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 '재판소원=4심제' 반대했는데…'녹십자 과징금 사건' 헌재가 따져본다
"심리불속행 가이드라인 정할 수도"…대형로펌 사건 선정에 곱지 않은 시선도
(서울=연합뉴스) 이미령 기자 = 헌법재판소가 '재판소원 1호' 사건으로 대법원 심리불속행 기각 판결을 고르면서 양 기관 간에 갈등이 재점화됐다.
앞서 대법원이 헌재의 재판소원 도입을 두고 "4심제가 돼 재판의 지속과 반복으로 국가경쟁력 약화를 초래한다"는 반대했는데, 헌재가 대법원이 그동안 '10초 재판'이라고 비판받아온 심리불속행 사건을 따져보겠다고 골랐기 때문이다.
향후 전원재판부에서 심리불속행 제도 자체보다는 운영 측면의 적법성에 무게를 두고 판단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지만 법조계는 첫 사건부터 대법원과 긴장이 높아질 수밖에 없는 사건을 골랐다고 바라본다.
2일 법조계에 따르면 헌재는 지난달 28일 녹십자가 '백신 입찰담합' 과징금 패소 판결을 취소해달라며 낸 재판소원을 사건을 전원재판부에 회부했다.
지난 3월 12일 재판소원 제도 시행 이후 지난달 27일까지 접수된 525건 가운데 처음으로 사전심사를 통과해 본격적인 심리를 받게 된 것이다.
녹십자는 백신 입찰 담합 사건으로 공정거래위원회에서 부과받은 과징금 20억여원을 취소해달라며 행정소송을 냈으나 작년 10월 서울고법에서 패소했다.
녹십자가 불복했지만 대법원은 올해 2월 심리불속행 기각으로 판결을 확정했다.
녹십자는 관련 형사사건에선 무죄를 확정받았는데, 이와 행정소송 원심판결이 엇갈린 상황에서 심리불속행으로 상고를 기각해 재판청구권이 침해됐단 게 녹십자 측 주장이다.
1994년 도입된 심리불속행 제도는 형사 사건을 제외한 소송에서 2심 판결에 중대한 법령 위반이 없으면 심리를 속행하지 않고 상고를 기각하는 제도다.
상고가 사실상 무제한 허용되는 구조에서 상고 남용을 걸러내고, 대법원이 법률심의 기능을 효율적으로 수행하도록 하기 위한 목적이다.
현재 민사·가사·행정 사건의 70%가량이 심리불속행 기각으로 확정된다.
그러나 재판 당사자들 사이에선 상고심까지 제대로 다퉈보지도 못한 채 심리가 종결되는 데다 판결문에 그 이유도 기재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불만이 제기돼왔다.
헌재는 다만 심리불속행 제도가 재판청구권을 침해한다는 취지의 헌법소원에서 최근까지도 합헌 결정을 유지해왔다.
재판청구권이 모든 사건에 대해 상고심 재판을 받을 권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심리불속행 제도는 '개별 사건의 권리 구제'보다 '법령 해석의 통일'을 우선한 규정이라는 이유(2006헌마551 결정 등)에서다.
판결문에서 '심리 속행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 이상의 이유 기재를 요구하는 것도 상고심에 불필요한 부담을 가중해 오히려 입법 취지에 반한다고 판단했다.
이번 사건에선 심리불속행 제도 자체보다는 그 구체적 운영 방식에 대해 헌재가 판단에 나설지, 나선다면 그 범위를 어디까지 설정할지가 쟁점이 될 전망이다.
헌법연구관으로 근무한 김진한 변호사(법무법인 클라스한결)는 "제도가 합헌이라고 해도 남용해선 안 되는 만큼 헌재가 '이런 한계가 있다'고 선을 긋는 방식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심리불속행은 대법원 자신도 문제를 알고 있지만 현실을 바꾸기엔 어려운 측면이 있어 '아킬레스건'으로 느껴지는 사안일 것"이라며 "법원이 가장 민감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문제를 헌재가 1호 사건으로 선정했단 건 상당히 용기를 낸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헌법연구관 출신 노희범 변호사도 "심리불속행이 가능한 경우와 불가능한 경우 가이드라인을 정할 것 같다"며 "앞으로는 심리불속행 기각이 대폭 줄어들 가능성이 있다"고 전했다.
