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취재1팀] 안예리 기자 = ‘고품질 쌀’을 만들겠다던 정부가 정작 평가 기준에서는 ‘기계 숫자’만 보고 있다. 쌀을 도정하는 기술이 발전하면서 더 좋은 쌀을 만들 수 있는 기술이 생겨나고 있지만, 좋은 기술은 뒷전이 된 지 오래다. 정부의 양곡 평가가 품질보다 설비 기준을 우선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는 보관·공급하는 쌀을 가공할 업체를 선별하기 위해 ‘정부관리양곡 도정공장 등급 평가’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정부는 농가에서 매입하거나 비축한 쌀을 직접 가공하지 않고 민간 도정공장에 맡기는데, 이때 일정 기준을 충족한 공장을 평가해 등급을 부여하고 그 결과에 따라 도정 물량을 배정한다.
무너진 경쟁
평가는 ‘정부관리 양곡처리 도급계약 체결 요령’과 ‘정부관리양곡 도정공장 등급 평가 기준’에 따라 이뤄진다. 공장의 설비와 운영 여건 등을 종합적으로 점검해 S, A, B 등급으로 구분하는 방식이다. 일반적으로 등급이 높을수록 더 많은 정부양곡 처리 물량을 맡게 되는 방식이다.
이 때문에 도정공장 입장에서는 평가 결과가 곧 수익과 직결된다. 정부양곡 도정은 안정적인 물량이 확보되는 사업인 만큼, 높은 등급을 유지하는 것이 공장 운영의 핵심 조건으로 작용한다. 평가 기준이 시장 구조와 투자 방향까지 좌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본래 이 제도는 정부양곡의 품질을 일정 수준 이상으로 유지하기 위한 장치다. 공정 관리 능력이 검증된 공장에 물량을 맡겨 품질 편차를 줄이고, 안정적인 공급 체계를 확보하겠다는 취지다. 그러나 실제 현장에서 작동하는 방식과 제도의 본래 목적 사이에는 적지 않은 간극이 존재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문제는 이 현행 제도가 실제 쌀 품질을 얼마나 안정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지를 평가하기보다, 공장이 어떤 설비를 얼마나 갖추고 있는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점이다.
현재 도정공장 등급 평가는 정미기(벼를 깎아 백미로 만드는 기계)와 연미기(쌀 표면을 매끄럽게 다듬는 기계) 등 주요 장비의 보유 여부와 대수를 중요한 기준으로 삼고 있다.
특히 상위 등급을 받기 위해서는 일정 수 이상의 설비를 갖춰야 한다는 조건이 유지되고 있는데, 이 과정에서 ‘어떤 결과물을 만들어냈는가’보다 ‘기계를 몇 대 갖췄는가’가 평가를 좌우하는 요소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이 같은 기준은 도정 기술의 변화와는 괴리가 있다. 최근에는 공정 효율을 높이고 장비 수를 줄이면서도 균일한 품질을 구현할 수 있는 기술이 등장하고 있지만, 현행 제도에서는 이 같은 방식이 충분히 반영되기 어렵다.
결과적으로 동일하거나 더 높은 품질을 만들어낼 수 있는 공장이라도 설비 요건을 충족하지 못하면 평가에서 불리해질 수밖에 없는 구조가 형성돼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도정공장들은 품질 개선이나 공정 혁신보다 평가 기준에 맞는 설비를 확보하는 데 우선순위를 두게 된다.
고품질 쌀 정책 심사 기준은 ‘기계 숫자’만
쌀 품질보다 설비가 먼저…뒤바뀐 평가 기준
실제 현장에서는 필요 이상의 장비를 갖추거나, 기존 설비를 유지하기 위해 추가 비용을 들이는 경우도 적지 않다. 평가 점수를 확보하기 위한 ‘기준 맞추기식 투자’가 이뤄지고 있다는 것이다. 또 새로운 기술을 적용하려는 시도는 자연스럽게 위축될 수밖에 없다.
공장이 기존 설비 구성을 유지하거나 확대하는 것이 평가에서 유리하다면, 굳이 공정 구조를 바꾸거나 새로운 방식을 도입할 유인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기술 개발과 도입이 경쟁력이 아니라 ‘리스크’로 작용하는 구조가 형성되는 셈이다.
