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에미리트(UAE) 전격 탈퇴로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석유 시장 영향력이 흔들릴 것으로 전망된다. 사우디아라비아 주도 OPEC의 증산 제한에 오랜 불만을 품어 온 UAE가 이란 전쟁을 계기로 독자 행보를 가속했다는 분석이다. OPEC을 비난해 온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겐 반가운 소식으로, UAE가 걸프국보다 미-이스라엘로 기울었다는 해석이 나온다.
28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저널>(WSJ)을 보면 컨설팅사 리스타드에너지 지정학 분석 책임자 호르헤 레온은 UAE의 탈퇴는 "OPEC이 시장을 관리할 수 있는 능력을 지탱하는 핵심 기둥을 제거하는 것"이라며 "하루 480만배럴 생산 능력을 보유하고 있고 생산량을 늘리려는 야망까지 가진 회원국을 잃는 건 OPEC의 손에서 실질적 도구를 빼앗는 것과 같다"고 분석했다. 이날 앞서 UAE는 다음 달 1일 OPEC 및 OPEC 플러스(+) 동시 탈퇴를 선언했다.
국제에너지기구(IEA) 자료에 따르면 지난 2월 기준 UAE의 하루 생산량은 364만배럴로 OPEC 전체 생산량(하루 2982만배럴)의 12%를 차지했다. 회원국 중 네 번째로 생산 규모가 크다. 이 나라의 공급량은 세계 원유 생산량의 3%에 해당한다.
UAE는 수년 전부터 유가 유지를 위해 증산을 제한하는 사우디 주도 OPEC 정책에 불만을 품어 왔다. 아부다비를 중심으로 전세계 매장량의 6%에 해당하는 980억배럴의 풍부한 매장량을 가진 UAE는 OPEC 할당량인 하루 350만배럴 생산에 만족하지 못하고 증산을 요구해 왔다. 탈퇴 뒤엔 하루 500만배럴까지 생산량을 늘릴 수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UAE가 할당량을 상회하는 생산능력을 보유한 회원국인 것도 탈퇴가 OPEC의 생산량 조절 능력에 타격을 입히는 이유 중 하나다. UAE 탈퇴로 여유 생산능력을 가진 회원국은 사우디 하나만 남게 됐다.
<뉴욕타임스>(NYT)는 사우디가 장기적 유가 상승을 추구해 때로 회원국의 생산량을 제한하는 반면 UAE는 에너지 시장의 화석연료 탈피가 끝나기 전에 최대한 많은 석유를 판매하기 위한 생산량 극대화 전략을 추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상품 분석업체 아르거스미디어 선임분석가 바샤르 엘할라비는 "사우디가 향후 한 세기 동안 석유 시장 안정적 유지를 목표로 하는 반면 UAE엔 그런 절박함이 없다"고 분석했다.
UAE와 사우디는 지난해 말 예멘에서 서로 다른 파벌을 지원하는 문제가 불거지며 역내에서 정치적으로 대립하기도 했다.
호르무즈 해협이 봉쇄된 상황에서 UAE 탈퇴는 당장은 석유 시장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가능성이 높지만 "장기적으로는 OPEC의 구조적 약화"를 초래할 것이라고 레온 연구원은 전망했다.
UAE 탈퇴가 다른 회원국들을 흔들 수도 있다. UAE 두바이 기반 컨설팅사 카마르에너지 최고경영자(CEO) 로빈 밀스는 미 CNN 방송에 "떠날 때라는 게 있다면 지금이 바로 그 때"라며 "카자흐스탄도 떠날 가능성이 있다. 그 나라 역시 증산을 원하는 또 다른 주요 생산국"이라고 밝혔다.
미 CNBC 방송을 보면 에너지 컨설팅업체 라피단에너지그룹 밥 맥널리 회장은 OPEC 약화의 "가장 큰 영향은 석유 가격 변동성 증가일 것"이라고 내다봤다.