이 과정에서 자칫 헌재가 대법원의 권한을 건드리는 모양새로 비칠 경우 양 기관 간 긴장 관계가 고조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장영수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는 "헌재가 제도 자체에 대해 틀렸다고 하긴 어렵고 개별 판결의 문제를 살펴볼 텐데 과연 그 선이 어딘지는 조심스럽게 봐야 할 것"이라며 "헌재가 너무 많이 나가면 대법원과 갈등이 심해질 수 있다"고 밝혔다.
한 전직 대법관은 현 구조에서 심리불속행이 불가피한 만큼 "헌재가 제도 자체에 대해서는 손을 대기 어려울 것"이라며 "이번 사건만 놓고 판단하겠지만 헌재로서도 위험 부담이 있다"고 말했다.
문제가 된 녹십자 행정소송 판결 자체를 두고도 반응이 엇갈린다.
녹십자 측을 대리하는 이우열 변호사(법무법인 율촌)는 "상고심법상 원심판결이 대법원 판례 취지에 반하는 경우 심리불속행 기각할 수 없게 돼 있다"며 "이번 사건은 형사재판에선 '경쟁 제한성이 인정되지 않는다'고 판단해 대법원에서 무죄가 나왔고, 행정소송 원심에선 상반되게 나온 만큼 대법원이 심리불속행 할 사유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반면 수도권 법원의 한 부장판사는 "행정이나 민사는 증거가 조금이라도 우세한 사람이 이기지만, 형사는 '의심스러우면 피고인의 이익으로' 판단한다"며 "행정과 형사 결론이 충분히 다를 수 있다"고 강조했다.
민사나 행정 사건의 결론이 형사 사건 결론과 엇갈렸다는 이유만으로 심리불속행 기각이 허용되지 않는다고 보기 어렵다는 취지다.
사법부 내부에선 1호 사건 지정을 놓고 재판소원이 '4심제'로 흐르거나 '강자의 도구'로 활용될 수 있다는 기존 우려가 현실화한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헌재가 지난 한 달 반 동안 수백 건을 사전심사에서 각하한 가운데, 결국 대형 로펌인 율촌이 대리하는 사건을 첫 전원재판부 심리 대상으로 올렸다는 점에서다.
한 법조계 관계자는 "결국 심리불속행 제도까지 건들면서 1호 사건으로 선정된 건 대형 로펌이 맡은 수십억짜리 담합 사건인데 (힘없는 자들의) 기본권 구제와는 거리가 멀지 않느냐"고 꼬집었다.
아울러 상고 이유에 해당하는지를 판단하려면 원심의 법리 해석을 들여다볼 수밖에 없어 결국 법률심을 하게 되는 것 아니냐는 시각도 있다.
한편 헌재와 대법원의 갈등은 사법권의 최종 해석권한을 두고 기능적 갈등이 반복돼 왔다.
헌법재판은 1948년부터 헌법위원회와 대법원이 번갈아 맡다가 1987년 현행 헌법이 만들어지면서 헌법재판소가 탄생했다.
헌법재판소법 제15조는 '헌법재판소장의 대우와 보수는 대법원장의 예에 따르며, 재판관은 정무직으로 하고 그 대우와 보수는 대법관의 예에 따른다'라고 규정한다.
대법원장과 헌재 소장, 대법관과 헌법 재판관이 대등한 예우를 받는 것은 이에 근거한다.
문제는 해당 규정이 두 기관을 대등하게 규정하기에 역할 중첩 및 불완전한 분업에 따른 갈등이 반복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상황에서 재판소원 도입을 둘러싸고 빚어진 두 기관 간 신경전이 1호 사건 지정을 계기로 표면화 됐다는 해석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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