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신문 권신영 기자】어린이날을 지나 우리들의 ‘위안부’ 소녀상도 해방의 기념일을 맞았다. 5년 11개월 만에 평화의 소녀상과 시민들을 가로막아온 바리케이드가 전면 철거되면서 서울 종로구 주한 일본국 대사관 앞에서 열린 수요시위에는 뜨거운 축제 분위기가 퍼졌다.
정의기억연대의 요청으로 바리케이드가 철거된 6일 낮 12시경, 소녀상 주변 풍경은 이전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시민들은 소녀상에게 인권의 상징색인 보랏빛 화관을 씌워주고 그 곁을 떠나지 않았다. 6년 만에 시민들의 품으로 돌아간 평화의 소녀상은 변화의 희망을 한몸에 품은 이른바 ‘스타’가 됐다.
2011년 옛 주한 일본국 대사관 앞에 세워진 제1호 평화의 소녀상은 그간 심각한 수난을 겪어 왔다. 2016년 망치 훼손 사건 이후 최근까지도 위안부법폐지국민행동 등 소녀상 철거를 주장하는 단체들의 시위와 충돌 우려 속에서 몸살을 앓아 왔다. 소녀상에게 수차례 가해진 폭력에 결국 2020년 6월 바리케이드가 설치됐지만 최근 개정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보호법이 시행을 앞두면서 시민들과 소녀상 사이에 놓였던 벽이 허물어질 수 있었다.
이날은 제1751차 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가 열린 날이기도 했다. 수요시위 시작과 함께 시민들이 직접 바리케이드를 철거하자 평화의 소녀상 곁에는 기념사진을 찍으려는 인파가 줄을 이었다. 남녀노소 시민들은 자유롭게 소녀상 곁으로 다가가 그간 남기지 못한 사진을 촬영하며 기쁜 순간을 기록했다.
직접 쓴 손팻말을 들고 쑥스러운 듯 소녀상 왼쪽 의자에 앉는 시민이 있는가 하면, 어깨동무를 한 채 당당한 표정으로 카메라를 바라보는 이들도 있었다. 시민들은 소녀상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개거나 어깨를 기대며 저마다의 마음을 전했다.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는 시민들의 얼굴에는 뿌듯한 미소가 번졌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소녀상 역시 다정한 시선을 보내는 듯했다. 현장은 그야말로 ‘5월 봄날의 희망찬 포토부스’ 같았다.
소녀상 곁에서 기념 사진을 촬영한 이주연(20)씨는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오랜만에 소녀상 옆에 설 수 있게 됐다. 너무 설레고 기분이 좋다”며 “울타리 안에 있던 대한민국의 평화가 밖으로 성큼 다가온 것 같다”고 감상했다.
이씨는 “요즘 전쟁과 범죄가 많이 일어나는 만큼 평화가 잘 지켜지지 않는 것 같다”며 “평화의 소녀상을 지킴으로써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연대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고 전했다.
10년 넘게 소녀상 곁을 지켜봤다는 김부미(69)씨는 새하얀 저고리와 검은 치마 차림으로 소녀상을 찾았다. 그는 “그동안 소녀상이 숨도 쉬지 못할 감옥에 갇혀 있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며 “이렇게 6년 만에 바리케이드가 철거되는 모습을 보니 시민의 힘으로도 역사를 바로잡는 변화를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다”고 말했다.
이어 “소녀상은 특정 단체가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지켜야 하는 존재”라며 “위안부 피해자 보호법도 생긴 만큼 이제는 함부로 훼손하거나 위해를 가하기 어려워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처럼 “아주 후련하다”, “마음이 다 시원하다”는 반응이 곳곳에서 터져나왔다. 시위 이후 안전 관리를 위해 주변을 지키던 경찰들조차 은근슬쩍 다가와 사진을 촬영했다. 그 모습에 곁을 지키고 있던 기자들과 시민들은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6년 만에 되찾은 소녀상을 기념하듯 현장 곳곳에서는 웃음꽃이 만개했고 초여름을 닮은 더운 볕이 사람들 위로 쏟아졌다.
한 차례 시민들의 발길이 지나간 뒤에는 본격적인 새단장 작업이 시작됐다. 바리케이드 철거 이후 평화의 소녀상 원작자인 김운성·김서경 작가 부부는 수년간 비바람에 깎여나간 소녀상 복원 작업에 나섰다. 김서경 작가는 작업에 앞서 도색이 벗겨진 소녀상의 단발머리와 의자를 살펴보며 안타까운 듯 여러 차례 손으로 어루만졌다.
