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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새 들어간 가이드라인

문화매거진 2026-04-29 23:24:22 신고

 

자주 눌러버리는 '전체 동의'로 선택 가능한 광고를 모두 수신해버리는 것처럼 / 사진: 구씨 제공
자주 눌러버리는 '전체 동의'로 선택 가능한 광고를 모두 수신해버리는 것처럼 / 사진: 구씨 제공


[문화매거진=구씨 작가] 예술 사업 기획서를 작성하고 예산을 정리하는 일이 습관이 되어버린 나는, 어느덧 단순한 워크숍이나 수업을 준비할 때도 지극히 당연하게 예산표를 성실히 만들고 채워 넣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동안 쌓아온 경험적 데이터를 연결해 보면 현실적인 예산 책정은 분명 필수적인 고려사항이다. 하지만 재료비를 아끼고 수많은 선택지 중 가장 저렴한 것을 골라내는 과정 속에서, 정작 내가 하고 싶었던 수업의 본질에는 이상한 가이드라인이 그어지기 시작했다. 효율을 따지는 과정에서 자꾸 타인의 사례를 참고하게 되고, 결국 내 기획은 어딘가에서 본 듯한 기성 프로그램들과 비슷해져 갔다.

비슷한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조차 마음대로 상상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버렸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나를 괴롭힐 뿐이다. 형식과 시스템은 일을 효율적으로 처리하는 데 분명 도움을 주지만, ‘그것이 진정 나에게 유익한가? 혹은 내 작업에 반드시 필요한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깊이 고민해 본 적이 없었다. 지원사업이 책정한 금액대에 따라 사업의 규모가 판별되듯, 나 또한 그 틀 안에서 숫자를 계산하며 내가 할 수 있는 영역을 스스로 단정 짓고 있었다. 내가 진정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지원금을 통해 할 수 있는 것’, 혹은 ‘사업 기간 내에 해치울 수 있는 것’들로 말이다. 

나를 옭아매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했던 그 가이드라인들이, 이후 나의 모든 사고방식에까지 침투해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이 자각은 문득문득 내게 속삭인다. 이제는 모든 것을 버리고 원점으로 돌아가야 할 때라고.

과거의 나는 경험들을 차곡차곡 쌓아 더 큰 예산을 확보하고, 그 자본을 동력 삼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조금이라도 더 실현하는 데 에너지를 쏟고 싶었다. 내 작업에 내 돈을 쓰기보다 ‘나랏돈’을 활용하겠다는 것이 꽤 명확한 목표이기도 했다. 그것은 작업이 결국 ‘전시’라는 형태를 갖췄을 때, 공적인 영역으로 환원된다는 논리에 어느 정도 동의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러 프로젝트를 주최자로서, 혹은 참여자로서 경험하며 내가 하는 일이 굳이 공적일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런 편안한 마음가짐을 갖게 된 것은 꽤 최근의 일이다. 물론 내 작업에 한정된 결론이지만,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상상해내기 위해서는 더 이상 시스템이 요구하는 공공성의 논리에 무조건적으로 동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지금 나의 생각이다.

돌이켜보면 기획서라는 형식과 지원사업이라는 방식은 애초에 예술인을 지원하기 위해 설계된 시스템이 아닌 것 같다. 그것은 오히려 ‘예술인을 지원하는 행정가’들을 위해 만들어진 시스템에 가깝다. 나는 그 시스템 속에서도 꿋꿋하게 살아남아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챙기며, 제도적 장치들을 도구처럼 능숙하게 이용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나의 과대평가였는지, 나는 그 정도로 주도면밀한 그릇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웹사이트에 가입할 때 무심코 누르는 ‘동의하기’ 버튼처럼, 내가 도착하기 훨씬 전부터 이미 그 시스템은 너무나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내 사고의 길목마다 심겨 있었다.

이제는 충분히 쉬고 깊게 생각하며, 아무런 이유나 설명 없이도 내가 하고 싶었던 것들을 하나씩 실행에 옮기고 싶다. 외부의 지원이나 설명 없이도 그 기획들이 스스로 오롯이 서 있을 수 있을 때, 만약 그때 사업과 결합할 기회가 생긴다면 그제야 옆에 작은 설명서 하나를 슬쩍 붙여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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