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비나미술관서 고상우 '스틸 브리딩'전…백령도 물범부터 실험실 토끼까지
스위스 비디오 아트 선구자 질라 로이테네거 아시아 첫 개인전도 열려
(서울=연합뉴스) 박의래 기자 = 작가 고상우(48)는 멸종위기 동물들의 초상화를 그린다. 호랑이를 비롯해 치타, 토끼, 얼룩말, 코뿔소 등이 무표정한 얼굴로 정면에서 관람객과 눈을 맞춘다.
화면 중심에 좌우 대칭 구도로 배치된 정면 초상은 대상에 권위를 부여한다. 이를 통해 동물과 인간이 평등하다는 메시지를 강조한다.
고상우 기획전 '스틸 브리딩: 아직 숨 쉬고 있다'가 오는 2일부터 31일까지 서울 진관동 사비나미술관에서 열린다.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멸종위기의 동물들이지만 그들이 아직 살아있다는 의미"라며 "그들이 아직 숨 쉬고 있다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해보는 작업"이라고 설명했다.
작가는 직접 사진을 찍은 뒤 크게 확대해 디지털 펜으로 일일이 그려낸다. 미세한 잔털 하나까지 표현하며 쌓아 나가다 보면 작품 한 점의 파일 크기는 약 10GB(기가바이트)에 달한다.
대상을 파란색으로 표현하는 것도 고상우 작품의 특징이다. 작가는 10대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고, 인종차별을 겪었다. 인종차별에 대한 전복의 의미를 담아 자신의 사진을 반전시키는 작업을 시도했고, 그 결과 피부색의 보색인 푸른색이 도출되면서 이후 파란색을 주요 표현 방식으로 사용하고 있다.
'런 어웨이'는 2023년 서울 어린이대공원에서 탈출한 얼룩말 '세로'가 모델이다. 당시 세로는 부모를 잇달아 잃고 홀로 지내다 우리를 부수고 탈출했고, 3시간 반 만에 포획됐다.
작가는 "반항적인 세로의 눈빛을 표현하고 싶었다"며 "눈에 하트를 그렸다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 빼고 대신 세로가 뚫고 나오는 철장을 하트 형태로 표현했다"고 설명했다.
고상우의 작품에는 하트가 자주 등장하는데, 치유와 생명을 상징한다.
'사라진 감각'은 동물권을 다룬 영화 '랄프를 구해줘'를 모티프로 한 작품으로 마스카라 실험을 당하는 토끼가 주인공이다.
토끼는 눈물양이 적고 눈 깜빡임도 거의 없어 마스카라 실험에 투입된다. 강제로 고정된 상태에서 3천번 이상 마스카라를 바르는 실험을 당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시력을 잃기도 한다.
작품 속 토끼는 마스카라 철장 안에 갇혀 있다. 목걸이의 '3K'는 3천번의 마스카라 실험을 의미한다. 작가는 토끼의 눈에 하트 모양 안대를 씌워 위로를 전한다.
세계자연기금(WWF)과 긴밀히 협력해 온 작가는 이번에는 WWF와 백령도의 점박이물범 프로젝트에 나섰다.
한국과 북한, 중국의 군사적 경계와 긴장이 교차하는 북방한계선(NLL) 해역에서 서식하는 물범은 인간이 만든 분단과 갈등의 한가운데에서도 자유롭게 오가며 살아간다. 이를 통해 생명의 지속성과 공존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고상우는 오랜 노력 끝에 물범의 정면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고 이를 바탕으로 작품을 제작했다.
국내 1호 거점동물원인 청주동물원과 협력한 작품들도 공개된다. 청주동물원은 2014년 야생동물 서식지 외 보전기관으로 지정돼 멸종 위기 동물의 보전 사업을 펼치고 있다.
'하나'는 선천적 부리 기형으로 야생에서 살아갈 수 없어 구조된 독수리 '하나'가 주인공이다. 날카로운 눈빛에서는 맹금류의 본능과 하늘을 향한 비행의 갈망이 읽힌다.
하지만 하나의 의지와 달리 부리 기형 탓에 야생에서는 살아갈 수 없다.
작가는 "나는 동물원에 반대하지만, 청주동물원을 보면서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며 "동물은 야생으로 돌아가야 하지만 야생으로 돌아갔을 때 스스로 살 수 없는 동물들도 있다. 이런 동물들을 위한 동물원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한편 사비나미술관에서는 스위스 비디오 아트의 선구자 질라 로이테네거의 아시아 첫 개인전 '슈퍼 트루퍼: 살아남은 자들'도 2일부터 열린다. 회화, 드로잉, 영상설치, 세라믹 등 총 14점을 선보인다.
슈퍼 트루퍼는 공연장에서 특정 대상을 강렬하게 비추는 핀 조명을 뜻한다.
로이테네거는 이 빛을 통해 멸종 위기 동물, 도시의 유기견, 사회 주변부의 존재들을 비추며 우리가 외면해온 대상들을 다시 바라보게 한다.
그는 드로잉과 영상, 빛과 공간을 결합한 '비디오 드로잉' 작업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평면 이미지를 공간 전체로 확장해 관람객의 몰입을 이끌어낸다.
대표작 '스트레이독'(Straydog)은 이번 전시를 위해 전시 공간에 맞춰 만든 장소 특정적 작품이다.
벽면에 그린 가로등 아래를 떠돌이 개의 그림자가 반복해서 걸어가며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빛은 존재를 드러내는 동시에 소외를 환기하는 장치로 작동한다.
이 전시는 8월 16일까지 이어진다.
laecorp@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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