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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세상이 열광하는 그림이 있습니다. 누구나 찬사를 아끼지 않는 걸작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아름다운 작품, 화려한 명성 뒤에 숨은 화가는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지독하게 어긋난 운명, 고단하고 허무한 삶이었노라고 말입니다. 이데일리는 오랜 시간 ‘그림이 하는 말’을 들어온 이윤희 미술평론가와 함께 세계미술사에 굵직한 획을 그은 천재작가들의 인생역정을 더듬습니다. 단순한 일대기를 넘어섭니다. 뜨거운 예술혼이 맞닥뜨린 차가운 현실, 그 쓸쓸한 생이 한사코 밀어냈을 결정적 장면을 엿봅니다. 삶이 묻고 그림이 답합니다. 캔버스에 굽이치던 화가의 인생길 ‘화폭역정’입니다. 매주 금요일 독자 여러분께 다가섭니다. <편집자>편집자>
[이윤희 미술평론가] 여기 세 인물이 있다.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뻗어 누군가를 붙잡으려는 젊은 여인이 먼저 보인다. 절박하고 간절하다. 그 여인의 간곡한 손을 놔버린 중년의 남성은 망토자락 휘날리며 유혹하듯 그를 감싼 노년의 여인에게 이끌려가고 있다. 이 극적인 장면은 카미유 클로델(1864∼1943)의 청동조각 ‘성숙의 시대’(1902)에 새겨져 있다. 작품이 제작된 이래 130년 남짓 세상 사람들은 이 걸작 속 세 인물을 확신했다. 무릎 꿇은 여인은 클로델 자신이며, 끌려가는 남자는 오귀스트 로댕(1840∼1917)이고, 그를 데려가려는 노파는 로댕의 아내 로즈 뵈레(1844∼1917)라고. 과연 그런가. 도대체 이 세 인물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클로델은 프랑스 북동부 페르앙타르드누아의 부르주아 집안에서 태어났다. 훗날 프랑스 현대시의 거장이 될 시인 폴 클로델(1868∼1955)의 누이였고, 어린 시절부터 진흙으로 형상을 만드는 일에 마음을 빼앗긴 소녀였다. 열여덟 살에 가족과 함께 파리로 이사한 클로델은, 여성을 받아들이지 않던 국립장식미술학교 대신 콜라로시 아카데미에 등록한 뒤 조각가 알프레드 부셰의 지도를 받았다. 부셰가 프랑스 국가공모전 살롱에서 수여하는 상을 받고 로마로 떠나면서, 클로델의 지도를 대신 맡은 이가 마흔두 살의 로댕이었다.
로댕은 클로델의 재능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스무 살의 클로델은 곧 로댕의 아틀리에에 합류했다. 인체의 묘사에서 가장 까다로운 부분인 손과 발을 클로델에게 맡길 정도로 로댕은 그의 실력을 인정했다. 로댕의 걸작 ‘칼레의 시민들’(1884∼1885)의 손이며, ‘지옥문’(1880∼1917)의 발가락 등이 클로델의 손끝에서 빚어졌다.
◇스승 로댕에 견제받고 연인 로댕에 버림받고
두 사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연인이 됐고, 여기서 클로델의 비운이 시작됐다. 로댕에게는 이미 20여 년을 함께해 온 동반자 뵈레가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로댕은 공식적으로 미혼이었고, 클로델은 자신이 로댕의 정당한 아내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로댕은 자신에게 헌신하는 뵈레를 끝까지 떠나지 않았고 뵈레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기 두 주 전, 로댕 자신이 사망하기 열 달 전에 결혼식을 올렸다. 로댕은 끝까지 무엇을 재고 있었을까.