그는 이날을 기점으로 이틀간 작업을 진행하며 녹슨 부분을 제거하고 홈을 메우고 다시 채색하는 긴 과정을 거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모든 작업은 봉사자들과 함께 진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평화디딤돌에서 나온 자원봉사자들은 소녀상과 디딤돌 주변에 쌓인 먼지와 이끼 제거에 나섰다. 사포질과 땜질에 앞서 시판 치약과 스펀지, 청소 솔이 봉사자들의 손에서 손으로 오갔다. 소녀상 곁에 나란히 늘어선 37개의 ‘진실을 위해 여기 선 여성-디딤돌’은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및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기리고 그들의 명예와 존엄을 회복하기 위한 추모 동판이다.
디딤돌 주변의 보도블록 틈과 소녀상 받침 사이에 끼어 있던 6년 세월의 이끼와 흙 찌꺼기들이 걷혀 나가자 구조물들의 윤곽이 한층 또렷해졌다. 칼칼한 흙먼지가 바람을 타고 날리고 오후 2시의 뜨거운 뙤약볕이 내리쬐는 와중에도 현장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웃고 떠들며 작업을 이어가는 청소 봉사자 무리를 지켜보던 한 시민은 “이렇게 평화로운 노동이 있을까!”라고 탄성했다. 이들의 모습은 마치 평화의 소녀상이 맞을 밝은 미래를 미리 보여주는 듯했다.
봉사자들의 정수리는 햇볕에 붉게 익었고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혀 흘렀다. 더위를 견디다 못한 김서경 작가는 스카프를 얼굴 주변에 둘러쓴 채 작업을 이어갔다. 봉사자들 대부분은 50대 이상의 중장년층이었지만 소녀상 앞에 몸을 웅크려 앉아 작은 틈을 꼼꼼히 닦는 모습은 소꿉놀이를 하는 아이들처럼 천진하고 진지한 모습이었다. 소녀상 앞에 세월을 거슬러 다시 소년소녀로 돌아간 시민들이 6년간 이어진 격리의 끝을 환영하고 있었다.
이날 수요시위 참가자들과 한국YWCA연합회는 공동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들은 “피해자들을 공개적으로 모욕해 온 단체의 대표가 구속됐고 개정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보호법은 실효를 목전에 두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이 모든 것은 정의로운 해결을 위해 한치의 물러섬 없이 싸워온 할머니들과 매주 연대로 함께 한 시민들이 이뤄낸 결실이다. 우리는 이 진전을 환영하면서도 이것이 끝이 아니라 정의와 평화를 향한 더욱 뜨거운 연대와 투쟁의 시작임을 분명히 한다”고 외쳤다.
이어 일본 정부를 향해 일본군성노예제에 대한 역사 왜곡과 평화의 소녀상 설치 방해를 중단하고 피해 생존자들에게 공식 사죄와 법적 배상을 즉각 이행할 것을 요구했다. 현 시점 대한민국 정부에 등록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240명 가운데 생존자는 단 5명뿐이다.
또 한국 정부와 외교 당국에는 오클랜드 평화의 소녀상 설치 방해를 외면한 책임을 통감하고 피해자들의 명예 회복과 정의로운 해결을 위한 외교적 책무를 다할 것을 촉구했다. 수사기관과 사법부를 향해서는 전시 성폭력 관련 역사부정행위자들을 엄중히 처벌하고 재발 방지 대책을 마련하라고 요구했다.
김서경 작가는 본보에 “소녀상 바리게이트 철거는 혐오와 차별의 목소리를 내던 이들이 이 자리에 없어 가능한 부분이었다고 생각한다”면서 “지난주에는 중학생 아이들이 이 현장에 왔었다. 세상에 이제서야 긍정적인 에너지가 흐르고 있다고 느낄 수 있었다”고 감상했다.
이어 김 작가는 “소녀상의 빈 의자는 그런 마음을 담은 자리”라며 “누구든 그 자리에 앉아 할머니들이 왜 30년이 넘도록 이 자리를 지켜왔는지, 할머니들이 돌아가신 뒤에도 왜 많은 시민들이 이곳을 지키고 있는지 생각해봤으면 한다”고 했다.
이어 “소녀상은 할머니들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지만, 할머니들께는 전쟁 없는 세상, 자신들과 같은 피해자가 없는 세상을 바라는 꿈이 있었다”며 “시민들이 그런 뜻을 함께 떠올리고 지금도 전쟁 속에서 피해받는 아이들의 현실까지 생각하며 인류애를 함께 나누고 책임지는 자리로 소녀상을 대해주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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