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매거진=정혜원 작가] 여행할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사람마다 다르다. 내 여행은 철저히 관람 중심이다. 삼시 세끼를 대충 편의점 삼각김밥이나 빵으로 때우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볼거리를 찾아 계속 이동한다. 뭔가 사 먹을 돈으로 어딘가의 입장료나 관람료를 낸다. 이런 내게 보조를 맞춰 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여행은 무조건 혼자 간다. 그 편이 관람에 집중하기에도 좋다.
예전에는 전시장 한 곳 이상을 여행 코스에 넣곤 했는데 지금은 건축물이나 유적지 같은 ‘어떤 장소’를 찾아간다. 그 안에 비계획적으로 설치된 구조물이나 우연히 놓인 잡동사니를 바라보는 것이 좋다. 그 근방의 길을 하염없이 걷는 것도 좋다. 주변에 아무것도 없더라도 그 텅 빔을 피부로 느끼는 것이 정교하게 짜인 전시를 보는 것보다 훨씬 더 흥미롭다.
그런데 지난 여행을 가만히 돌아보다가 희한한 사실을 깨달았다. 이제 전시는 지겨워서 보고 싶지 않다, 전시장 안은 답답하다고 툴툴대 놓고 결국 막판에는 무언가에 이끌리듯 어김없이 전시장에 가 있었다.
2024년 11월 오키나와에 갔을 때는 숙소에서 도보로 20분 거리에 오키나와 현립 박물관·미술관이 있었다. 하지만 3박 4일 일정 내내 그곳은 방문 우선순위에서 제외되어 있었다. 오키나와에는 그곳 말고도 갈 만한 곳이 많았다. 운전 면허가 없었기 때문에 요령껏 이 버스 저 버스 갈아타며 멀고 먼 수족관이나 식물원에 가기에도 바빴다. 그렇게 정신없이 보내다가 마침내 여행 마지막 날을 맞았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비행기 연착 알림이 와 있었다. 전날 한국 수도권에 폭설이 내려 인천공항이 마비된 모양이었다. 항공편이 줄줄이 취소된 가운데 내가 탈 비행기가 뜨는 것만으로도 다행인 상황이었다. 뜻밖에 오전에 시간이 생겼지만, 오후에는 공항에 가야 하니 멀리 갈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숙소에만 있다가 여행을 마치고 싶지는 않아 결국 현립 박물관·미술관으로 향했다.
마침 박물관에서 특별전이 열리고 있었다. 주제는 바쇼후(芭蕉布). 파초(芭蕉) 잎과 줄기로 짠 천(布)에 관한 전시였다. 오키나와는 과거 류큐 왕국이었던 시절부터 질 좋은 옷감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파초를 삶고 말려 천으로 직조하기까지 복잡한 과정이 자세히 소개되어 있었다. 전시를 보는 동안 저절로 없던 관심이 생겼다. 결국 팸플릿까지 구매했다. 그 안에 천연 소재로 염색된 다양한 색상의 파초 실과 파초 옷감 샘플이 들어 있었다.
전시를 보는 도중 비행기 출발 시간이 다시 저녁으로 늦춰졌다는 문자를 받고 살짝 당황했다. (그 후 한 번 더 연착되어 늦은 밤에야 간신히 비행기가 떴고, 나는 자정이 넘어 대중교통이 다 끊긴 시점에야 눈 쌓이고 꽁꽁 언 인천공항에 내릴 수 있었다.) 붕 떠 버린 시간을 때우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박물관에 이어 미술관 전시까지 보게 되었다. 그곳에는 오키나와에서 활동하는 미술가들의 조각과 회화 작품이 있었다.
2025년 9월 제주도에 갔을 때도 비슷한 딜레마에 빠졌다. 이때도 나는 뚜벅이 신세였다. 그 사이 면허를 따긴 했지만, 아직 일 년이 되지 않아 차를 빌릴 수 없었다. 제주도는 오키나와보다 훨씬 대중교통편이 좋지 않았다. 당시 숙소가 중문관광단지 근처에 있었는데, 버스가 잘 다니지 않아 어디론가 가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졌다.
9월 중순에 접어들었는데도 제주도는 한여름처럼 푹푹 쪘다. 조금만 걸어도 온몸에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이런 날씨에 땡볕에 앉아 언제 올지 모를 버스를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을 만큼 심신이 지쳐 있을 때 떠난 여행이었기에 그냥 내내 숙소에 머물렀다. 유리창 너머로 파란 하늘과 푸른 마당을 내다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위안이 되었다. 하지만 내 평소 패턴에 비추어 보면 도무지 여행이라고 하기는 어려웠다. 매일 오후에 두 시간쯤 근처 해변에 잠시 걸어갔다 온 것이 전부였다.
여행 마지막 날이 되자 아무리 꼼짝하기 싫어도 비행기를 타러 가야 했다. 제주공항 바로 근처에 아라리오 뮤지엄이 있었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공항에 가는 김에 마지막으로 전시라도 하나 보기로 결심했다. 기껏 제주도에 왔으니 마지막 날만큼은 어딘가에 가서 뭔가를 봐야 후회가 없을 것 같았다.
한때 천안이나 서울 아라리오는 즐겨 찾곤 했는데 제주 아라리오는 처음이었다. 존재 자체를 아예 모르고 있었다. 특이하게 세 동으로 나뉘어 있어 건물을 옮겨 다니며 관람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모텔 두 곳과 영화관 한 곳을 개조한 공간이었는데, 기존의 구조뿐 아니라 기물까지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특히 동문 모텔 I은 조금 을씨년스러웠는데, 그 으스스함이 내게는 오히려 짜릿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중간에 나와 맞닥뜨린 다른 여성 관람객은 나를 보자마자 소스라치게 놀라며 꽥 소리를 질렀다. 잔뜩 겁에 질린 기색이었다. 무서우니 같이 돌아봐 달라고 부탁하더니 자기는 도저히 더는 못 보겠다며 도망치듯 뛰쳐나가 버렸다. 무슨 퍼포먼스 같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나는 아직 전시를 꽤 좋아하는 모양이다. 며칠 전 다녀온 DDP 전시도, 보는 동안에는 별로 감흥이 없었지만 아직까지 묘하게 잔상이 남아 있다. 아마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 알게 모르게 내게 영향을 미칠 것이다.
자, 다음에는 또 어떤 전시를 마지못한 듯 가게 될까? 조금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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