식 소주는 세계 시장을 매료시킬 충분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무엇보다 옹기 숙성 소주의 가장 큰 강점은 '음식과의 페어링'에 있다. 오크통에서 숙성된 술은 향이 너무 강해 음식의 맛을 덮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옹기에서 숙성되어 맑고 깨끗하면서도 깊은 풍미를 지닌 소주는 섬세한 맛을 지닌 한식은 물론, 전 세계의 다양한 파인다이닝 요리의 맛을 해치지 않으면서 완벽한 조화를 이뤄낸다. 재료 본연의 맛을 살려주는 훌륭한 조연이자, 식탁의 격을 높이는 마침표가 되는 것이다.
나무의 색과 향을 덧입혀 화려하게 치장한 오크통의 술도 훌륭하지만, 흙의 숨결 속에서 불순물을 덜어내고 맑은 본질만을 남긴 옹기의 술에는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깊고 단아한 매력이 있다. 서양의 오크통이 마법 같은 변주의 통이라면, 우리의 옹기는 깨달음에 이르는 수련의 방과 같다. 오랜 시간 숨을 쉬며 빚어낸 투명한 황금빛 한 방울, 그 속에 담긴 K-리큐르의 고유한 정체성과 가치가 전 세계인의 잔 속에서 빛날 날을 기대해 본다.
신종근 전통주 칼럼니스트
▲ 전시기획자 ▲ 저서 '우리술! 어디까지 마셔봤니?' ▲ '미술과 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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