특히 정부양곡 도정은 안정적인 물량이 보장되는 사업이라는 점에서, 공장 입장에서는 평가 기준을 벗어난 실험적 시도를 하기보다는 기존 구조를 유지하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이 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설비 중심의 평가 구조가 도정공장 간 기술 경쟁 자체를 제한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정부는 고품질 쌀 생산과 쌀가공식품 산업 확대를 주요 정책 방향으로 내세우고 있다. 소비 감소로 위축된 쌀 소비를 가공식품 시장으로 확장하고, 수출 경쟁력을 높이겠다는 취지다.
실제로 쌀가공식품 수출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으며 산업적 가능성도 확대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정책 방향과 달리, 정부양곡을 실제로 가공하는 현장 시스템은 여전히 과거 기준에 머물러 있다. 정책은 ‘고품질’을 강조하고 있지만, 이를 뒷받침해야 할 생산·가공 단계의 제도는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
이처럼 설비 중심의 평가와 기술 경쟁이 제한된 구조는 결국 최종 결과물인 쌀의 품질 문제로 이어진다. 공정 개선이나 기술 도입을 통해 품질을 높이기보다, 평가 기준을 충족하는 데 초점이 맞춰질 경우 품질관리의 실질적 수준이 뒷받침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실제로 정부양곡을 사용하는 식품 업계에서는 품질과 관련된 불만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대표적으로 밥맛 저하에 대한 지적이 반복되고 있으며, 완전미(멀쩡한 쌀알) 비율이나 외관 등 상품성 측면에서도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특히 쌀 가공식품 업계에서는 원료 쌀의 품질 편차가 크다는 점을 주요 문제로 꼽고 있다.
기준만 통과하면 끝? 사라진 기술 경쟁
같은 도정 등급인데…쌀 품질은 제각각
이 같은 문제는 단순히 원료곡(가공하기 전 상태의 쌀) 상태만으로 보기 어렵다. 쌀의 품질은 도정 과정에서 크게 좌우되는데, 공정의 정밀도와 방식에 따라 완성도에 차이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정공장 평가가 공정 성능이나 결과물 품질보다 설비 구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현행 구조에서는, 이런 좋은 품질의 쌀을 만들어내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결국 일정 수준 이상의 설비를 갖췄다는 이유만으로 평가를 통과한 공장이라 하더라도, 실제 품질 경쟁력은 떨어지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업계에서 “같은 기준을 통과한 공장이라도 결과물 품질에는 차이가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문제는 이런 상황에서도 책임 구조가 명확하지 않다는 점이다. 일부 업체들은 품질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교환이나 보상이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고, 도정공장 측에서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고 토로한다. 이로 인해 식품업체들은 자체적으로 선별 설비를 확충하거나 인력을 추가 투입하는 등 비용을 떠안고 있는 상황이다.
정부양곡 품질과 관리 체계에 대한 문제 제기는 최근 불거진 사안은 아니다. 관련 업계와 단체에서는 이미 수년 전부터 시설 노후화와 품질 저하 문제를 지적하며 제도 개선 필요성을 지속적으로 제기해 왔다. 정부 역시 정부양곡 품질 향상을 위한 개선 필요성에 대해서는 인식하고 있다.
우수 시설 중심으로 물량을 배정하거나 도정공장 등급에 따라 계약 기간을 차등 적용하고, 시설 개선을 유도하기 위한 인센티브를 부여하는 방안도 논의됐다. 시설 개선과 제도 보완 논의가 이어져 왔음에도 불구하고, 도정공장 평가 기준이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는 한 구조적인 문제는 반복될 수밖에 없다는게 현장 인력 입장이다.
발목 잡다
공정 업계 한 관계자는 “같은 기준을 통과해도 실제 쌀 품질은 공장마다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며 “결과물을 보지 않고 설비만 보는 평가 구조에서는 기술을 바꿔서 더 좋은 쌀을 만들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이어 “품질 경쟁이 아니라 기준 맞추기 경쟁이 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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