클로델은 빠르게 성장하는 ‘한 명의 조각가’였다. 생각해 보면 로댕이 진실로 두려워한 것은 어쩌면 사랑의 선택이 아니라 동종업계의 강렬한 라이벌을 곁에 두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클로델은 자신의 안식처가 돼주고 집안일을 도맡을 수 있는 여인이 아니라 탁월한 재능을 가진 젊은 조각가였기 때문이다. 자신의 성공을 위해 달려가는 여인을 19세기 말 남성은 감당하기 어려웠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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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2년 무렵 클로델은 임신을 중단한 것으로 전해진다. 19세기에 임신 중단은 목숨을 거는 일 중 하나였다. 그 일을 겪은 뒤 두 사람의 관계는 균열을 드러냈고, 1898년 마침내 클로델은 로댕을 떠났다. 클로델은 자신의 이 시기를 성숙기라고 부르고 싶었던 모양이다. 클로델 일생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 ‘성숙의 시대’가 바로 이때 만들어졌다.
조각 속 세 인물을 두고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클로델과 로댕, 뵈레라고 보는 해석이 지배적이지만 사실 그 전기적 독해는 너무 좁다. 작품은 그 이상이다. 한 사람의 사적인 비극이라기보다는 인간 보편의 운명에 대한 시각적 우의로 보인다는 뜻이다. 청춘이 성년에게 무엇을 간청하는가, 성년은 노년에게 어떻게 끌려가는가. 세 인물의 몸이 인체를 끊어 잇듯 대각선을 그리는 구성은 흐르는 시간 그 자체의 표상이다. 젊음은 붙들 수 없고 거역할 수 없는 시간의 흐름에 의해 노년으로 이끌려 간다. 누구나 말이다.
‘성숙의 시대’ 석고본은 1899년 완성해 그해 6월 국립미술협회(SNBA) 살롱에 출품됐다. 작품을 처음 본 로댕은 격노했다. 자신의 비겁함을 만천하에 폭로한 것처럼 뜨끔했기 때문이다. 결국 1895년 프랑스 정부가 클로델에게 의뢰했던 청동 주조가 끝내 주문이 취소되면서 제작도, 전시도 하지 못했다. 1900년 만국박람회에서도 거절당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청동조각은 이후 1902년 개인 후원자의 도움으로 주조한 것이다.
당시 로댕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했는가에 대해서는 미술사가들 사이에 이견이 있다. 로댕미술관 측은 로댕이 단 한 번도 이 작품의 전시 자체를 막으려 한 사실이 없다고 기록하기도 했다. 하지만 살롱의 심사위원장 자리에 로댕이 있었고, 그의 그림자가 어떤 방식으로든 작품의 운명에 드리웠을 것이라는 추정은 필연적이었다. 적어도 클로델 자신은 그렇게 믿었다.
클로델은 한때 사랑했던 자가, 한때의 스승이 자신의 길을 가로막는 것을 견뎌야 했다. 미술계, 그 안에서도 좁아터진 조각계가 당대 거장 로댕과 그가 버린 연인으로 클로델을 바라볼 때 클로델의 분노는 평정심을 잃었다. 그럼에도 몇 해 동안 클로델은 자신의 가장 독창적인 작품들을 완성해갔다. 피해망상으로 가족에 의해 정신병원에 갇히기 전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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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 클로델의 작업에는 결정적 전환이 있다. 1893년 동생 폴에게 보낸 편지에 쓴 대로 “더 이상 로댕의 것과 닮지 않았다”는 조각 ‘수다쟁이들’(1897)이 대표적인 하나다. 의도적으로 작게, 가로세로 40㎝ 남짓한 크기로 만든 이 군상에는 네 명의 여인이 등장한다. 한 여인이 털어놓는 비밀을 들으려 나머지 세 명의 여인은 몸을 한껏 기울이고 있다. 클로델은 기차 안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여인들을 보고 영감을 얻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유럽 조각에선 처음…여인의 ‘사적 일상’ 주제로 삼아