수하일 모하메드 알마즈루에이 UAE 에너지장관은 <로이터>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이번 결정은 다른 어떤 나라와도 논의하지 않고 내려졌으며 "이는 정책적 결정이고 생산 수준 관련 현재와 미래 정책을 신중히 검토한 끝에 내려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세계 에너지 수요가 증가할 것으로 본다며 UAE가 그 필요에 부응할 수 있다고 시사했다. 그는 호르무즈 해협 폐쇄로 인해 걸프국 수출길이 막힌 상황에서 탈퇴 발표가 시장에 즉각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으로 본다고 덧붙였다.
이란 전쟁이 UAE의 누적된 불만을 터뜨리는 계기가 됐다는 분석이다. 호르무즈 해협에 인접한 UAE는 이번 전쟁에서 2000개 이상의 미사일 및 무인기(드론) 공격을 받으며 이란의 가장 큰 보복 대상이 됐고, 이에 미온적으로 대응하는 걸프국들에 불만을 표해 왔다. UAE 대통령 외교고문인 안와르 가르가쉬는 27일 두바이에서 열린 걸프인플루언서포럼에서 걸프국들의 연대가 이란 전쟁이 제기한 "어려움에 걸맞은 수준이 아니었다"고 평가했다.
UAE의 불만은 이란 전쟁 중재국인 파키스탄에까지 번져 이달 파키스탄 외환보유고 5분의 1에 해당하는 35억달러(약 5조1800원) 차관을 즉시 상환하라는 통보로 이어졌다.
<파이낸셜타임스>(FT)를 보면 영국 싱크탱크 채텀하우스 연구원 닐 퀼리엄은 걸프국들은 "현재 모든 걸 흑백논리로 보고 있다"며 "(UAE 관점에서) 이 문제에 대한 중립성은 존재하지 않으며 중간 지대도 없다. 만일 당신이 중재에 나선다면 당신은 중간 지대에 섰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가르가쉬는 27일 "걸프 지역 밖 누구에게도 우리 안보 우선순위를 결정하게 할 수 없다. 내일 미사일은 그들이 아니라 우릴 향해 발사될 것"이라며 파키스탄을 지적하는 듯한 발언을 하기도 했다.
UAE 탈퇴는 걸프국보다 미·이스라엘 쪽과의 관계를 중시하겠다는 선택으로 여겨진다. UAE는 트럼프 대통령이 업적으로 내세우는 아브라함 협정에 의해 2020년 이스라엘과 정식으로 수교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UAE 유력 인사들이 미국과 이스라엘은 방어에 도움을 주고 있는 반면 아랍국들의 기여는 제각각이었다고 비판 중이었다고 지적했다. 미 라이스대 페르시아만 전문가인 크리스티안 코츠 울리히센은 이란 전쟁이 "기존 관계가 위기 상황에서 가치를 입증하지 못했을 수 있다는 UAE의 인식을 더욱 확고히 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했다.
<파이낸셜타임스>를 보면 UAE 학자이자 평론가인 압둘칼레크 압둘라는 "40일간 폭격을 겪으면 많은 것을 재고하게 된다"며 "지역적으로나 전세계적으로나 누가 진정으로 우릴 지지했고 누가 그렇지 않았는지에 대해 생각해 봤고, 공개적으로 우릴 도왔던 이들과 관계를 강화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UAE 탈퇴는 OPEC이 석유 가격을 부풀려 "나머지 나라들을 속이고 있다"고 주장해 온 트럼프 대통령의 구미에 맞는 것이기도 하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탈퇴를 통해 UAE가 트럼프 대통령의 외교적 총애를 받는 국가로 굳어질 수 있고 이는 투자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관측했다. 신문은 "UAE는 OPEC을 떠남으로써 미국의 참여를 확보할 수 있길 기대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란과 미국 협상이 교착 상태에 빠지며 국제유가는 3주 만에 다시 110달러를 넘어섰다. <파이낸셜타임스>에 따르면 브렌트유는 28일 장중 한때 배럴당 112.7달러까지 올랐고 이후 소폭 하락해 전 거래일 대비 2.8% 오른 배럴당 111.26달러에 거래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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