규모로는 작은 작품이지만 ‘수다쟁이들’의 미술사적 위상은 결코 작지 않다. 먼 훗날 시카고미술관과 게티미술관이 공동으로 연 ‘클로델 회고전’(2023)이 평가한 대로 “남성 관람자에게 가슴 한 점 엉덩이 한 점을 보이기 위한 핑계로서가 아니라 여성들이 실제 경험하는 그대로 플라토닉한 친밀성을 조각”했기 때문이다. 여인들의 누드는 관람의 대상이 아니라 여인들의 자족적 세계의 일부였던 것이고, 클로델이 사실상 처음으로 여인들의 그 사적 영역을 조각의 정당한 주제로 격상시켰던 것이다. 19세기 말 유럽 조각이란 장르가 거의 다루지 않았던, 일상에서 길어올린 이 장면은 로댕적 거대한 영웅 신화를 떠난 완전히 새로운 양식이었다. 클로델이 마침내 자신의 길을 발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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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길지 않았다. 1905년 무렵부터 클로델은 깊은 망상의 어둠에 잠식됐다. 자신이 만든 작품들을 망치로 부수기 시작했고, 자신의 아틀리에에 아무도 들이지 않았다. 동생 폴은 1909년 누나를 방문한 뒤 일기에 적었다. “파리의 미친 카미유. 벽지는 길게 찢겨 늘어져 있고, 부서진 안락의자 하나만 남아 있다.”
1913년 클로델을 끝까지 걱정하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8일 뒤 동생 폴은 클로델을 직접 진찰하지 않은 의사 한 명의 서명을 받아 누나를 정신병원에 강제로 입원시켰다. 이후 클로델은 1943년 숨을 거둘 때까지 그 정신병원에서 30년을 보내게 된다.
장례식에는 가족 누구도 오지 않았다. 의사 한 사람만이 클로델의 시신이 시트에 싸여 다른 시신들 사이로 구덩이에 던져지는 것을 지켜봤다. 처음에는 임시 무덤에 안치했으나 10여 년이 흐르도록 누구도 유골을 찾아가지 않자 결국 무연고 공동묘지에 이장했다. 다른 시신들의 뼈와 뒤섞인 채로. 한 천재의 흔적은 그렇게 지워졌다. 먼 후일 동생 폴의 손녀가 클로델의 자취를 찾았을 때는 이미 아무것도 남지 않은 뒤였다. 2008년 유해 없는 빈 무덤에 묘비 하나가 세워졌다. 비문은 “클로델 가문과 그 주변이 바랐던 망각을 갚기 위해”라고 새겼다. 그 주문이 통한 걸까. 이제야 클로델이 서서히 깨어나고 있다.
△이윤희 미술평론가는…
1970년생. 대학을 다니던 20대 어느 겨울, 유럽행 비행기에 오른 것이 인생에 미술을 들인 결정적 계기가 됐다. 어느 미술관에서 마주친 렘브란트의 ‘어머니 초상’이란 작품이 발을 붙들었다. 뭔가 꿈틀거리는 게 올라왔다. 세상을 감동시킨 수많은 작품이 품은 이야기를 가지고 싶다는 열망과 함께였다. 이화여대 독문학과를 졸업한 뒤 동대학원 미술사학과에 진학해 본격적으로 미술의 역사, 미술의 말을 공부했다. 이후 ‘공간’ 지 미술기자로 출발해 대전시립미술관 학예실장, 아트센터 화이트블럭 학예실장, 청주시립미술관 학예실장, 수원시립미술관 학예과장 등을 거쳤고, 지금은 이화여대·추계예대 등에서 미술이론을 강의하며 오래전 렘브란트의 감동을 넓혀가고 있다. 번역서로 ‘그림자의 짧은 역사’(2006), ‘포토몽타주’(2003), ‘바디스케이프’(1999)가 있으며 저서로는 ‘불편한 시선: 여성의 눈으로 파헤치는 그림 속 불편한 진실’(2022), ‘꿈꾸는 방: 여성과 공간의 미술사’(2023)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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